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속에 있다니까

by fallbaram posted Sep 29, 2014 Likes 0 Replies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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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까마득한 기억속의 이야기 하나


오랫만에 큰 아들이 나흘간의 휴가를 내어서 에미 애비가 사는 텅빈 집으로 찾아왔다. 오기전부터 마음이 부산하던 제 어미가

맛 있는 반찬이다 무어다 온갖 배려를 쏟는중에 사흘의 밤이 훌쩍 지나고 나흘째의 아침이 왔고 아내는 큰놈이 자고있는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아들은 제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당연한 그날이지만 시간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 버려 마냥 섭섭하다는 푸념을 늘어 놓는다.

자식이라고는 딱 두 아들이 전부이지만 그놈들이 제각기 짝을 찾아서 떠나기 전에는 두놈이 다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하고 우람한 몸매와 사내다운 분위기 때문에 마치 제 어미의 심정은 터지기 직전까지  바람을 넣은 풍선의 부피만큼이나 뿌듯한 가슴으로 살았던 내 아내였다.

내 기억속에는 큰 아이가 자라면서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이상한 행동들이나 징징거리는 일들이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딱 한번 가장 친하던 친구를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만났을 때 그 식당에서 두살이던  아들이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먹지 못하게 한다고 몇개의 그릇을 엎어버렸던  난처한 기억을 우리 부부는 동시에 떠 올렸다..

형제로 자라던 나와 내 동생에게도 그런 비슷한 기억이 까마득히 남아 있다. 외딴곳으로 발령이 난 어머니의 전근 때문에 미처 따라가지 못한 식구들, (아버지와 나와 내 동생) 이 엄마가 당장 집에 없다고 가엽게 여긴 어느 교인의 집으로 저녁을 초대 받았다.

옛 날에는 계란 후라이가 손님들의 식탁에 오르는 상당한 대접의 표시였는데 그날도 큼지막한 계란 후라이가 하나씩 올라 왔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입맛을 다시는 동생의 그것을 아버지가 반찬 몇개를 넣어서 밥에다 비비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계란의 행방을 따라 점점 낯빛이 어두워지는 동생의 안색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하신 아버님이 계란 후라이를 다 비빈후에 동생에게 비빔밥을 내어 놓았다.

계란 후라이의 고소한 맛을 그대로 맛보고 싶었던 아이의 마음과 먹기좋게 섞어서 영양이 더 좋은것으로 아들에게 주려한 아버지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그 순간에 식탁이 와장창 엎어지는 소란이 벌어졌고 그 소란의 주인공은 모처럼 먹음직한 식탐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는 억울함에 몸을 사리지 못한 비교적 두살치고는 힘이좋았던 내 동생의 원색적이고 난처한 어린아이 같은 땡깡이었고 다섯살이 위였던 나와 아버지에겐 그것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낑낑대야 했던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마치 돌에 새겨져 있는듯한 기억의 한 조각이다.

이런 기억을 간혹 새롭게 해주는 어떤 사건들이 있는데 그 사건들은 이런것들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노오란 색을 단색으로 칠하지 않고 적어도 세가지 정도의 색을 섞어서 그 노란색을 만들어 칠하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했을 때 또 다른 색들하고 조화 (동화-assimilation)  되는 일에 도움이 되고  웬만해서는 단색 보다는 다른 색갈들하고 잘

어울리는 바탕이 된다.  어린아이들이 칠하는 색은 대부분 단색이다. 그러나 성숙한 화가들은 색갈의 동화라는 원칙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단색을 칠할 수가 없다. 색갈은 색갈끼리 서로 손을 잡아야 하고 서로 받혀 주어야 하고 서로를 들어내는 역활도 해야 한다. 시를 써는 일에도 이러한 원칙이 적용이 되고 소설을 쓰는 일에도 그런 전체적인 구도에서 한개 한개의 단어와 장면들이 엮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 끝날때 쯤에는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를 소리치게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벼서는 안된다.

이곳 민초에선 무조건 비비는 일과 동시에 비빔밥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난처함미 많이 일어난다.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비비는 자들을 일요일 교회식이라고 비난하지만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바벨론의 앞잡이" 라는 원색적 비난이 분명 입속에 맴돌고 있을 것이다.


독자들이여

계란 후라이는 분명히 그속에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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