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아비의 딸이라도 다음 대통령 되어야 하는 이유가??

by 로산 posted Jan 30, 2011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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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에 여배우 찾아간 박정희>  
 
박정희 대통령의 서울 압구정동 H아파트 출입 염문이 귀에서 귀로 번진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H아파트에 사는 배우 J양을 만나기 위해 깊은 밤 대통령이 나타난다', '그분의 여염집 나들이 때는 잠시 X동의 전깃불이 나간다', 'K여고를 나온 재벌집 며느리가 목격담을 퍼뜨리다 혼쭐이 났다' 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이 귀를 의심할 만한 소문들이 대체로 사실로 확인된 것은 81년께 서울민사지법에서였다.
 
 
현직 법관 H씨의 얘기
 
 
"81년경 기이한 민사소송이 들어왔다. 그 아파트 6동엔가 사는 한 주부가 경찰관을 상대로 갈취당한 돈에 대한 반환청구소송을 낸 것이었다. 그 주부는 승강기에서 대통령을 목격했고 즉각 경호원들로부터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동네 주부들에게 귀엣말을 해 이 사실이 한 경찰관 귀에 들어갔다. 문제의 경관은 발설한 아주머니를 유언비어사범으로 입건하지 않고 눈감아 준다는 조건으로 돈을 갈취했다. 상당기간 뜯어 낸 액수가 1000만원도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죽고 세상이 바뀌자 주부는 분한 생각에..."
 
 
또 다른 증인은 그때 대통령 경호실 부처장 안재송. 그는 민자당의원이었던 金모씨와 어린시절 진해에서 함께 자란 막역지우였다. 安은 이북에서 태어났으나 6.25 때 월남한 가족과 진해에서 살았었다. 金 전의원의 얘기다.
 
 
"78년엔가 하도 박대통령의 H아파트 밤나들이 소문이 많아서 친구 재송이한테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입이 무겁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재송이가 깜짝 놀라며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었느냐' '다시는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말라'고 했다. '천기' 아니냐면서, 장소를 바꾸어야겠다고 했다."
 
 
이미 밝힌 바 있는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의 최후진술들을 살펴보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대목도 있다.
 
 
'궁정동 미녀 파티는 초창기 (70년대 초) 중정부장의 비서실장이 직접 주관했다. 그런데 尹모 비서실장은 대통령 사생활 뒷바라지를 하다가 자기도 사생활이 복잡해져 그만 부인에게 들켰다. 그 부인은 성격이 괴팍해 尹씨를 도끼로 찍은 일이 있다. 이 사고가 난 뒤 의전과장 자리가 생겨 그 일을 전담했다. 나는 李,金과장에 이어 세번째 의전과장인데...'
 
 
朴의 각종 진술을 종합해 보면 권력자의 측근들이 74년 육영수 여사  사망이후 충성 경쟁을 벌이며 홀로 된 朴대통령을 '혼탁한 밀실'로 잡아 끈 흔적이 엿보인다.
 
 
 
 
"저 달력의 미인 다 왔었다"
 
 
궁정동 세검정 안가에 박대통령을 모셔 초저녁엔 말동무를 하다가 밤 9시께 슬그머니 대통령과 미녀만 남겨두고 밀실을 빠져 나오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배우, 텔런트가 대부분이어서 朴은 79년 겨울 "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가 안가에 다녀갔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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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소문 운운하며 헛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내용을 직접 쓴 동아일보 김충식 기자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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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늦여름, 남산에서 보낸 58시간은 김충식 기자의 운명을 바꾸었다.그 다음해인 86년 그에게 프레스카드가 발급되지 않았다.당시는 정부가 발행하는 프레스카드를 소지해야만 정부 부처를 출입할 수 있었던 시기. 동료기자들은 ‘너는 정부로부터 찍힌 놈이다.해고대상 1순위다’라고 농담으로 말했지만 웃을 수만은 없었다.


심리적 압박이 컸던 시기, 고인이 된 이상하 정치부장은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회사를 떠나 먹고 살기 어려우면 학보사 주간이나 해서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야간에 대학원이나 다녀라.”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에 다니며 석사학위를 받았다.대학원 진학은 그가 대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고, 현재 가천대에서 초빙교수를 하는 자산이 됐다.
 


남산의 경험은 한편으로 그의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을 쓴 백그라운드가 됐다.그는 3공화국 실세였던 중앙정보부장들을 소재로 한 ‘남산의 부장들’을 89년부터 2년 2개월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이 연재물은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세권의 단행본으로 나왔다.“남산의 고문을 생각하며 기획안을 냈다.김중배 편집국장이 선뜻 수용하더라. 그렇게 연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85년 8월 30일 안기부에 연행된 것과 관련해 그는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이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정부발표 이전에 기사화했다는 것은 구실이고 사실은 동아 보도에 대한 누적된 불만에 대한 보복이자 다른 기자들에 대한 본보기였죠.”


그는 기사에 대한 소스를 추궁하며 가한 모진 고문을 견뎌냈다.‘죽을 때까지 부채를 지고 사느니 차라리 고생하자’고 속으로 다짐했다.심문은 잔인했다.끌려올 때 신고 온 구두를 입에 물게 하고 떨어뜨리면 팬다고 협박했다.“개와 다름이 없었어요. 패고, 심문하고, 패고, 심문하고….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남산에서 풀려난 후 고 김상만 회장에게서 받은 격려전화 한 통을 잊을 수가 없다.“풀려난 당일이었어요. 김 회장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당시 전화는 모두 도청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이야. 고생했네. 푹 쉬게, 걱정 말고 푹 쉬어’.”


그는 당시는 지금 잣대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말했다.“말이 그렇지 편집국장, 정치부장, 정치부 기자 세 사람을 데려다 두들겨 패고 심문하고…. 그야말로 몰상식한 광기의 시대에 미친개에게 물린 것이었죠.”

 
 
(2008-09-25 기자협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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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통제와 신문의 저항 / 이채주 지음 / 나남출판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 있다는 말에 소름이 끼쳤다. 책임자급의 사나이는 주황빛 전등 아래에서 마치 거인처럼 커 보였다.…이 무렵 김충식 기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옆방에서 들려왔다. 왜 이러십니까 하고 부르짖는 김 기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1985년 8월 29일과 30일에 걸쳐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저자와 이상하 정치부장, 김충식 정치부 기자가 안기부로 연행됐다. 85년 8월 29일자 2판에 실린 ‘불시착 중공기 조종사 대만 보내기로’란 기사가 정부발표 이전에 기사화돼 엠바고(보도관제)를 위반했다는 게 구실이었다.


이 책은 ‘암울했던 시절 어느 편집국장 이야기’라는 부제 그대로 5공 시절인 1983년 5월부터 1987년 1월까지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임한 저자가 당시를 회고한 기록이다. 저자는 편집국장으로서 남산(안기부)에 수차례 끌려갔던 경험뿐 아니라 당시의 신문기사, 동아일보 사내보 ‘동우(東友)’지에 실린 기자들의 취재후기, 언론관련 국내외 성명서 등 자료를 통해 5공 당시 암울했던 언론 상황을 실증적으로 재현했다.
 
 
(2003-12-05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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