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9/7) 설교다. 이 날 설교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시리즈 다섯 번째 설교로서 그 전 주일에 이어 '기도'에 대해 얘기했다. 설교 원고를 곧 올릴 예정이니까 듣고 싶은 분은 듣고 읽고 싶은 분은 읽으면 되겠다. 써비스가 이 정도면... ^^
젊었을 때는(어르신들께는 죄송하지만) 설교를 잘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 많이 들여서 이 생각 저 생각해가면서 이 책 저 책 뒤져가면서 멋지고 감동적인 말과 표현을 찾거나 만들려고 무척 애썼다. 뭐 그 나이 땐 그래야겠지... ㅎㅎ 근데 요즘은 안 그런다. 굳이 멋진 표현을 하려고 애쓰지도 않고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려 노리지도 않는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고민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말을 한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 하는 고민을 안 한지는 이미 오래됐다. 내가 부러운 목사들도 꽤 될 거야. 안 그런가? ^^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문제는,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얘기하다 보니까 내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생기더란 거지. 그래서 설교하면서 울컥 하는 때가 간혹(보다는 더 자주) 있다. 이게 단순히 홀몬 때문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이 날도 그랬다. 다행히 꿀꺽 삼키긴 했지만 말이다. 글만 올렸을 땐 그걸 감출 수 있었는데 음성을 올리니까 감출 수가 없네! 그래도 목소리 좋다는 얘길 가끔 들으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기로 하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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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7일 / 성령강림절 열다섯 번째 주일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5
마가 9:14-29
곽건용 목사
하나님을 더 많은 엘리트들이 기도하면 더 잘 들어주신다?
‘기도’란 것이 내 힘만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갖는 것이라면 그런 기도는 이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나는 그것이 갖고 싶은데 내 힘으론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미사여구와 구실을 만들어 하나님에게 비는 것이 기도라면, 기도가 정말 그런 거라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더 이상 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됩니다. 확언하건대 그런 기도는 절대 ‘응답’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내 욕망을 채우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 나는 그렇게 기도해서 응답받은 적이 있는데…….’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악마가 한 짓입니다. 지난 주일에 얘기했듯이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는 자기에게 절하면 온 세상을 예수께 주겠다고 했습니다. 악마에게 실제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그 유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능력을 가진 악마가 무슨 짓은 못 하겠습니까. 내 욕심을 하나님의 바램인 것처럼 꾸며도 소용없습니다. ‘제 기도를 들어주시는 게 하나님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식의 ‘사기’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얕은 꼼수에 넘어갈 바보가 아닙니다.
좋은 책을 많이 쓴 성공회 존 셀비 스퐁 주교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의 부인 조앤이 치명적인 암에 걸렸습니다. 이 부부의 집안이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명문가이므로 부인의 발병 소식은 교구에 널리 퍼졌고 교구 신자들은 조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조앤을 위한 기도그룹이 많이 만들어졌고 예배 때마다 그녀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답니다. 조앤은 암 진단을 받은 후 6년 반을 더 살았는데 이는 의사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 덕분이라고 말들 했지만 스퐁 주교 내외는 그 말이 곤혹스럽고 불편했다고 합니다. 예컨대 가난한 청소부의 아내가 같은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가난한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도 못 받고 그녀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도 많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그녀가 자기 아내보다 더 일찍 죽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랍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사회적 엘리트라는 세상의 가치기준에 따라서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얘긴데, 과연 하나님이 그런 분이냐는 겁니다. 하나님이 청소부의 아내보다 주교의 아내를 더 귀하게 여기셔서 얼마라도 더 오래 살게 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고 예배하시렵니까?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면 믿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누구를 향하고 어느 편을 바라볼 것인가?
오래 전에 한 번은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제 신앙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 어느 날까지 저와 함께 등하교를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내일부터 학교에 안 다녀. 그러니 내일부터는 너 혼자 다녀야겠다.” 저는 친구가 장난하는 줄 알았습니다. 학교를 안 다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인가! 학교란 데가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싫으면 안 다니는 데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뭐라고 학교를 안 다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친구는 자기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가난해서 수업료가 밀렸다는 얘기, 그때도 방과 후에 동네의 작은 공장에서 일했다는 얘기, 내일부터는 거기서 하루 종일 일해야 한다는 얘기 등등을 말입니다.
저는 친구의 말이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아버지는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대단한 부자는 아니라고 부족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번듯한 집도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그리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학교에 못 다닌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저는 그때 친구에게 “그 돈 내가 우리 엄마에게 말해서 내 줄께. 내 용돈 절약해서라도......”라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 친구는 제 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린 중학생답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그 친구를 잊고 살았습니다. 안 그러기에는 세상은 너무 넓고 친구는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4-5년 지난 어느 날 밤에 저는 이 친구를 떠올리고 밤새 울었습니다. 그날은 고등학교 졸업 무렵으로 학생저축을 돌려받던 날이었습니다. 3년 동안 등록금에 포함되어 있던 학생저축, 부모님들 중 이 돈의 존재를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이건 당시 우리들에게는 거의 횡재나 다름없었습니다. 마른하늘에 돈벼락이었습니다. 한 4-5만 원쯤 됐는데 그게 보통 거액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날 그 돈을 들고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친구 집에 가서 카드를 쳤습니다.
서너 시간쯤 카드를 친 다음에 한 친구가 매혹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집 앞 새로 생긴 맥주집이 있는데 거기 가서 맥주나 한 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그러자고 했지요. 그때까지 교복을 입고 뒹굴던 우리는 그 친구의 옷장을 뒤져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맥주집에 갔습니다. 근데 그 집 분위기가 좀 이상했습니다. 어두컴컴하고 칸막이도 있었으며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닙니까. 순간 저는 당황해서 친구들에게 나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왠지 창피한 일인 것 같아서 그만두고 우리는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는 곡차를 꽤 여러 잔 마셨는데 조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내 옆에 앉아 술을 따라주던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어째 이런 일이!’ 저는 흘끔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아무리 많이 봐줘도 제 나이 또래였습니다. 화장을 진하게 해서 그렇지 열여덟이나 열아홉 된 아이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런 그녀가 별로 우습지도 않은 얘기에 깔깔거리며 웃질 않나, 취한 손님들에게 욕지거리를 듣지 않나, 이 테이블 저 테이블 옮겨 다니며 손님들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통행금지에 걸려 친구 집에서 잤습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서울대학교에 합격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를 때였습니다. 세상 넓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었지요. 그런데 그녀는 왜 거기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말입니다. 기껏해야 제 또래인데, 누구는 거저 생긴 돈으로 저녁 내내 카드를 치며 놀다가 호기심에 심심풀이로 맥주집 가서 마시고 떠들고 노는데 누구는 어린 나이에 피부 트러블 생길 정도로 심하게 화장하고 남자들이 웃으면 따라서 웃고 말도 안 되는 얘기도 들어주며 술 따르라면 술 따라주면서 왜 거기 그러고 있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저 잘났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제 꼴이 엄청 부끄러웠고 제 신앙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하나님께 해온 모든 기도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많은 걸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뭔가를 달라고 했던 그 기도들이, 뭘 주시면 대신 뭘 드리겠다고 같잖게 부렸던 그 수작들이, 제가 달라는 걸 주시는 게 하나님에게도 좋을 거라며 하나님과 카드놀이 하듯 했던 그 많은 기도들이, 그것이 없다고 당장 살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을, 없다고 해도 당장 큰일 날 것도 아닌 그런 것들이 대단히 중요한 것인 양 달라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떼를 썼던 모든 기도들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저는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지키지도 못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턴 주위 사람들이 제가 누리는 영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때까지 뭘 달라는 기도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또 한 번 한심한 짓을 했던 것이죠. 물론 저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때 경험은 제게 기도가 무엇인지, 나아가서 신앙이 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 경험은 세상과 신앙을 보는 눈을 바꿔줬습니다. 물론 급격히 바꿔주지는 않았지만 제 영혼 깊은 데 자리 잡고 있다가 가끔 수면 위로 떠올라 제가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줬습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그 후로 내내 성경을 읽는 눈을 열어줬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경험이 제게만 일어난 특별한 경험은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와 비슷한 성격의 경험이 한둘쯤은 있을 겁니다. 제게 이 경험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범한 듯 신비로운 경험이었지요.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 여러 번 말씀했습니다. 그 중에는 본래부터 기도에 대한 말씀인 경우도 있지만 본래는 기도에 대한 말씀이 아닌데 복음서 기자가 그렇게 이해해서 그 취지로 표제를 단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각각의 말씀을 꼼꼼하게 읽어야 합니다. 꼼꼼하게 읽으면 그 말씀이 전혀 달리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부터 읽을 마태복음 6장 5절 이하의 말씀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마태 6:5-9).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특히 기도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다 알고 계시다니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읽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씀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여기에는 굉장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선 뒷부분의 말씀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내용이 없는 공허하고 상투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청산유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기도가 좋은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합시다.’라는 말을 하자마자 기도가 술술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를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속사포처럼 기도를 쏘아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게 좋은 기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기도는 간결하게 하라는 말씀일까요? 온 세상 사람들 기도를 다 듣느라 하나님이 피곤하시니까 요점만 간단히 하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구하기 전에 내게 ‘필요한 것’이 뭔지 다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신 점입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기도는 내가 바라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내게 ‘필요한 것’을 두고 하나님께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내가 ‘바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씀일까요? 저는 그런 뜻이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대부분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욕심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조차 하나님께서 내가 기도하기 전에 다 알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게 아니라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 기도란 것이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인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기도란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니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려고 저잣거리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위선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기도하는 걸 남에게 보일 필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골방에 들어가 ‘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 숨어 있는 쪽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를 누구에게 하는가 하면 ‘숨어서 계시는’ 하나님께 하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숨어 계신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이해됩니까? 하나님은 왜 숨어서 계시는 걸까요? 우리는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고 믿습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위선자가 기도하는 저잣거리엔 없고 참된 기도자가 기도하는 골방에만 계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기도를 들으신다고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기도는 하나님의 비밀작전
구약성서에는 ‘숨은 하나님’(hidden God)이란 신학적인 주제가 있습니다. ‘숨은 하나님’은 중요한 구약성서의 신학적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숨은 하나님’은 당신 백성이 하나님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을 때, 기도를 들어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응답이 없을 때, 고난 가운데서 구원해달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을 때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숨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무응답, 무행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에서는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에 숨어 계신다는 말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숨어 계시다는 얘기입니다. 숨어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궁금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고 말씀한 적이 있느냐 말입니다. 그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숨어 계시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여기서만, 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여기서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뭘 뜻하는 걸까요? 사람이 어떤 경우에 숨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어떤 때 자기 모습을 감추나요? 우선 뭔가 잘못한 일이 있을 때 숨지요. 죄를 저지른 사람은 숨고 경찰은 그렇게 숨어 있는 범죄자를 찾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숨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짓을 했기 때문에 숨었던 겁니다. 둘째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감춰야 할 때 숨습니다. 그러니까 남에게 보여줘서는 안 될 일을 도모할 때 우리는 숨고 감춥니다.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겁니다. 보여주면 안 되기 때문에 숨기고 감추는 것이지요.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은 어디에 해당될지 생각해봤습니다. 전자일 리는 없습니다. 기도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이든 기도하는 사람이든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자신을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걸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숨는 것으로 봐야겠지요.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는 것을 누가 보면 안 된다, 누가 알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은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렇게 기도하는 걸 하나님은 숨어서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적어도 기도할 때만큼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일종의 ‘비밀작전’ 같은 것일까요?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기도를 하나님과 사람이 합동으로 벌이는 비밀작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물론 오늘 읽은 마태복음 6장입니다. 숨어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저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말씀했듯이 기도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나와 이 세상을 악령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영적인 도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기독교인이 기도를 통해 서로 연락하고 연결되어 합동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악마가 알아서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함께 힘을 합해서 이 세상에서 악마의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SOS 신호를 보내는 걸 악마가 눈치 채면 되겠습니까. 물론 그래선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 대해서 숨어 계시는 것도 아니고 저잣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는 위선자들에 대해서 숨어 계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악마에 대해서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우리 기도와 소통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게 무슨 엉뚱한 얘기냐고 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비밀작전이 무슨 얘기냐고 말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말이고 어느 정도는 웃기는 말로 들리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핵심에 있어서는 지금도 그리 엉뚱한 얘기가 아닙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오늘 읽은 마가복음 9장의 얘기를 꼼꼼하게 읽겠습니다. ♣
노란 색상 배경: 퍼온이의 것.
곽목사님은
구약학자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