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함에 관하여

by 김원일 posted Oct 18, 2014 Likes 0 Replies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등록 : 2014.10.17 18:34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한 대학의 영문과에서 이번 학기에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강독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문장을 해석하다 보면 애매한 구절들을 발견하곤 한다. 문법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문장들이다. 문장뿐 아니라 인물도 마찬가지다. 개츠비가 정말 위대한지 아닌지, 데이지가 개츠비를 이용했는지 사랑했는지, 닉이 믿을 만한 화자인지 아닌지, 자신이 읽은 바에 따라 어느 하나를 주장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답이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애매함은 때로 강사와 학생을 당황하게 하지만, 세월을 이겨내고 ‘고전’이라는 이름을 취득한 텍스트치고 애매함을 갖고 있지 않은 텍스트는 없다.

애매함이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시각과 해석과 입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애매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수학과 다르다. 수학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건 궁극적으로 정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문학에는 ‘아름다움’은 있을지 몰라도 ‘완벽함’은 없다. 애매함과 완벽함은 애초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완벽하지 못한 애매함이 아름다울 수 있는 곳, 그곳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이 ‘인간의 무늬’를 다루는 학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매한 인간 혹은 인간의 애매함을 다룬다는 말은 다양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인간의 다양한 측면은 그 자체로 의미를 발생시키고, 그 의미들이 해석을 열며, 이 해석들이 텍스트를 풍부하고 깊게 만드는 근거가 된다. 정답으로 규정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애매한, 그래서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는 인물이 문학사에 남는다. 제이 개츠비가 그렇고, 윌리 로먼이 그렇다. 개츠비가 위대한지, 로먼이 실패자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애매한 채로 남아 있으며, 그 애매함이 <위대한 개츠비>와 <세일즈맨의 죽음>을 꾸준히 읽히게 하는 힘이다.

인문학을 공부하자며 대통령부터 기업 사장까지 목소리를 높이는 나라라면, 그 나라는 아마도 애매함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 보인다. 노동당 부대표의 카카오톡을 검찰이 사찰하고,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폭식 이벤트를 벌이며, 남자가 치어리더에게 술을 따르라 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는 댓글들이 줄을 잇는다. 극도의 경쟁사회가 낳은 불안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법적·일상적 혐오와 공격으로 전환되는 중이다. 좌파,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동성애자, 장애인, 호남, 유가족 등이 그 주요 표적이다. 혐오문화의 전면화가 드러내는 한 진실은 이 사회에서는 오직 애매하지 않은 인간만이 혐오받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을 사랑한다고, 북한을 싫어한다고, 법질서를 존중한다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부정적이지 않다고, 이성애자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 국회가, 경찰이, 기업이, 언론이, 대학이, 인터넷이 이러한 고백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요청하며, 우리는 ‘죄지은 게 없이 당당하다면’ 그 요구에 응해야 한다. 너의 정체, 너의 정답을 밝혀라! 너의 애매한 태도는 네가 부끄러운 게 있음을 말해준다!

애매함이 인문학의 본질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애매함은 삶의 본질이며, 인간의 본질이며, 세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인간은 답이 없으며, 끝까지 답이 없는 세계에서 살다 죽는다. 그런 인간에게 확실한 정답과 정체를 강요하면서 이를 혐오와 폭력으로 연결시키는 사회라면 그곳은 분명 인간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 인문학이 번성한다면 둘 중 하나다. 사회가 가짜거나, 아니면 인문학이 가짜거나.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