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by 곽건용 아님 posted Jan 22, 2011 Likes 0 Replies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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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6일 / 정의와 인권주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아모스 5:21-24 마가 3:20-30

곽건용 목사

<탬플 그랜딘>

 

1990년대 중반쯤 어떤 사람이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이 쓴 <그림으로 생각하기 Thinking in Pictures>란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책을 읽고 감명 받아도 거기서 그치지만 이 사람이 그러지 않고 템플의 얘기를 세상에 더 널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녀의 두 살짜리 아들이 자폐아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녀는 미국 연예산업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에이전트였으므로 탬플의 얘기를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가 2010년에 TV 영화로 제작되어 에미상 열다섯 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일곱 개 부문에서 수상한 <템플 그랜딘>입니다. 예쁜 여배우 클레어 데인즈가 템플 역할을 하는데 그녀는 ‘망가지는’ 것을 무릅쓰고 감명 깊은 연기를 했습니다.

 

템플이 자폐 진단을 받은 때는 1950년입니다. 그때는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있으며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말도 없으며 남이 자기 몸을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자폐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런 증상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미국사람들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자폐를 정신분열의 일종이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부모가 아이를 차갑게 대하고 어울려주고 놀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폐아를 가진 엄마를 ‘냉장고 엄마’(refrigerator mothers)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자폐진단 받은 아이를 격리시설에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템플의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특수교육 교사를 채용해서 딸을 특별하게 교육시키는 한편 학교는 일반학교에 보내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교육받게 했습니다. 그래서 중학교까지 그럭저럭 다녔는데 고등학생 때 자기를 놀리는 아이를 책으로 때리는 바람에 템플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맙니다. 그 동안의 특별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템플의 엄마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딸에게 가장 잘 맞는 학교를 찾다가 그녀를 햄프셔 컨트리 스쿨(Hampsire Counrty School)에 다니게 하기 위해 그 학교를 방문하여 직원과 교사들과 면접을 합니다. 이 학교는 이름이 보여주듯 교정에 온갖 동물들이 돌아다니는 자연학교로서 동물을 좋아하는 템플에게는 최고의 학교였던 셈입니다. 템플은 거기서 그녀의 생을 바꿔놓은 칼록(Carlock)이란 훌륭한 선생님도 만납니다. 칼록은 템플의 입학을 불허하려는 학교 당국자들을 설득해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그녀를 입학시킵니다. 그는 나중에 템플이 무엇이든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낸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그 능력을 발전시킵니다. 그래서 그녀가 쓴 책이 <그림으로 생각하기>입니다.

 

햄프셔 컨트리 스쿨은 그녀에게 딱 맞는 학교였습니다. 그녀는 과거에도 방학 때면 애리조나에 있는 이모의 목장에 놀러가곤 했는데 거기서 그녀는 동물들이 자기처럼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동물에 매료됩니다. 이 경험은 그녀가 나중에 이룩한 독보적인 업적의 씨앗이 됐습니다.

 

템플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도살장으로 실습을 나갑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도살장은 마초 근성 가득한 남자들만의 일터였습니다. 여자들은 거기서 일하기는커녕 들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살장을 출입할 수 있게 된 템플은 도축당하는 소와 돼지들이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돕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녀는 오랜 관찰 끝에 동물들도 자기들이 도살당하는 줄 알고 극도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녀는 그 불안과 두려움을 없애는 시설을 발명하는 데 전념했고 드디어 그것을 발명해냅니다. 그녀는 훗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육식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우리는 그 일을 올바로 해야 한다. 식용으로 사육되는 동물이 존엄한 삶을 살게 해야 하고 고통 없이 죽게 해야 한다. 동물은 사람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도살업자들을 설득해서 그 시설을 설치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는 관철해냅니다. 이것은 템플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템플이 자폐아 컨벤션에 참석해서 단상에서 벌어지는 토론을 듣고 있었는데 토론이 지지부진하고 내용이 없자 벌떡 일어나서 자기가 어떻게 자폐를 극복했는지, 자기가 어떤 학문적인 성과를 거뒀는지, 자기 엄마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를 도왔는지를 어눌한 말투지만 감동적으로 얘기하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모인 사람들이 그녀를 단상으로 이끌어내서 그녀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끝납니다.

 

 

따져봐야 소용없는 일을 따지는 사람들

 

자폐는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지는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자폐를 일종의 정신질환으로 생각되어왔지만 지금은 그것이 틀렸음이 의학적으로 확인됐습니다. 자폐아에게서 자폐 증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일찍 발견하기만 하면 꾸준한 교육을 통해서 그 증상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자폐는 그저 다른 사람과 다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따라서 자폐를 질병과 같이 자리에 놓고 얘기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폐를 질병으로 생각했고 성경시대의 사람들 역시 단순한 질병까지 그 이상의 것, 예를 들면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하거나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으므로 무리를 무릅쓰고 비교를 위해서 자폐와 질병을 같은 선상에 놓고 얘기함을 이해해주십시오.

 

우리는 병을 앓는 사람을 보면 측은해합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환자에 대한 측은지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는 마음이요 그런 의미에서 인지상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환자를 보고도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는 정상이랄 수 없는 냉혈한이겠지요.

 

그런데 복음서를 보면 병자를 보고 측은한 마음을 품기보다는 왜 그가 그런 병을 앓고 있는지를 궁금해 하고 그 이유와 원인을 규정하려 드는 사람이 있음을 봅니다. 물론 한편에선 측은한 마음이 있었겠지만 그런 마음보다는 이치를 따지고 원인과 이유를 규명하고픈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자인 사람을 두고 그가 그렇게 된 것이 본인의 죄 때문이냐 부모의 죄 때문이냐를 물었던 예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역시 당시 유대인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병을 앓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 모종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시각장애자로 태어난 사람의 죄는 누구의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죄를 짓기 전부터 시각장애자였으니 그 죄는 부모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지요. 이 물음을 물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한 9:3).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일단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 탓도 아니다.’라는 말에는 여러분도 모두 동의할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겠지만 적어도 우리들은 병이나 장애를 무조건 죄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모든’ 병과 장애가 다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문제는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란 말씀이 무슨 뜻이냐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시각장애자로 태어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지는 보여주기 위해서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위대함’이나 ‘기적’이란 말 대신 ‘사랑’이란 말을 넣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을 가진 분인지를 보여주려고 사람을 시각장애자로 태어나게 하신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위대함/능력/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요. 믿을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믿게 되지 않겠지요.

 

그럼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저도 모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시각장애자로 태어난 것이 본인의 죄 때문도 아니고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크게 부끄럽지 않음은 제가 아는 한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풀어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논의를 다 살펴보지 못한 주제에 이렇게 말하는 게 옳지는 않지만 그만큼 이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셨을 때 예수님에게 세상 이치를 미리 다 알려주어 깨닫게 하시고 그분을 세상에 보내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삼십 여 년을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갈망하고 있는지, 무엇이 사람들의 생명을 짓누르고 있는지, 사람 안의 무엇이 그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지를 배우고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세상의 생각과 전통과 종교와 맞지 않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결국 이 불편함이 그분을 십자가로 이끌고 갔던 것입니다.

 

여기 시각장애자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힘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었을 터이니 다행히 부모를 잘 만났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았다면 남에게 구걸하는 걸로 연명했겠지요.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장애가 하나님께 지은 죄의 결과라고 보는 신학이 당시 그가 살던 사회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으니 그는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 사람은 가운데 놓고 사람들이 논쟁을 벌입니다. 그가 장애자인 게 누구의 죄 때문이냐를 두고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물론 장애인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드셨겠지만 측은지심 이외에 더 생각해봐야 할 점은, 이런 상황이 예수님에게는 매우 ‘불편’했을 것이란 점입니다. 그가 단지 장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매우 불편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당사자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과거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미래로 옮겨놓아 이 불편함을 드러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불편을 해소하려는 시도였을 거라고 이해해봅니다.

 

차별에 불편해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정의와 인권의 출발

 

오늘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탄생일을 맞아 지키는 ‘정의와 인권주일’입니다. 지금부터 사오십 년 전에 흑인들에 대한 차별 때문에 불편함을 느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차별을 정당화하는 모든 논리에 승복하지 않았을 뿐더러 시각 자체를 과거에 고정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킹 목사님의 저 유명한 “I Have a Dream” 연설입니다.

 

그로부터 사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네 삶의 곳곳에서 불편함을 느낍니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인종차별이 엄존합니다. 수많은 흑인들이 지금도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불편한 상황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도 눈감지 말아야겠지만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부분 중 하나는 장애자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무지와 편견입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을 환자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말고 단지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보고 대하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템플 그랜딘의 생애에서도 보듯이 그들은 단지 다를 뿐입니다. 템플은 동물들과 똑같이 생각하는 능력으로 도살당할 동물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여 그들이 최대한 안락하게 죽어갈 수 있는 시설을 발명해냈습니다. 이 일을 템플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불편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태어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어느 정도는 다 불편함을 느끼지만 말입니다. 만일 이 불편함을 덜 느낀다면 그렇게 느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경건의 훈련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하는 훈련이나 뜻도 모른 채 성경을 많이만 읽는 훈련은 경건의 훈련이 아닙니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불편함을 느끼는 훈련은 가장 중요한 경건의 훈련 중 하나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 대한 모든 차별은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모든 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리신 예수님의 복음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불편해도 괜찮아>라는 책을 쓴 김두식 교수는 ‘인권 감수성’이란 말로 표현했더군요.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이 말을 많이 써서 널리 퍼뜨려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만나 어울려 사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바로 정의와 인권의 출발입니다. 이것을 못하면 우리는 절대로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없고 인권을 존중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한참 멀리 떨어져 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단 차별에 대해 불편해 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차별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측은해하는 마음을 품고 사랑하며 삽시다. 그리고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그 다름은 인정하며 감사하며 삽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하늘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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