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을 바로잡고자 한다. 먼저 로마서 7장 전체를 올려놓고 주석적 고찰을 함 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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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서두에서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라고 하면서 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앞으로 분명 생기게 될 율법 옹호자들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는 설교다. 그리고 6절 까지는 법과그리스도의 몸을 대조하면서 법은 전 남편이고 그리스도의 몸은 새남편이라는 비유로 발전한다. 전 남편을 섬기며 사는 동안에 새 남편을 섬기고자 하는일은 간음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7절 부터는 전 남편과의 삶속에서 전남편이 나쁜놈이냐 아니냐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내 (죄인)몸속에 있는 무능함이 죄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런 이유 때문에 전남편의 요구가 내 속의 악함 내지는 무능함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 지지 않을 뿐 율법의 요구 자체는 선한것이라는 보충 설명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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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요한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이 보충설명일 뿐 이 글의 주제는 아래의 것이다.
다시 해석해 본다면 내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한 원리를 발견하였는데 즉 내 영혼으로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마음의 법-그리스도의 법) 내 지체에 박혀있는 육신의 법 (육에 주어졌던 율법)이 나를 사로잡아 나를 곤고한 사람으로 만들고 사망의 몸으로 계속해서 유지시킨다는 한탄을 한다. 그래서 이 사망의 몸에서 탈출하는 길이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 이중적인 육과 영의 헷갈림을 잘 설명한 글이 김 원일님의 순댓국 지론에서 볼 수있다. Simul justus et peccator. Simultaneously righteous and sinner. 우리는 동시에 의로우면서 죄인이다. 거기다가 하나 더해서 끊임없는 졸업까지 해야 한다. 무궁무진한 범법과 무궁무진한 졸업의 과제. 모순 중 모순이다. 이 모순의 무게 우리 견뎌낼 수 있는가. 그래서 아래의 결론으로 가는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1절부터 6절까지의 주제를 그 다음부터는 한번 더 반복한 것를 메뚜기들이 놓치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율법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날뛰는 것을 나는 우려한다. 다시 한번 간추리면 우리가 마음으로는 율법과 은혜를 결코 동시에 섬겨선 아니된다. 율법을 섬기라고 강요하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지체요 사망의 몸인 육신이다. 왜 둘다 남편이냐 하면 율법도 사망의 몸에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몰아가고 은혜도 우리의 마음안에서 죄에 이르지 아니하도록 몰아가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님이 주구장창 부르짓는 율법의 기능을 이렇게 설명되어야 맞는것이다. 비슷하지만 님은 그래서 율법이 필요하다고 율법 옹호의 길을 가는 사람이고 그래서 나는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속히 떠나 새남편을 맞으라는 기별을 전하는것이다. 자세히 위의 성경을 읽어보면 그대들이 선하다고 난리 법석을 떠는 율법을 내가 행하면 행할수록 점점 더 죄인이 되는 나의 몸속의 처절함을 배우는 것이 골자이다. 그래서 율법과 은혜의 리듬을 썩어질 것 (육신-첫째 아담)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것 (은혜-예수 그리스도)으로 거둔다고 하지 않는가. 강한자를 결박지 않고서야 어찌 늑탈을 할 수 있겠느냐로 비유한 그 말씀이다
순댓국 지론으로는 그 유명한 말 출애급 넘어 레위기라는 말이다. 계명을 님 이 성경구절에 속고있는자는 바로 당신이야 빨리 돌아서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