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집단 ‘서북청년단’ 부활! |
9월 28일 서울시청 앞에는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세월호 참배객들이 참배하며 묶어둔 노란 리본을 자신들이 정리하겠다며 나섰다가 서울시청 직원과 경찰의 저지로 물러났습니다.
이북에서 넘어온 청년들이 단체를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월남하면서 모든 재산을 북에 남겨놓고 왔던 경제적 이유 때문입니다. 지주와 자본가, 친일파 등을 숙청했던 북한에서 살 수 없었던 부잣집 자제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남으로 돈 한 푼 없이 쫓겨났습니다.
○ 반공 활동을 핑계로 강제 모금 ○ 양곡 배급권 등의 개입 ○ 관공서 입찰 등의 개입
서청이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반공' 때문이었는지는 우리가 의심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서청 출신들은 경찰이나 국군으로 편입된 경우도 있지만, 명동파 이화룡처럼 깡패로 발전한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청 순회 조직에 의해 제주도 주민들에게 가해진 테러 소동에 대해 서청 지도자는 1월 18일 방첩대에 사과하고, 단원들이 더 이상 테러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의 기록)
제주에 거주했던 미군 CIC 보고서를 보면 서청의 폭력성을 '테러'라고 지칭하는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CIC는 '제주 내 조직들(서청 등을 지칭)이 제주 경찰감찰청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서청은 테러단체로 알고 있다. 이곳 (경상남도)는 치안이 잘 되어 있어 서청은 필요 없다. 트러블만 일으킬 서청은 1주일 이내에 부산에서 철거하라. 말을 듣지 않으면 전원체포하겠다." (부산 경찰고문관 프레이 대령)
미군 고문관들은 서청을 테러집단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들이 있으면 오히려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테러를 자행하며 치안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며 철수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신의주에서 월남했는데, 그가 월남 후 선택한 단체가 서청이었습니다. 안두희는 서울에 온 지 석 달 만에 서청에 가입, 본부 직속이었던 서울 종로지부의 무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1)
우익청년단체를 조정하기도 했던 미군정도 서청의 테러와 폭력에 대해 해산을 종용하기도 할 정도로 서청은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선우기성(서청 단장)은 '서청이라면 우는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며 자랑스러워했지만, 이는 얼마나 서청이 무서운 폭력집단인지를 잘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 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제주 CIC 보고서 '최근 좌익인사들의 활동')
제주 4.3사건의 가장 큰 배경에는 폭력과 테러, 강간,구타,강도 등의 만행을 일삼았던 서청의 문제점도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가 극우단체를 경계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일본의 극우단체처럼 역사를 왜곡하며, 폭력을 자행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점에 있습니다.
이승만은 서청을 지원하며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고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더러운 일에 동원했습니다. CIC(주한미군 방첩대)는 '한국 정치의 힘에서 어떤 정당이 자신의 대의에 열렬히 충성하며 '더러운 일'을 수행할 강력한 무장청년단체가 없다면, 다른 정치조직에게 아무런 위협도 될 수 없다'는 보고서를 낸 바 있습니다.
출처- |
[제주 4.3사건, 서북청년단...그리고 한경직]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오늘은 제주 4.3사건 66주년째 되는 날입니다. 66년 전 제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분들 꽤 많습니다. 특히 교회다니는 친구들은 더욱...
작년에 4.3사건을 다룬 '지슬'이라는 영화가 선댄스 영화제 최고상을 받으면서 제주 4.3사건이 다시 화제가 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가장 청렴하고 모범적인 목사로 존경받는 한경직 목사와 제주 4.3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가 어떤 관계가 있는 지 아는 분은 교회 내에서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가장 큰 가해자들인데도요...
한경직 목사는 4.3사건의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에 대해 무척 자랑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규장에서 출판된 -한경직 목사-책에 그리나오니 부인할 수 없겠죠. 한 개인의 삶을 평가하는 건 다면적이고 입체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청렴하고 결백했을 수는 있으나 참혹한 역사의 진실 앞에서 한경직 목사가 과연 한국 기독교가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인지 다시 보게 됩니다.
서북청년단 청년들의 4.3만행의 사진은 구글링으로 한번만 돌려보시면 바로 나올 겁니다. 한국 개신교는 제주 4.3의 가장 큰 가해자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책임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특히 영락교회는 더 더욱...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다른 종교에 비해 우편향적인 모습을 강하게 보였다. 즉, 반탁-단정 노선을 충실히 지지함으로써 이승만의 권력 장악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 불교와 천도교는 좌파나 중도파의 영향력이 강했고, 천주교의 경우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하다가 단정 노선으로 선회했다. 다른 종교들의 정치적 태도와 비교해볼 때, 해방정국에서 한국교회의 우편향성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제1공화국(1948-60) 시기 동안 한국교회가 일방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던 것은 해방정국 시기에서부터 예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극우반공체제의 성립에 크게 관여하였다. 대표적으로,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에 큰 도전이었던 제주도와 여수·순천 및 지리산 일대의 무력 충돌 사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했었다. 제주4·3사건이 발생했을 때, 영락교회 청년들이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경찰과 협력하여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다음은 한경직 목사의 발언이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55-56쪽)
한경직 목사의 영락교회는 이북에서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모여 만든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주의적 성형이 무척 강했다. 문제는 영락교회의 청년회가 군경과 함께 제주4·3사건 때 제주도민을 학살한 서북청년단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립 당시 회원수가 229명에 달했던 영락교회 청년회는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주도하고 반탁운동, 기독교민주동맹의 창립대회장 습격, 제주4·3의 진압 등 “반공건국, 멸공건국, 승공건국”을 위한 활동에 헌신했던 것이다. 영락교회 청년회의 핵심회원 중 한명은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린 오제도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에 나왔던 이 발언은 제주4·3사건을 ‘공산폭동’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시기에 나왔기 때문에 당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 규명된 현재의 경우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민간인 학살과 관련하여 한국교회는 책임지고 반성해야 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교육에도 참여했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전향시켜 사상 교화의 역할을 했던 사상통제기구였지만, 가입자 수가 위로부터 할당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좌익사상과 무관한 민간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문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던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약 3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조직에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했던 것이다. 즉, 1950년 3월 경남 밀양지역의 경찰서가 실시한 합숙훈련에서 ‘지방 특지(特志)교회책임자’가 정신 방면의 강사로 활동했던 것을 볼 수 있다(『연합신문』1950.3.16). 성결교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윤판석은 마포기독교연합회의 회장이었으며, 국민보도연맹 마포지구의 지도 위원이기도 했다(윤판석, 『간증백세』, 신망애출판사, 1970, 63쪽).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극우체제의 성립과 밀접한 보도연맹에 교회 지도자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한국교회는 반공적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폭력의 신학’을 외치게 되었다.
p.s: 이와 관련하여 1998년은 제주4·3사건 발발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주목할 것은 6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가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한 사실이다.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제주4.3을 외면해온 한국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9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주지방회와 함께 ‘4.3해결의 과제’를 주제로 행사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서도 “교회가 그 동안 4.3의 아픔을 외면해온 데 대한 회개”를 다짐했다.
http://bokklers.com/all/10372
[제주 4.3학살]
[제주 4.3 항쟁 - 7.서청의 착취와 '민보단 강요']
7. 서청의 착취와 '민보단 강요'
여순사건 직후 48년 11~12월 두 달 사이에 최소한 1천 명 이상의 서북쳥년회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급히 옷을 갈아입고 진압작전에 투입되었다. 이 일엔 이승만이 앞장섰다. 미군의 48년 12월 6일자 보고에 따르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부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천500명, 국립경찰에 1천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지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 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회는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단 경위 1명, 200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이승만은 12월 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해 "제주도 4.3사태와 여수,순천 반란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사상이 건전한 여러분이 나서야 한다"며 서청의 제주 파견을 앞장서서 독려했는데, 여기엔 미군도 가세했다. 미군 보고서는 "제주도의 서북청년단이 경찰과 경비대를 지원하게 된 것은 몇몇 미군 장교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서청 단원들은 '특별 중대(elite company)'라는 특수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이들에겐 군 내부의 '반대자 색출' 이라는 헌병 기능까지 부여되었다. 그러나 정작 줘야 할 건 주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몰았으며, "제주도민들은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다. 대부분이 빨갱이 물이 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사상이 건전한 서청이 이곳을 진압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입시켰다.
서청 단원들은 3.1사건 직후부터 제주에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그때부터 경찰과 더불어 민중을 착취하는 길로 들어섰다. 김종민에 따르면,
"당초 서청은 민간인 자격으로 제주도에 들어왔다. 처음엔 주로 엿장수를 하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승만의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로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서청의 위세는 너무도 커서 제주 출신은 경찰조차 꼼짝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의도된 서청의 착취행위 조장의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서청의 악탈행위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그걸 감내하든가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구도로 내몰렸다.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사람 피쟁이(백정) 서북청년단들, 다 사람백정이지, ...... 순 엿장수나 하던 무식한 것들이었지. ...... 매일 소 한마리 말 한마리 잡으라 하고, 조금만 거슬리면 잡아다가 총대가리로 때리고, 죽였지. ...... 시계 달라고 해서 안 주면 죽여 버렸지. 낮에는 일 시키고 밤에는 대총 들고 보초 서고 ...... 징그럽고 억울하게 그 빌어먹을 놈들의 종노릇 하며 생명까지 바치며 산 우리들. 우리들끼리 올며 분노하며 한탄하며 살았지. 산목숨으로 산 게 아니었지. 지옥살이 하듯 죽지못해 살았지. ...... 그래 살기 위해 싸우기 위해 산으로 갔지."
제주도민에 대한 착취엔 '민보단 강요'까지 가세하였다. 5.10선거에서 맹활약한 향보단은 48년 5월 22일에 해산되었지만, 이는 6월 민보단(民保團)으로 부활하였다. 제주도에선 8월 11일에 민보단이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경찰의 외곽조직으로 군경 진압작전에 동원되었다. 보초를 서는 일과 더불어 토벌작전시 죽창 등의 무기를 들고 군인이나 경찰관보다 앞서가는 총알받이 역할을 해야 했다.
제주 민보단은 5만명 규모였는데, 소집할 청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중엔 남녀노소 모두에게 민보단의 이름 아래 동원 의무가 부여되었다. 민보단에 대한 미군의 한심한 보고서는 무지가 지나쳐 완전히 조롱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미군 보고서 49년 4월 1일자는 "제주도 남자들은 농사일보다는 보초를 서거나 토벌전에 나가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 편 -강준만 저- 2권 197~199쪽 그대로 인용
http://albertbelle.tistory.com/61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온 양민들
총살직전의 사람들
양민학살에 아이들도 예외가 아님
무참히 학살당한 양민들
"서청이 이런 저런 구실을 댔지만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창고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했습니다." ( 당시 국민학교 교사였던 홍경토 씨 증언 )
- 중도일보
[한국 대학살]
Pablo Picasso 1951
Massacre in Korea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과 서북청년단이 3만5천명의 양민을 학살한 소식을 듣고 그 만행을 고발한작품
신천 학살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1/4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신천 학살이 전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당시 서구 사회는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