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범하라고 있고, 졸업하라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과 순댓국 이야기(수정)

by 김원일 posted Sep 15, 2014 Likes 0 Replie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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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님이 "십계명 졸업" 글을 처음 올린 후

그 뒷북치기로 올리려고 쉬엄쉬엄 쓰다 말다, 쓰다 말다 하던 글이 날아가 버렸다.

이 글은 그래서 짧아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읽는 사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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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은 단 한 번에 끝낼 일회성 정치적 사건이었다.


정치적, 사회적 억압은 끝났다.

자유인으로 살아라.


그렇게 자유를 얻은 그들

그 후 한 육칠 세기

국내, 국제 역사의 무대 위에서 개죽 쑤며 게기다가 판이 다시 뒤집어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출애굽만큼은 그랬다.


항구적인 자유를 위한

일회성, 비 반복성 정치적 해방 사건.


지금부터 정치적 노예 생활은, 억압은 없다는 뜻의 일회성 사건.

그게 출애굽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또 다른 억압이 이 해방된 민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죄와 죄의식의 억압.

The oppression of sin and guilt.


여느 억압처럼

이것도 해방이 필요한 억압이었다.



(그런데

이 해방은 순댓국과 다르다.


순댓국?


iPad에 대고 dictation을 했더니

출애굽을 순댓국이라고 알아들었다.


웃다가 죽는 줄 알았다.

내 iPad가 나 순댓국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이래서 음성 입력으로 글쓰기 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자판으로 얌전히 복귀해

음성 입력 포기하고 재래식 손가락 방법에 의존한다.^^)



다시 시작.



그런데

이 해방은 출애굽과 다르다.


죄와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

Liberation from sin and guilt.


출애굽과는 다른 해방이다.

한 번에 끝날 해방이 아니다.


출애굽이 가져다준 정치, 사회적 자유는 항구적이다.

적어도 항구적이야 한다.

또 다른 출애굽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정치, 사회적 해방과 자유가 항구적인 만큼

죄와 죄의식의 억압 또한 항구적이다.


한 번 해방되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억압이 아니다.

지은 죄 용서받고 자유로워져도

또 죄를 짓는다.


이것이 인간 조건이다.

정치적 해방과 자유 너머

우리가 모두 안고 사는

인간 조건이다.








그래서

출애굽기 너머 레위기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해방됐다고, 자유 얻었다고 우리 까불 수 있는 계제가 아니다.

영구적으로 죄짓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

그 어쩔 수 없는 인간 조건,

그 인간 조건의 폭력적 억압,

그건 어떡할 건데?


더구나

우리의 전혀 거룩하지 못한 공동체 

그 중심에

신이 장막 짓고 들어앉아 우리와 함께 영구적으로 거하겠다는데

이거 어떡할 거냐고?


그래서

출애굽기 너머 레위기다.


그래서 출애굽 너머 십자가다.

물론 십자가의 의미가 그게 다는 아니지만.





율법?

그거 물론 범하지 말라고 준 거다.


그런데

우리 그거


범한다.


항상.

영구적으로.

무궁무진하게. ^^


그래도 신은

이토록 전혀 거룩하지 못하고

항상, 쉬임 없이, 범사에 헤매닥질치는 우리 와중에

성막 짓고 거한다.


전혀 거룩하지 못한 우리 인간 조건 그 와중에

떡하니 자리 잡은 그의 거룩한 임재

이거 우리 어떡할 건가?


그래서

출애굽기 너머 레위기다.


그래서

정치적 해방 너머, 율법 너머 레위기


정치적 해방 너머, 율법 너머

십자가다.







그런데,


율법,

그거 범할 줄 알면서 왜 주었는가?


범하라고 준 것이다.


안 범하겠다고 아무리 지랄발광해봐야

범할 수밖에 없으므로


사실

범하라고 준 것이다.


범하지 말라고,

그러나

또 범하라고 준 것이다.


그거

범하면서 범하지 않는 것,

범하지 않으면서 범하는 것,


그게 우리의 실존적 모습이다.


범하지 않는 그 순간에 이미 우리는 범하고 있다.


다분히

비관적 인류학 (pessimistic anthropology), 비관적 인간관 (pessimistic view of human)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출애굽기 너머 레위기다.


그래서

출애굽, 율법 너머 십자가다.




......




그리고


범하지 않으면서도 범하는

범하면서도 범하지 않는


그 율법이라는 것,


그거

졸업하라고 있는 것이다.


율법이 말하는 살인 안 해서

우리 만족하는가.


율법이 말하는 간음 안 해서

우리 만족하는가.






법이란

시행력 있고

집행력 있어야

법이다.



시행력 있고

집행력 있는


법.




그거 잘 지켜서

우리 만족하는가.






시행력, 집행력 있는 게 법인데


바로 그 시행력, 집행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진정한 윤리의 영역에 들어선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을 상기시키는

그런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윤리 말고


법을 넘어선 인간의 창조적 계발과 개발을 말함이다.




법은 최소한의 (minimalist) 강령 주의적 자세이고


윤리는 최대한의 (maximalist) 창조적 삶의 자세다.




둘 다 필요한데


전자는 시발점이고

후자는 종점 없는 여로다.




“Ethics begins to operate when one reaches the bounds of the legally enforceable.”

윤리는 법적 시행령, 법적 집행령이 그 한계에 도달했을 때 작동하기 시작한다.


독일의 구약 학자 Eckart Otto의 관찰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법은 최소한의 강령주의,

윤리는 최대한의 창조적 여로인 것이다.








마지막 계명.


탐내지 마라.




열 계명 중 유일하게

시행령, 집행령의 한계를 알리는 계명이다.


탐내는지 안 내는지 겉으로 보아 어떻게 아는가.


모른다.



외적 집행령, 시행령을 사실상 포기하는 계명이다.



그리고

진정한 윤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지금까지 말한 저 아홉 개

너희 아무리 폼 잡아봐야 범할 수밖에 없다는 말 아니면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그럼에도 그 아홉 개 졸업하라는 말 아니면

이 또한 무슨 말이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또 비교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인류학(optimistic and positive anthropology, view of human)이다.


구약,

우리 약 올리며 데리고 놀자는 건가. ^^






범하지 말라고 주기는 했지만

우리는 범한다.

항상.


결국, 범하라는 얘기다.

비관적이다.



"그래도 나는

나의 거룩한 임재를

전혀 거룩하지 못한 너희의 와중에

확 꽂아 놓는다.


어떡할래?




그래서

출애굽기 너머 레위기다.




내 계명 범하지 마라.


근데 있지,

너희는 항상 범한다.

영구적으로.



그럼에도 나는 너희와 함께한다.


이름하여

임마누엘이다.




율법.


범하지 마라.

그리고 범해라.




그러나 동시에

졸업해라.




이것이

너희 인간 조건의 모순( Paradox)이다."






Simul justus et peccator.

Simultaneously righteous and sinner.

우리는 동시에 의로우면서 죄인이다.


거기다가 하나 더해서

끊임없는 졸업까지 해야 한다.


무궁무진한 범법과

무궁무진한 졸업의 과제.


모순 중 모순이다.


이 모순의 무게 우리 견뎌낼 수 있는가.





출애굽 너머 레위기다.

출애굽, 율법 너머 레위기, 십자가다.


십자가 너머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끊임 없이

범법하고 졸업한다.


모순이다.


......





그 모순 한복판에

돗자리 깔고 앉아 있는 

일그러진 신의 얼굴.


이는 또한

그의 모순이다.


그가 견뎌내야 할

Divine paradox다.




출애굽은 순댓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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