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그리고 한경직]

by 그려 posted Sep 30,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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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그리고 한경직]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오늘은 제주 4.3사건 66주년째 되는 날입니다. 66년 전 제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분들 꽤 많습니다. 특히 교회다니는 친구들은 더욱...


작년에 4.3사건을 다룬 '지슬'이라는 영화가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을 받으면서 제주 4.3사건이 다시 화제가 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가장 청렴하고 모범적인 목사로 존경받는 한경직 목사와 제주 4.3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가 어떤 관계가 있는 지 아는 분은 교회 내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장 큰 가해자들인데도요...


한경직 목사는 4.3사건의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규장에서 출판된 -한경직 목사-책에 그리나오니 부인할 수 없겠죠. 한 개인의 삶을 평가하는 건 다면적이고 입체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결백했을 수는 있으나 참혹한 역사의 진실 앞에서 한경직 목사가 과연 한국 기독교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인지 다시 보게 됩니다. 서북청년단 청년들의 4.3만행의 사진은 구글링으로 한번만 돌려보시면 바로 나올 겁니다. 한국 개신교는 제주 4.3의 가장 큰 가해자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특히 영락교회는 더 더욱...


아래는 깡성호님의 글을 공유합니다.
사진은 영화 '지슬'의 포스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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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해 우편향적인 모습을 강하게 보였다. 즉, 반탁-단정 노선을 충실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 불교와 천도교는 좌파나 중도파의 영향력이 강했고, 천주교의 경우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다가 단정 노선으로 선회했다.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볼 때, 해방정국에서 한국교회의 우편향성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제1공화국(1948-60) 시기 동안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은 해방정국 시기에서부터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극우반공체제의 성립에 크게 관여하였다. 대표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에 큰 도전이었던 제주도와 여수·순천 및 지리산 일대의 무력 충돌 사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했었다. 제주4·3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경찰과 협력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다음은 한경직 목사의 발언이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는 이북에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모여 만든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주의적 성형이 무척 강했다. 문제는 영락교회의 청년회가 군경과 함께 제주4·3사건 때 제주도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립 당시 회원수가 229명에 달했던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주도하고 반탁운동, 기독교민주동맹의 창립대회장 습격, 제주4·3의 진압 등 “반공건국, 멸공건국, 승공건국”을 위한 활동에 헌신했던 것이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회원 중 한명은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린 오제도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에 나왔던 이 발언은 제주4·3사건을 ‘공산폭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당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 규명된 현재의 경우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책임지고 반성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교육에도 참여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켜 사상 교화의 역할을 했던 사상통제기구였지만, 가입자 수가 위로부터 할당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좌익사상과 무관한 민간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문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던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조직에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했던 것이다. 즉, 1950년 3월 경남 밀양지역의 경찰서가 실시한 합숙훈련에서 ‘지방 특지(特志)교회책임자’가 정신 방면의 강사로 활동했던 것을 볼 수 있다(『연합신문』1950.3.16). 성결교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윤판석은 마포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이었으며, 국민보도연맹 마포지구의 지도 위원이기도 했다(윤판석, 『간증백세』, 신망애출판사, 1970, 63쪽).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극우체제의 성립과 밀접한 보도연맹에 교회 지도자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한국교회는 반공적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폭력의 신학’을 외치게 되었다.


p.s: 이와 관련하여 1998년은 제주4·3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주목할 것은 6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가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한 사실이다.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제주4.3을 외면해온 한국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9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주지방회와 함께 ‘4.3해결의 과제’를 주제로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교회가 그 동안 4.3의 아픔을 외면해온 데 대한 회개”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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