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학선생 그리고 율법과 계명/계명을 님

by 김균 posted Sep 28, 2014 Likes 0 Replies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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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학선생 그리고 율법과 계명/계명을 님

 

3:23-2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시작하기 전에 한 마디

머리에 똥만 든 여기 몇 안식교인들께 한 마디 했는데

그건 기분 좀 상하라고 한 거니 욕이라 생각해도 됩니다

 

솔직히 재림교회는 율법주의의 덫에 걸려있다를 읽었습니다

괜히 님과 다투었군요

글을 쓰는 김에 님의 닉을 인용했으나

그건 몇 가지 관련 없는 내 이야기라 생각하고 그냥 읽어주십시오

 

율법이 몽학선생인가?

그렇다

그럼 그 율법은 뭔가?

율법은 Law 인데 계명은 Commendment라면 몽학선생이라 부르는 계명이나 율법이

어디 소속된 몽학선생일까요?

 

참고서 두어가지 드립니다

 

1.

몽학선생을 영어로 school master(학교 선생, KJV) custodian(후견인)으로 번역합니다.

또는 trainer(훈련자), 헬라어로는 παιδαγωγος로 이는 παιδος철모르는 어린아이

αγωγος 인도자의 합성어로 παιδαγωγος어린아이를 인도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영어의 pedagogy(교육학), pedagogue(교육자)도 이 말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바울이 갈3:24에서 언급하는 율법은 유대인들의 전() 제도를 일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25절에서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하여 유대주의의 기능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 오셨다.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들-도덕적, 의식적 등등-은 사람들에게 메시야를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오셨을 때 그들은 그를 거절하였다.“(본교 주석 해설서)

 

유대인들은 이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이 법이야 말로 인간의 소망이 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묘사합니다.

몽학선생은 믿음이 오실 때까지라 하고

결국은 우리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결국 몽학선생은 예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에 불과합니다

그 길잡이를 누가했습니까? 물론 율법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자기소임을 다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It is finished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매달 매년마다 몽학선생 밑에 있어야 하는가?

율법으로 모든 것을 잣대질 하면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옵니다

그 답으로 화잇은 이럽니다

나는 그대가 율법을 버릴 때에 복음에서 가장 유능한 조력자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그대는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을 내보내는 셈이 된다.

인간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율법 앞에서 떨 때까지는 결코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가장 필요하고 복된 목적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위치에서 제거해서는 안 된다.“(하나님의 율법의 영원성 P10-11)”

 

오늘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몽학선생에 대한 논리입니다

율법이 영원하니 우리와 영원히 같이 있어야 하고

그 율법의 권위를 시간마다 느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럼 바울이 갈3:24에서 언급하는 율법은 유대인들의 전() 제도를 일컫는 것이라는데

유대인들의 전 제도가 몽학선생이면 거기에 소속된 계명 또한 몽학선생 아닌가요?

유대인들은 율법이란 전 제도를 통해서 즉 제사제도, 계명에 대한 이해 등등을 통해서

그들의 의를 이루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비참한 실패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영원토록 계명을 통해서만 죄를 깨닫고

주님께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몽학선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즉 율법의 모든 제도에서 벗어났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이나 계명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로 본다는 겁니다

그들이 휘장 건너편의 속죄소를 보지 못했지만

십자가이후에는 마음대로 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짐승의 피로 곁으로 갔던 옛날을 버리고 대제사장에게 직고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아직도 율법이나 계명의 문자에 얽매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분들 계신다면

그게 바로 몽학선생이란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강조하는 우리들은 항상 몽학선생 아래서 발버둥 치는 꼴입니다

 

우리는 탐심이란 글자만 나오면 십계명을 일컫는다고 지레 짐작을 합니다

우리는 간음이란 단어만 나오면 그걸 십계명을 일컫지요

봐라 예수께서도 십계명을 말하지 않으시냐? 합니다

이런 태도로 다음 제4기 야고보서를 연구하면 우린 완전히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재미있는 사실은 초대교회가 예루살렘 총회에서 그리도 중요한 금과옥조 같은

10계명을 결의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15:28, 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든지

오늘 우리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든지

살인하자 말라든지

이런 이야기는 결의하지 않고

우상의 제물 먹지 말라-우상경배가 아닌 제물이야기입니다-

피와 목매어 죽인 것 먹지 말라-전통적 유대인의 행위-

음행을 멀리하라-이건 그 시대 만연한 사회상을 떠나서 교회의 순결을 요구한 것-

10계명 가운데 7계명만 언급하고 나머지는 모른 척 했단 말입니다

이것도 하지 않으면 죽는다 또는 출교시킨다가 아니라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라고 결의합니다

사실 이것은 결의가 아니라 권면입니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같은 겁니다

권면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거대한 쓰나미같은 율법이 된 것 아시지요?

 

초대교회는 복음을 위한 교회였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교회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에게 본을 보인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총회 이전의 교회로 복귀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율법의 굴레를 씌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구약의 여러 부분에서 예식법에 관한 것도 율법이라 통칭해서 부릅니다

이 앞에 쓴 글에서 계명 율법 법 율례 등 여러 예시에서 지적했듯이

구별이 모호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율법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님처럼 은혜를 율법에서 찾는 분들이 있는 한 우리는 율법의 종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은 비단 같지요

 

늘 은혜가운데서 살고 싶으십니까? 늘 계명을 주야로 묵상하십시요.

그러면 늘 은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전에 알던 은혜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전에 알던 은혜는 새발의 피입니다.

전에 알던 은혜는 .... 좀 말하기가 거북합니다.

계명은 은혜를 생산해내는 자가 발전기 입니다.

 

계명이 은혜를 생산하는 자가 발전기라면

계명을 통해서만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즉 내가 죄인임을 항상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 안식일에도 죄인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법 좋아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지적한 계명 이외에 더 있을지라도 이 모든 것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는 겁니다

즉 계명은 죄인을 지적하는 기능에서 죄인을 사랑하는 기능으로 변했다는 겁니다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겁니다

아버지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치는 것이 아닌

몽학선생 노릇하던 예식의 법, 형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매일 율법 앞에서 죽는 것

그래서 은혜를 새로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soft spot"이라면 나는 사양합니다

매일이 그렇게 괴로운 가운데서 은혜를 받는다면

박명호집단의 집회에 계속 가지 않으면 믿는 것처럼 생각지 않던 석국사람들처럼

뽕쟁이 뽕 맞고 즐거워하다가 그 뽕 기운 떨어지면 다시 뽕 찾는 거와 뭐가 다릅니까?

그게 신앙입니까?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자신을 죽음에까지 주셨을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곤고한 사람이라 외치는 것은

오늘 우리가 외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매일 외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계명과 율례에 젖어 살던 히브리인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는 말은 오늘 우리가 정신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구절입니다

 

십자가상의 강도가 은혜를 잡았다?

그 은혜와 율법에서 얻은 은혜가 같은 것이다?

ㅋㅋ

정말 웃기는 짬뽕입니다 그는 그냥 길에서 보석을 가방채로 주은 거와 같은 겁니다

 

화잇이 말한

"십자가에서 공의와 자비가 입맞추었다"라는 말을 님처럼 사용해도 되는가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죽음과 그분의 무한한 자비의 선물이 맞습니다

그게 그분이 율법으로의 죽음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죄를 지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죄인 되어서 죽은 몸이지만

그분은 죄와 상관없는 죽음이라는데 우리와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공의와 자비가 입맞춤한 사건과는 거리가 멉니다

 

일기 예보를 보고 12일 덕유산 종주의 날짜를 조정했는데

요즘 날씨에 산에서 비를 맞으면 내겐 사형감입니다

설악산과 지리산은 대피소 빈자리가 없어서 덕유산을 잡았습니다

다녀와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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