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님:
아래의 글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 올려놓은 글이다.
계명 또는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모든일을 항상 하지 아니하는자는 저주아래 있는자"라는 의미를 한번도 새겨서 생각해보지 못한 자들 같이 주구장창 날뛰는 잡초들의 무례함이 민초의 고요를 뒤집고 무슨 황건적같이 이마에 노오란 띠를 띄고
성난 황소같이 달려 드는 모습을 보고 우리교회의 현실과 앞날이 심히 염려스럽다. 그냥 토론의 수위를 넘어서서 이제는 돌멩이질 내지는 욕지기가 귀에 걸려있는듯 험악한 분위기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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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주체가되는 분께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는데 그가 여러군데의 성경에서 그분 안에 거하기를 포도나무에 붙어있음같이 붙어있으라는 방법론을 같이 주지 않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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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에 있는 말씀을 말하신 것 같습니다.
한번더 새겨서 생각 해보지 못한 자들이라고 하셨는 데,
한번 새겨서 생각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율법은 저주를 주는 것이니 필요 없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저는 이 말씀 같이 율법의 역활과 기능을 잘 표현한 말씀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율법행위"라는 말은 율법의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저주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말일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의 행위없이 인간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예수가 절대 필요하다는 바울의 강력한 논조 아닙니까?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선생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율법이 없이는 그리스도께로 아무도 갈 수 없다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십자가는 십자가 자체로 인간을 끌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십자가로 갈 수 있겠습니까?
율법 말고 자신이 죄인이며, 저주 받아 죽을 자라고 깨닫게 되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바울이 율법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는 데,
그 정 반대가 아닙니까?
십자가가 우리를 죄로 저주로 인도 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율법이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어 십자가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을 유일하게 십자가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율법(계명) 밖에 없다는 것을 "새겨서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율법의 인도 없이,
십자가로 가는 사람들은
다 다른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예수님도 전혀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병든자 만이 의원이 필요하다"라고 말씀 하신,
만고의 진리가 아닙니까!
자기가 병들었다고 진단 할 방법이
율법(계명) 외에 무엇이 있습니까?
의사가 청진기 없이 병자를 진단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청진기를 버리자!
이것이 말이 됩니까?
새계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내용이 무엇이 바뀐것이 있나요?
우리로 하여금 더 저주받을 자라는 것을
더 빨리 깨닫게 율법의 수위를 더 높인 것이 아닌가요?
피동적인 것에서 더 적극적인
"사랑하라"
더 나가서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더 나가서 "내가 사랑한 것같이, 내가 죽은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라"
이 계명 앞에 저주받지 않을 인간 나와 보라 하지요.
계명의 기능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단 말입니다.
더 쎄졋으면 쎄졌지.
이렇게 율법의 요구는 높은 것입니다.
어디까지냐 구요.
하나님의 성품까지요
그러니 이 세상 어느 인간이 그 율법 앞에서 저주를 받지 않을 인간이 있겠습니까?
이 준엄한 율법앞에
인간은 무릎꿇고 회개 할 방법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속수 무책이란 말입니다.
겸손할 수 밖에 없단 말입니다.
두손 들고 항복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를 내 세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의" 외에는...
이러한 절망을 알게 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 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의를 제공할 뿐입니다.
그 십자가로 이끄는 것이 율법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 즉 율법의 기능과 십자가의 기능을
깨닫고 행위하는 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달랑, "그리스도의 의" 만 달라고 메달리고 쎄게 "믿쉽니다" 라고 웨쳐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역활없이 믿음은 생길 수 가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깊이 "새겨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
"포도나무에 붙어 있음" 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짧게 끝냅시다.
어떻게 인간이 계속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인간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할 필요를 느낄까요?
접작체는 율법이고,
붙어있어서 얻는 결과물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닐까요?
말씀하신대로 우리 깊이 "새겨서 생각" 합시다!
"십계명 졸업"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무슨 졸업을 한단 말인가? 그 무슨 대단한 반어법 같은 메시지를 전하려는 표현인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예수님이 새 계명을 준다고 하여 십계명을 폐기한 것처럼 김jy은 주장하였다. 십계명의 문자를 그대로 두고, 그 정신을 새롭게 적용하여 살라는 것이 예수님의 교훈이었다. 그 속에 든 사랑의 진정한 정신을 일깨우시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고, 그게 새 계명이었다. 그러나 김JY의 글은 그것도 아니었고, 그거 엉뚱하고 비뚤어진, 잘난 체하는 발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