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라는 단어가 사전적인 의미와 성경적인 의미가 달라야 하고
철학적인 의미와도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늘 한다.
때론 우리는 현란한 설득에 마음을 빼앗길 수가 있다.
하와의 자손들이니까.
믿음이라는 명사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
믿음이라는 성경적인 의미로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촛점을 맞추는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구약에서 낯설거나 잘 등장하지 않는 이 단어는 율법의 사람 모세가 지닌 기능과는
다른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시작된 이 단어는 그 기능을 가진 인물의 등장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설파하는 믿음의 주체는 예수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어서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는 몽학선생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라고 부르짖는다.
구약속에서 들어나는 믿음은 율법을 통해서 나타난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아브라함이 아들이 생길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살아간것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움직여 간것을
히브리서에는 믿음의 행동 즉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믿음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갈바라는 것은 믿음의 아들을 낳고 그 아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동행을 말함이다.
그 약속을 향하여 자신이 할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무엇인가 해야 할것 같았고
그래서 낳은 아들이 하갈 즉 시내산에서 얻은 이스마엘이라는 가짜 믿음의 행동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라는 행위에 근거한 믿음은 성경상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 (예수)이 오신 후에는 우리가 모세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할때는 누구나 가만히 있는다.
그러나 믿음이 오신 후에는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라고 한다면 거의 재림교회 전원이 들썩거리게 될것이다.
믿음이 온후로는 우리가 믿음아래에 있어야 마땅한 일임에도
우리는 율법으로도 믿음이라는 가짜 신앙 즉 이스마엘을 낳고 있다.
믿음 (예수)은 우리에게 약속을 지키는 일은 이렇게 이렇게 사는것이다 라고
일러 주신일 외에 또 다른 모세 (율법)를 주신일이 없다.
예수를 기다리면서 이렇게 이렇게 사는것이 믿음생활이다.
이렇게 이렇게 사는 삶에는 이웃을 예수님에게 하듯이 대하고 사는 삶이라고
양과 염소을 빗대어서 하신 말씀도 있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예수의 행동은 예수만이 (성령의 역사) 할 수 있는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율법도 지킨다는 것으로 사용 되지만
약속을 기다리는 것도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의 약속을 지키는것 외에
자꾸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거나
교회를 다니는 일 또한 믿음이라고 두리 뭉수리
이해함이 성경적인 해석이 아니라 함을 말하고 싶다.
믿음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사단이라고도 하지만
사단이 율법을 통하여 한 일인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믿음 믿음 할때에 그 단어에
십자가의 피 한방울이라도 묻어있는가 라고 먼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믿음은 비숫하나 비슷하지가 않다.
순수히
믿음이 무엇인지를 구분하게 되면
영생이 보일 것이다.
예수를 알자
그의 삶과 죽음
그의 약속
그의 사랑
그의 가르침
그의 능력
그의 기도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단어를 제발 율법과 섞지 말자.
율법으로 지키는 안식일이 있을 수 있고
믿음으로 지키는 안식일도 있울 수 있겟다
믿음을 가지고서
구태여
신약
또는
구약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법)이고
신약도 하나님의 말씀(법)이라면
하나님의 말씀(법)에는 동일하질 않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구약에서도
그 많은 믿음에 관한 약속의 말씀들이 많은데
구태여
신약에서 바울이 말한 것이 유독하게 돋보인단 말이던가 ?
지나친 편향된 집착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