토막살인

by fallbaram posted Aug 10, 2014 Likes 0 Replies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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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살인의 근본적인 목적은 잔인하게 죽이자는 의도 보다도 피살자의 신원을 흐리게 하려는 의도가 더 큰 목적이다.

수사 과정에서 발견된 시신의 토막이 적으면 적을수록 수사가 어려워지고 토막이 크면 클수록 수사가 용이해 진다.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어떤 개인의 소신을 담은 주장을 펼때에 간간이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어떤  용어나 구절만을 인용해서 그 용어에서 풍기는 일반적인 의미나 사전적인 의미만을 끌어들여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다루는 학자적인 자세는 그가 전문적인 관심이 있든지 아니면 아마츄어적 관심이 있든지 첫째로 그 단어가 딱 한번 쓰여진 것인지 아니면 다발적으로 쓰여진 단어인지 살펴 보아야 하고 다음으로는 어떤 내용속에서 쓰여진 단어인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There are in fact two things, science and opinion; the former begets knowledge, the latter ignorance."

"세상엔 두가지의 사실이 존재한다. 과학과 개인적 의견이다; 전자는 지식이 되고 후자는 아무것도 모름 또는 무지를 낳게 된다."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도 이와같이 science 와 opinion 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서 성경의 전체적인 이해나 구조에서 그것을 토막을 내거나 토막보다도 적은것들을 짤라내어 교리 내지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좀 더 안전한 해석상의 프레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Science of Biblical Fact 란?


첫째

성경 전체의 흐름에 맞아야 하고

예) 아담이라는 개체에서 아담과 하와라는 부부로, 노아의 가족으로, 야곱이라는 열두부족으로, 모세에 속한 초기적 국가의 형태에서

다윗의 완성된 나라의 개념으로 그리고 어린양 (예수)에게 속한 허다한 무리에서 마지막으로 재림후에 생명강에서 모이는 셀 수 없는 성도로 흐르는 흐름


둘째 

적어도 한번 이상은 단어나 모양이나 숫자나 어떤 다른 형태의 것으로든지 반복되는 것이어야 하고

예)사단-옛뱀-이 세상 임금-용


세번째

구약에 예언된것이 신약에서 성취된 것이어야 하고-신구약상의 짝의 개념적 차원에서

예)

엘리야-엘리사

모세와-요호수아

침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첫째 아담-둘째 아담

매일 드리는 어린양의 제사 (구약의 성소)-단번에 드린 진짜 어린양의 제사 (십자가)


네번쩨

계단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부합하는 과정적 설명이 가능해야 하고


1)첫째 아담이라는 육신의 나라(에덴-씨의 창조-씨의 변질)

2) 두번째 아담이라는영의 나라로 (갈바리-재창조-새로운 씨)


3)그리고 어린양과 함께 영원히 머무는 하늘 나라로


다섯번째

원어가 의미하는 뜻과 같은 맥락을 견지해야 하고 context 상에서 뒷받침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Opinion of Biblical Fact


첫째) 갑자기 등장하고

둘째) 단 한번만 등장하고

셋째) 기산점 내지는 계산이 불분명하고

넷째) 육신에 적용했던것을 영적으로도 적용하고

다섯번째) 모든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우리는 우리가 억지로 긁어내다 시피하고 토막내다시피한  난해한 성경적 적용의 과정에서 그것을 공론화 시키기전에 가져야 할 의문들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1) 제칠일 안식일을 말할 때 육천년 성경의 연대속에서 1900년이라는 1/3 의 공백이 왜 어떻게 있어야 했는지를 성경자체에서

해답이 있거나 설명하고 있는지 상고하는 자세로 알아보아야 하고 없다면 그 안식일은 어떤 다른 형태의 성취로 발전하고 이루어 졌는지 의문해 보아야 하고 살펴도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의 많은 주제들이 특별히 구약에서 시작한 것들이 신약에서 모양과 phase 가 달라진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2) 성경이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 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날을 정하는그 당위성을 성경에서 납득할 수 있도록 성경적 뒷받침을 찾아야 할 것이다.


3)하나님은 진리의 모양을 장대에 달아서라도 모두가 다 쳐다보기를 원하셨던 그 마음이 왜 어떻게 변해서 이제는 지극히 작은 무리에게만 희미하게 속삭이듯이 보이도록 하셨는지. 아니면 그 작은 무리들에게 진리의 누룩을 넣어서 그 누룩이 부풀려지는 기적을 계획하신 것인지 그리고 그런 계획이 있었더라면 왜 지금도 이 무리는 부풀려지지 않고 쪼그라 드는 것인지.


요 아래 운혁님이 올린 글 (8375) 중에서 석국인님의 댓글에 운혁님이 쓴 내용을 하나 위의 프레임에 넣어서 생각해 보고 싶다.


운혁님 왈" 성경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자기 양심을 계속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라고 했다.

그 말이 쓰여진 성경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인데 마태복음에는

12장 31 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라고 되어있다.


그러면 이 성경절이 context 상에서 하고자 하는 진짜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28 절엔 " 내(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셨다

그리고 29절에선 "강한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집을 늑탈하리라" 고 했고 30절에는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깨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고 하시면서

그러므로를 31 절에 붙이면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의 결론을 도출했다.

성경적인 흐름과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이 천명한 구속의 사업상에서 역사하는 삼위일체의 역할은 이런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아들과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

아들 하나님-우리가운데 보이는 하나님 그리고 만져지는 하나님으로 오셔서 거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구속의 첫 열매가 되시는 분이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아직 들어 오실 수 없는 분.

성령하나님-아들이 이룬 구원을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서 깨닫게 하고 그것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들어 오시는 분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 삼위의 역할이 다 나타나는 성경절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 하나님을 주셨으니 (십자가로)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성령의 능력으로) 멸망치 않고....


마태 12장 28절은

31절에 말하고 싶은 성령훼방죄를 이야기 하기 위하여 시작한 서두이다.

다시말해서 성령을 훼방하지 아니함이란-예수가 성령을 힘입어 죄인들의 속에 거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고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죄인의 마음속에 임한것이라는 말이다.

29절에는 그 말을 이렇게 반복한다.

강한자를 결박하는 일 (첫째 아담-육신의 속한)이 무엇인가를 피추면서 그것이 성령의 사역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30 절에서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그 일이 성령을 훼방하는 일과 동일한 것으로 반복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첫째 아담의 모든죄와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온 인류의 구주가 되신것이다.

이제 그를 쳐다보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을 것인데 그 쳐다보는것 그리고 믿는것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말이다.

개인의 구주로 받아 들여야 구원이 내 속에서 시작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내 속에 있는 첫째 아담의 힘을 결박해야 하고 그 결박된 장소로 아들이 이룬 십자가 즉 새로운 둘째 아담의 구원의 사역이 시작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세가지 십자가의 심판을 말씀하실 때 죄에 대하여 하시는 심판은 "너희가 믿지 아니함이요" 라고 하셨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모든 기틀을 이루셨으나 죄인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아니하는 죄 (딱 하나 남은죄) 는 성령이 오셔서 물으실 심판의 하나임을 미리 예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 믿지 아니함에서 벗어나는길은 성령의 역사를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췌방하지만 아니하면 그분이 우리속에서 강한자를 결박하고 새로은 영을 창조하실 것이고 내 마음속에서 개인의 구주가 살게 되실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로 성천하셨지만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는 약속 또한 셩령의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축복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운혁님이 "양심을 계속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라고 했을 때 이러한 바탕아래서 한 말인지 아니면 같은 맥락에서 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나는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의 입장에서 비록 자신은 깊이 깨달았다 하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애매모호한 내용을 마치 토막을 짤라내듯하는 방법으로 가르치려 하는것이 비 양심적이고 비 성경적이다. 오히려 연대에 집착하기 보다는 구원의 방법론에 더 집중하는 것이 보다 신사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운혁 님이 궁할때 마다 끌어다 쓰는 성경구절이나 단어는 매우 주관적이고 토막적인 표현이라서 간혹 섬짓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끝으로 운혁님이 그동안 쏟아부은 말씀의 시멘트 가루가 트럭 몇대분은 될듯한데 그의 말씀속에서 그가 하고자 하는 말씀이 이해되고 또 감동적이었던 누리꾼들이 있었다면 제발 여기에 후기들을 올려주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 기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면 운혁님은 다시 연구하시고 더 나은 깊이나 방법을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듯이 님이 성경에 줄긋는다고 다 진리가 되고 님 또한 선지자가 되는것이 아닌것 같아 보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There are in fact two things; truth and opinion. the former begets salvation and the latter abhorance.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이 진리요 그래서 그가 진리이신데

님이말하는 "예수님은 서기 30년도에 유월절인 수요일에 돌아가셨다는 진리" 는 사실이거나 오피니언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날자에 줄굿지 말고 예수님 그 자체에 줄을 그으시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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