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의 기도에 관한 희한한 정의: 인간에게 기도를 구걸하는 무능한 신의 이야기--남의 신 얘기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 얘기. 이런 신에게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가.

by 김원일 posted Sep 05, 2014 Likes 0 Replies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104년 8월 31일 / 성령강림절 열네 번째 주일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4

마가 9:14-29

 

곽건용 목사

 

기도는 그런 게 아니다!

 

오 늘은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라는 제목의 설교 시리즈 네 번째입니다. 지난주일 설교를 잠시만 돌이켜보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구약성서에는 세 가지 종류의 ‘타락’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타락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서 이것은 ‘개인’의 타락을 보여주고, 두 번째 타락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한 얘기입니다. 이는 ‘신적인 존재’의 타락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타락은 창세기 11장 바벨탑 얘기가 보여주는 ‘집단의 타락’ 또는 ‘공동체의 타락’입니다. 세 가지 타락 얘기는 각자가 나름의 의미를 갖는 독자적인 얘기이면서 동시에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타락 얘기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의 타락은 신들의 타락과 무관하지 않고 신들의 타락은 공동체의 타락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렇듯 개인과 신들과 공동체는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뭔가’는 ‘악’(惡)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善)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우리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첫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파괴되지 않았다는 점은 성서의 인간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이상의 선한 무엇’이 타락한 신들과 타락한 공동체에도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점은 나중에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오 늘은 ‘기도’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천사와 악마 얘기하다가 왜 뜬금없이 ‘기도’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이상의 선한 무엇’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 도에 대한 얘기의 결론을 미리 얘기하겠습니다. 이를테면 스포일러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답은, 기도란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나와 이 세상을 악령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영적인 도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지금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이와 같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미래, 곧 대안적 미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힘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대한 얘기의 결론인데 앞으로 두 주일동안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하나 풀어가 보겠습니다.

 

기 도에 대한 얘기를 석 주나 하는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아니면 우리는 악령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도? 그거 하면 됐지 뭐가 문제야?’라고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기도란 것이 그냥 무릎 꿇고 앉아서 눈 감고 중얼거리면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나와 이 세상을 악령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영적인 도전’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기도가 대체 뭔지, 근본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우 선 분명히 할 것은, 기도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기도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복을 받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정성’을 보고 그걸 들어줄지 안 들어줄지 결정하는 분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기도는 성공의 도구나 출세의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했더니 성공했다거나 계약이 성사됐다거나 집값이 올랐다면 그건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악령의 짓일 수도 있습니다. 사십일 동안 금식한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 악마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예수께 줄 테니 자기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기억하시죠? 여기서 악마의 말은 허풍이 아니라 진실이었습니다. 악마에게는 그럴 힘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게 허풍이었다면 예수께서 받은 시험은 아무 의미도 없지 않겠습니까. 지지난 주일에도 말씀했듯이 하나님과 악마의 차이는 순종하면 자유롭게 만들어주느냐 아니면 종으로 삼느냐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해서 성공하고 출세했다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도 쉽게 믿지는 말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악마가 나를 종으로 삼기 위해 하는 짓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편으로 기도로 성공도 하고 대학에 합격도 하고 돈도 벌고, 다른 한편으로 나와 세상을 악령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틀린 생각입니다. 기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기도는 절대로 성공의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 자체가 ‘그 이상의 뭔가’입니다.

 

왜 기도해야 하나? 기도는 가능한가?

 

많 은 기독교인이 기도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기도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기도는 의무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기도를 ‘공적’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는 많이 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많이(오래) 할수록 신앙이 좋은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처음 전도사 생활을 했던 교회의 담임목사는 새벽기도 시간에 가장 늦게까지 기도하곤 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개인 기도를 하고 돌아간 다음까지 남아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목사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목사라면 무르팍이 물러터질 정도로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목사나 장로가 아니면 기도를 덜 해도 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기도가 정말 그런 것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정성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이 말이 맞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도를 오래 하는 게 전부는 아닙니다.

 

기 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기도가 뭔지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도가 대체 뭡니까? 왜 기도해야 하는 겁니까?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는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흔 히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영혼의 호흡’이라, 참 멋진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 말은 기도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은유’(metaphor)입니다. 기도를 뭔가 다른 것과 비교한 말입니다. 기도를 쉽게 정의하면 ‘뭔가 바라는 걸 갖고 절대자와 소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혼의 호흡보다 멋지진 않지만 기도가 뭔지 쉽게 설명합니다. 기도는 절대자인 하나님과 소통하되 기도자가 뭔가 바라는 바를 갖고 소통하는 겁니다. 그냥 재미로 하는 게 아니라 뭔가 바라는 것을 갖고,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기도의 제목’을 갖고 소통하는 것이 기도란 말입니다.

 

왜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합니까? 따지고 보면 반드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아무 문제없다면 왜 굳이 기도하겠습니까. 기도는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게 다 잘 풀려나가고 문제될 게 없다면 왜 굳이 기도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의 성공에 국한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육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게 잘 풀려나가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굳이 기도할 필요 없습니다.

 

그 런데 세상에 기도가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꼭 기도해야 한다는 걸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은 실제론 기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대개는 기도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기도가 자기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가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곧 이기적인 사람이기 십상입니다.

 

기 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기도라는 것을 용광로에 넣어 태우면 마지막에 남은 게 뭘까요? 기도를 다 태우고 나면 남는 것은 ‘남’ 곧 ‘타인’입니다. 기도는 오로지 ‘남’을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기도는 나와 남을 위해서 하는 거지. 왜 굳이 남만 위해서 하는 것이어야 하는데?’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나 아닌 남을 위해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의 꽃은 ‘중보기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나를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라며 고개를 저을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입을 열어 기도하기 전에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 이미 알고 계시다고 말입니다(마태 6:8, 25-34).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더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다만 기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리고 실제로 기도를 할 때 ‘남’의 존재를 늘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말만 하고 그 이상의 얘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다 음으로 기도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합니다. 과연 기도란 게 가능한 일인가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기도가 가능하냐니? 그럼 기도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기도는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기도가 가능한 일인가를 묻는 겁니다.

 

기 도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를 듣는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독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명상이 아닙니다. 마음수련이나 마인드컨트롤도 아닙니다. 기도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거는 말을 받아줄 상대가 있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대도 내게 말을 걸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도가 나를 상대해주는 것이 당연한 상대에게 하는 게 아니란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는 부모에게 하는 게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친구에게 하는 것도 아니고 스승이나 성현(聖賢)에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절대자’ 하나님께 하는 겁니다. 기도란 뭔가 바라는 바를 갖고 절대자 ‘하나님’에게 말을 거는 행위입니다.

 

기 도가 가능하려면 나와 소통하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도 내가 바라는 바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나의 관심사를 자신의 관심사로 받아들이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게 나의 관심사임을 인정해줘야 소통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하나님 자신의 관심사로 받아들이면 더 좋겠지만 말입니다. 이 점은 기도할 때 내 소통의 대상인 하나님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도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서 거기 공감하면 더 좋겠지요. 그래야 소통이 가능하겠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관심사에 관심을 가져야 소통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목소리 높여 외쳐도 그건 독백에 그칩니다. 독백은 소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렇듯 소통할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곧 기도의 상대인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도는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기도는 독백이나 명상이 아니고 마음수련이나 마인드컨트롤도 아닌, 상대가 있는 것이고 그 상대가 절대자 하나님이므로 절대자의 존재 여부는 기도에 있어서 피할 수 없이 대면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해야 기도든 뭐든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계셔야 이 모든 얘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완전히 무의미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선택이다!

 

하 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옛날부터 당대의 수많은 석학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의 공감을 얻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할 수도, 반증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백 개의 기막힌 유신론이 없는 하나님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일백 개의 정교한 무신론이 있는 하나님을 없애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 나님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고 믿고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살기로 선택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이 말에 놀랄 분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에 대한 믿음이 ‘선택’의 문제라니! 그것은 ‘당위’가 아닌가?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린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전에,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증명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겁니다. 어렸을 때는 누군가의 강요나 주입으로 그렇게 했을 수 있지만 철이 든 다음에도 계속 믿는 것은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도 역시 ‘선택’이란 얘기입니다.

 

물론 어느 편이든 ‘선택’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선택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존재하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존재하는 겁니다. 너무 도발적이고 이단사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게 맞는 말이고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부활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그게 없다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부활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든 부활이든 그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하나님 또는 부활이 존재하니까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부활이 없다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유신론이나 무신론은 입증할 수 있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무신론자는 감사할 일이 생겼을 때 감사할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저는 이를 살짝 패러디해서 “진정한 무신론자는 기도할 일이 생겼는데 기도할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여 기까지 말한 걸 정리해보겠습니다. 기도는 가능할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가능하지 않은 사람은 첫째로, 절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기도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둘째로,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절대자가 나와 ‘소통’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기도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 역시 기도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믿는 신은 이신론자(理神論者)의 신입니다. 곧 신은 세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다가 법칙을 부여한 다음 그 법칙대로 세상이 운영되게 하고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곧 신은 자연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과 소통할 필요가 없는 신입니다.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봐야 응답하지 않는 절대자라면 기도할 이유가 없겠지요. 셋째로, 절대자가 존재하고 나와 소통도 하지만 기도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를 뒤집으면 기도가 가능한 사람은 나와 소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이 존재하고 또 소통을 통해서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보내는 구조신호(SOS)

 

마 지막으로 ‘기도는 왜 하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합니까? 이 질문은 기도를 사람 편에서 보고 묻는 질문인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람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앞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알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매우 자주,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는 피를 토하듯이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대체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을까요?

 

예수님이 기도하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기도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기도하셨습니다. 대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이 기도하시기를 원하셨을까요? 기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내는 ‘구조신호’(SOS)이기 때문입니다.

 

기 도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보내는 구조신호입니다. 곧 도와달라는 호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하겠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애초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못 하시는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전능하시다고 믿었던 겁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의 뒤에는 쫓아오는 이집트 병사들이,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혀 있을 때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뭍을 걷듯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태양을 멈춰 서게 하셨고 뒤로 되돌리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못 하시는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적들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가능할까 하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못 하시는 게 없는 분이니 말입니다.

 

그 런데 이런 그들에게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생겼는데 그것은 ‘왜 이렇듯 선하고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 왜 악한 사람은 흥하는데 착한 사람은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는가, 왜 세상에는 악인이 판을 치는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말입니다. 이런 고민과 고뇌가 구약성서 시대 후기로 갈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책이 시편의 여러 시들과 욥기입니다. 욥기 38장 이후에서 야훼 하나님은 욥에게 이런 취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이 판치는 꼴을 못 보겠다고? 왜 악인들을 망하게 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거든 네가 그렇게 해봐라! 나는 그렇게 못하겠으니 네가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봐라! 악인들을 몽땅 쓸어버려라!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봐라!” 이스라엘 백성은 차차 깨달았습니다.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홍해를 갈라 자기들로 하여금 맨땅 걷듯이 건너게 하셨던 하나님도, 태양을 멈췄던 하나님도 못 하시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고 세상을 낙원으로 만드는 일이라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 래서 기도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 일을 같이 하자고 보내시는 ‘구조신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SOS를 치시는 겁니다. 당신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정화하자고, 함께 창조세계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자고 간절히 우리를 부르시는 호소, 바로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나와 이 세상을 악령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영적인 도전’이라고 말한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더 얘기하겠습니다. ♣


노란 색상배경은 퍼온이의 것.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