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목사의 행복 비결-- 대한 예수팔아 장사회

by 배달원 posted Oct 03,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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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시골목사의 행복 비결…‘우리 함께 돌파리가 되자’

등록 : 2014.10.03 18:50 수정 : 2014.10.03 21:15

임락경 목사의 집은 그냥 ‘시골집’이다. 그가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이 집은 일요일이면 ‘시골교회’가 된다. 고향 없이 살면서 시골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모여 살기에 지은 이름이다. 지난 9월24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의 시골집에서 임 목사를 만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목사 임락경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목적지는 ‘시골교회’. 내비게이션에 꼬불꼬불 외줄기 산길이 그려진다. 갈비집 즐비한 포천을 지나 가파른 광덕산 고개를 타고 넘어 강원도 화천군으로 들어서자, 주변을 에워싼 높은 고갯마루를 넘어서지 못한 비구름이 산중턱에 걸린 채 운무로 피어오른다. 신선이라도 나타날 듯 고즈넉한 산간마을인데, 사방을 둘러봐도 교회 비슷한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차를 돌려 지나온 길을 다시 더듬어 내려가다가 어렵사리 발견한 ‘시골집’ 나무 팻말, 그 아래 ‘시골교회’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진 목판이 부록처럼 달려 있다. 십자가도 종탑도 없는 한옥건물이라, 언뜻 봐선 닭백숙이나 막걸리를 파는 시골 밥집 같기도 하다.

“오죽 훌륭한 사람이 없으면 여기까지 왔을 거여? 찾다 찾다 없으니까 나한테까지 왔을 거 아녀?”

짧고 진한 눈썹과 작은 눈에, 웃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그가 말했다. 평생을 장애인, 병자들과 함께 살면서, 음식을 통한 자연치유법을 전파해 온, 자칭 ‘돌파리(突破理)’ 목사 임락경(69)이다. 순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이 공식학력의 전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 농민단체, 정농회(正農會) 회장을 역임했고 상지대 초빙교수를 지냈으며 올바른 섭생법을 가르치는 임락경의 건강교실을 14년째 진행해 오고 있다. 그의 교회엔 별도의 예배당이나 강대(講臺)도 없다. 그가 안내해 들어간 넓은 온돌방이, 시골집 식구들이 다 같이 밥을 먹는 식당이자 손님을 맞는 사랑방이면서 주일엔 예배당이 된다고 했다. 십자가 대신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자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이 밥이 우리에게 먹혀 생명을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십자가도 종탑도 없는 한옥건물
강원도 화천의 산간마을에서
시골집과 시골교회를 운영
장애인 15명과 기대어 살며
14년째 섭생법 건강교실 열어

 
유영모 이현필 최흥종에 감화
학교 대신 보낸 결핵환자요양소
폐결핵 전염을 두려워하던 시절
“즐거울 때 침은 결핵균 이긴다”
신념으로 죽을 때 죽자고 일해

 
‘할렐루’의 대한예수팔아장사회 목사님

 
시골교회 뒤 비스듬한 경사지를 따라 콩과 깨, 고추와 배추, 수세미와 박, 당근 같은 채소가 올망졸망 여물어 가고 있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을 일체 받지 않는 시골집은, 필요한 대부분의 식재료를 이 밭에서 직접 키워 먹는다. 유기농 콩으로 메주를 만들고 된장, 간장 담가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소규모로 판매도 한다. 커다란 가마솥 여섯 개가 나란히 걸렸고,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옹기항아리들이 양지바른 마당에 가지런하다. 옹기장수가 잘못 만들어 우글쭈글한 항아리도 여기선 소중한 된장, 간장독으로 쓰인다.

-한옥집 2층에 누각이 널찍하다. 여름엔 무척 시원하겠다.

“거기서 작업도 하고 놀기도 한다. 경회루, 광한루 하듯이, 우리는 저걸 ‘할렐루’라고 부른다.”

-(웃음) 원래 이름을 잘 지으시나보다. 시골교회라는 이름도 참 특이한데.

“원래 붙이려고 했던 이름은 ‘망할 교회’였다. 장애인들하고 같이 하는 교회를 꾸려나가는데, 장애인이 없는 사회가 되어야 하니까. 그 이름으로 교단에 등록을 하러 갔더니 노회 서기가 불같이 성질을 내서 못하게 되었지만….”

-목사님 교단이 어딘데 그러나?

“대한예수팔아장사회.”

-대한예수…?(받아적다가 웃음 터지며) 난 또 정말인 줄 알고….

“예전에 기독교방송 나가서도 그렇게 말한 적 있다. 그랬더니 피디가 ‘이거 그대로 방송 나가도 되겠어요?’ 묻더라. 항의하는 사람 있으면 내게 전화하게 하라 했지. ‘예끼, 당신들은 예수 팔아 장사 안 하냐?’ 하고 묻게. 근데 한명도 항의전화가 없었다.”

-언제부터 장애인들과 함께 사시게 되었나?

“그냥 살면서 하나둘 모이게 되니까 이렇게 된 거지, 밖에서는 이걸 복지시설이라고 보던데, 난 그런 생각 없이 그저 모여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다.”

임락경은 여기서 15명의 식구들과 함께 지낸다. 장애인도 있고 요양을 위해 찾아온 암환자도 있다. 들고 나는 게 자유로우니, 법정 수용시설이 아니라 그저 필요할 때 같이 기대어 사는 식구들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모양도 크기도 비뚤비뚤 제각각이지만 편안하게 어우러지는 장독대 옹기들처럼, 그의 식구들도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얼크러져 섞여 산다.

-보통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시나?

“낮에는 농사일하거나 강연 다니고 잠은 열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잔다.”

-두시에 일어나 뭐하시나?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안 갔으니 교과서는 봐야 하고. 대학도 안 다녔으니 전문은 아니지만 필요한 건 봐야 하고. 난 평생 낮에는 책상에 앉아 있어 본 적이 없다.”

-그럼 두시부터 날 밝을 때까지 책 읽고 공부하고?

“책을 그렇게 많이 본 건 아니다. 내 일생에 사 본 책은 열권이 안 되고, 읽은 책은 백 권 넘었나 모르겠다.”

-그럼 어떤 공부를 한 건가?

“공부란 자연에서 원리를 찾고 사람에게서 원리를 찾아야지, 책은 다 짜깁기다. 짜깁기의 원본은 사실 몇권 안 되는데 팔만대장경, 사서삼경, 노자, 장자, 성경… 그런 책들은 원문 그대로 읽었다.”

임락경이 순창 유등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는 그에게 중학 진학을 권유했지만 그는 학교 대신, 결핵환자요양소를 찾아가 십대를 보냈다. 66년 군 입대를 했는데 그때 배치받은 곳이 강원도 화천이었다. 제대 후 다시 결핵환자요양소인 동광원에 돌아가 일을 하는 한편, 크리스찬아카데미, 가톨릭농민회 활동 등을 하다가 80년 다시 화천으로 들어와 이곳에 터를 잡았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사랑의 침은 해독제, 증오의 침은 독약

-평생 세속적인 명예나 권력에 거리를 두고 사셨다. 종교적인 신념인가?

“종교적인 신념이라기보다는 어릴 적부터 배운 자연의 이치다. 미국은 글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나는 사내, 너는 계집’인데, 우린 처음 배우는 말이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이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우주홍황(宇宙洪荒). 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다. 일월영측(日月盈昃),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점차 이지러진다. 돈 좀 벌었다, 지위 있다, 명예 있다고 거들먹거리지 말라는… 일곱살 때 이런 우주의 진리를 배운 거다.”

-돈이나 권력이 없어서 아쉬울 때는 없었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커서 교회 집사도 하지 말아야겠다. 사회에선 반장도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산기슭에 초가집 3칸 짓고 살면 소원이 없겠다’ 그게 희망의 전부였다. 근데 정농회 회장까지 했으니….”

-어릴 때라는 게 몇살 땐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결정한 거다. 3학년 때 곱하기 배우다가 계산해보니 인생이 100년이면 36500일이다. 70살까지 산다고 쳐도 60년 남았는데, 그게 2만일. 하, 2만일을 어떻게 사나, 직업을 뭘 가질까 고민했는데. 공무원은 없어도 살겠더라. 목사가 없으면 더 잘 살겠고. 근데 농사짓는 사람 없으면 다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평생 농사짓겠다’ 결심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 나이에.(웃음) 곱셈 배웠다고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데.

“그때 교회에서 훌륭한 분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현필 선생, 유영모 선생 같은 분들. 무작정 집을 나와 광주의 이현필 선생을 찾아 나섰다가 최흥종 선생을 만난 것도 내겐 큰 행운이었다.”

오산학교 교장으로 유불선과 성서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사상가 유영모, 거지와 고아, 결핵환자들을 돌보며 ‘맨발의 성자’로 불린 이현필, 자기 땅을 희사해서 한국 최초의 나환자 치료시설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하고 걸인과 병자를 구제하는 데 일생을 바친 최흥종의 가르침은, 소년 임락경을 가슴 부풀게 한 구원의 빛이었다. 이들 선각자들의 공통점은 엄격한 기독교적 청빈과 금욕, 헌신의 정신을 바탕으로 자생적 신앙공동체를 이루되, 교파와 형식, 조직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사상은 함석헌, 원경선, 류달영, 임락경 등으로 이어지며 이후 개혁적 사상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의 주요한 원류가 되었다.

-어린 마음에 큰 스승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광주까지 찾아간 건 이해가 된다. 그렇다 해도 결핵환자를 돌보면서 살아야지, 결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치료약이나 위생시설이 변변치 못해서 폐결핵환자라면 가까이 하기 두려워하고 외면하던 시절 아닌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하기로 한 거다. 겁이 난들 어떡하나. 사람이 죽어 가는데.”

-겁나면 자리를 피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냥 전염되면 죽어야지 했다. 3년 후 군대 갈 때까지 살아있을 거라 생각 못했다.”

-종교적 결단이 아니고서야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그냥… 그쪽엔 그런 사람이 많았으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지켜줄 거라고 확신한 것도 아니었다.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할 수 없으니 할 만큼 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다는, 담담한 마음이었다.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그게 아주 예사로운 일이었다?

“그랬다. 내가 요즘 일생을 정리하면서 통계를 내봤는데, 희한하게도 그때 결핵환자들한테 봉사했던 사람 중에 아직 한명도 안 죽었다. 나보다 열살 이상 많은 형님도 있었는데 지금 모두 살아 있다. 즐거울 때 나오는 침은 결핵균도 이길 수 있다. 난 그렇게 본다.”

-의사들이 들으면 펄쩍 뛸 소리다.

“사랑할 때 나오는 침은 나병도 물리친다니까. 나병이 침으로도 전염되는데, 부부간에 전염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사랑할 땐 침이 해독이 돼버리는지… 사랑할 때는 할머니가 손자한테 음식을 씹어줘도 괜찮다. 그 침은 해독을 시키니까. 근데 미워할 때 나오는 침은 독이 되는 거지. 옛말에 침 뱉고 싸우지 말라고 한다. 버짐 생긴다고. 결핵환자를 무서워하거나 피하려 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니 결핵균도 이겨낸 게 아닐까?”

그가 결핵균을 이겨낸 전설 같은 일화는 그때 말고도 또 있다. 70년대 임락경이 경기도에서 크리스찬아카데미의 농민 조직사업을 할 때였다. 같은 마을 사람 하나가 폐결핵을 앓다가 죽었는데, 전염될까 겁이 나서 아무도 그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그 소식을 들은 임락경은 망설임 없이 혼자서 농약통을 짊어지고 가서, 시신 주변에 뿌리고 혼자서 염을 했다. 7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으로 이우재, 한명숙, 신인령, 김세균 등과 같이 그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갔을 때, 마을 사람들은 앞다퉈서 “임락경 같은 사람이 간첩일 리 없다”고 조사 나온 중정요원들에게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임락경은 기소를 면하고 풀려났다.

인터뷰는 중간중간 끊겼다. 임락경 목사에게 10분이 멀다 하고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왔기 때문이다.

대개 어디가 안 좋은데 어쩌면 좋겠냐는 문의 전화였다. 그는 환자의 증상에 따라 바로바로 민간처치요법을 일러줬다. 어떤 이에게는 녹두 삶은 물을 마시라 하고, 어떤 이에게는 고기를 끊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했다. 어떤 이에게는 마가목으로 담근 술을 마시라 했고 꿀을 큰 종지로 벌컥벌컥 삼키라고도 했다. 의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싶은데, 임락경의 자연치유요법을 신뢰하고 따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매년 20여차례, 2박3일 혹은 3박4일에 걸쳐 열리는 임락경의 건강교실은 14년째 성황을 이루고 있다.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 <먹기 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 <돌파리 잔소리> 등 그는 건강 관련 지침서도 몇권 내놓았다.

평생 번 돈, 병원에 바치고 포도당 꽂고 죽을래?

-이런 건강 관련 지식은 다 어디서 배운 건가?

“몇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깨치고 나면 처방이 바로 나온다. 한문을 쓸 때 처음엔 어려운데 갑자기 쉬워질 때가 있다. 무슨 변에, 무슨 자 합치면 무슨 자가 된다… 그 기본자만 익히면 한문이 아주 편해지는 것처럼 건강 원리도 그렇다. 그래서 내 별명이 ‘돌파리(突破理)’ 아닌가. 이치를 돌파한다고.(웃음)”

-몇가지 기본 원리의 예를 든다면?

“돼지고기 먹고 식중독 걸렸다 그럼 새우젓. 소고기 먹고 병났다 그럼 배를 먹어야 된다. 개고기 먹고 병났다 하면 살구, 복숭아는 안 되고. 해산물은 미나리를 먹어야 하는데 처음에 회 시킬 때 파슬리부터 먹는 게 좋다. 꼭 와사비에 찍어 먹고. 미나리 같이 생긴 채소가 서양에선 파슬리, 일본에선 와사비니까. 모든 약초, 약물에서 병이 났다고 하면 녹두를 먹어야 한다.”

-고기는 왜 먹지 말라고 하시나?

“사람에 따라 다른데 고기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도 요즘 좋은 고기가 없으니까. 배합사료에 항생제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건 성장촉진제다. 내가 직접 양계를 해봐서 아는데, 닭이 정상적으로 1.5㎏ 되기까지 1년이 걸린다. 근데 요즘은 한달 안에 1.5㎏ 못 만들면 양계장 망한다. 1년 클 것을 한달 안에 키운단 얘긴데, 농약, 비료, 제초제보다 더 무서운 게 바로 이거다. 성장촉진제 먹고 자란 육계(肉鷄)나 양식 물고기들….”

-병의 원인이 다양할 텐데 너무 단순화하는 것 아닌가?

“70년대 이전에는 나병이나 결핵같이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이 많았다. 70년대는 단군 이래 가장 건강한 때였다. 영양결핍은 어느 정도 해결되고 환경오염으로 인한 피해는 아직 전면화되기 전이라. 80년대부터는 암, 관절염, 아토피 같은 병이 무섭게 늘어났다. 오염된 음식과 너무 많이 먹은 음식이 문제였던 거다. 몸 안에 독이 들어오면 처음엔 땀으로 빠지고 나중엔 소변으로 빠진다. 몸이 차가워지면 이 독이 빠져나오질 못해 아토피가 되고 암이 된다.”

-유기농이 좋다고는 하지만 사실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사먹기가 힘들다. 경제적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어떡하나?

“그걸 비싸다고 하면 안 된다. 병원에 갈 돈이면 한달 먹을 수 있는데. 커피는 오천원짜리 마시면서 이런 걸 비싸다고 하면 되겠나? 평생 일해서 30년간 학교에 돈 갖다 바치고, 30년간 병원에 돈 갖다 바치고, 죽을 때 5% 포도당 꽂고 죽는다. 그러려고 생을 사나? 학교 안 가고 병원 안 가면서, 안 아프고 유기농 포도 맛있게 먹다 죽는 게 낫지.”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마지막 질문으로 여쭙겠다. 원래 얼굴이 그런 표정이셨나? 40대 이후 얼굴을 자기가 만드는 거라는데, 가만히 계셔도 웃는 얼굴이다.

이진순 언론학 박사·희망제작소 부소장
“웃고 살아야지. 웃기지 않으면 심심하고. 사바세계에는 어쩔 수 없이 희로애락이 있는데, 희하고 락이 40%, 애와 로가 60%이다. 자기랑 가족만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즐거움이 커진다. 그럼 희하고 락이 60, 애와 로가 40이 되지. 이것만 바뀌어도 세상이 아주 편해진다.(웃음)”

40 대 60을 60 대 40으로 바꾸기. 아주 조금만 훌륭해져도 되는 일이, 범인(凡人)에겐 왜 이리 어려울까. 한숨을 내쉬며 임락경 목사를 쳐다보니, 빙긋이 웃는 얼굴로 덤덤하니 앉아 있다.

녹취 김연지(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펌.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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