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교파인들이 보는 허시모 사건 그리고 교단이 공개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by posted Oct 31,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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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재림 교인 헤이즈머(C. A. Haysmer : 한국명 허시모) 의료 선교사의

12세 소년의 안면에 '도적'이라고 글자를 새긴 일명 '허시모 사건'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도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어느 누구든지 인테넷에

'허시모'라는 이름 석자만 치면 그 당시 역사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재림교회가 역사의 수치라고 여겨 감추거나

이 사건을 정당화한 사건도 결코 아닙니다.

그 당시에 이미 허시모 의사의 이름으로 신문에까지 '사죄 공고'를 냈으며

당시 재림교회도 이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 1926년 7월 4일자에 "안식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의 잘못을 알음으로

전세계 인류앞헤 사죄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허시모도 피해자 가족에게

620원의 위자료와 치료비를 주기로 합의했다"고 기사화 했습니다.


몇 몇 분들이 1900년대 일제 치하에서 일어난 신사참배와 이 사건을 가지고

재림교회가 공개 사과를 해야 하는니 등의 문제 제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12세된 김명섭군에게 피해를 입힌 미국 재림교회 의료 선교사

허시모가 개인적으로 신문 사죄 공고를 통해 만천하에 용서를 빌었고

피해자 가족과도 개인적 합의를 했고 당시 재림교회 지도자들도

온 국민을 향해 정중히 공개 사과를 하였으며 

허시모 선교사는 법정에 서서 엄중한 범죄 사실에 대한 징역형과 더불어

집행유예 선고를 받아 고국으로 영구 귀국하므로 인해 

이 사건은 이미 개인 사죄문, 교단 사과, 개인 형사처벌 등이 완료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90여년이 지난 지금 이제 와서 그 어떤 사회의 그룹이나 기독교의 인사들이나

그 어떤 누구도 이 문제를 빌미로 재림교회를 향해 공개 사과 등의 문제를

전혀 야기하지 않는데 왜, 무엇때문에 재림교회 교단이 이 문제를 스스로 다시

꺼내 들어 공개 사과를 해야하는 것인지요?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사건의 전모는 어느 누구나 포털 사이트 검색란에

'허시모'라는 이름 석자만 쓰면 그 당시 신문 기사와 함께 그 사건에 대한

논문과 기독교회 학자들의 논평 등을 상세히 살펴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요 사실인 것입니다.


다만 근자에 카스다 누리꾼들에 의해 이 사건을 보는 시각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아래에 타교파인들이 보는 허시모 사건과 당시 신문 기사들과 몇 댓글들을 참고해 보시고

카스다 누리꾼들이 각자 지혜롭게 이 사건을 판단하시고 결론을 내리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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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모 사건

‘허시모 사건’은 한국 기독교사 중에서 매우 자극적인 사건이었고,

사회적인 물의도 많이 일으킨 사건이다.

허시모(許時模)는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C. A. Haysmer)의 한국이름인데,

기독교사 책에 실린 설명에 따르면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25년 여름에 자기 집 과수원에 들어와 사과를 따먹은 그 지방 어린이(12세) 김명섭의 뺨 좌우에,

염산으로 ‘됴적’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서 한 시간 동안이나 볕에 말린 후 풀어놓았으니,

이로 인해 됴적이라는 두 글자는 영원토록 그 아이의 뺨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되었다.


미국 선교사가 어린아이의 얼굴에 해놓은 짓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미제 선교사를 욕하는 북한의 출판물에 흔히 등장하는 이야기가 된다.
모퉁이돌 선교회 웹 게시판에 있는 글(교회사를 잘 아는 이의 글이라고 생각된다)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요즘의 안티기독교인들에게도 좋은 소재가 되리라.)
김일성 저작 선집과 1982년 12월에 발행된 천리마를 보면
지난날 선교사의 탈을 쓰고 조선에 기어들었던 미제 승냥이 놈이
조선의 한 어린이가 사과밭에 떨어진 사과 한 알을 주었다고 하여
그 이마에 청강수로 도적이라고 새겨놓는 천인 공로할
만행을 감행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것이 미제 침략자들의 승냥이의 본성입니다.』라고 주장했다.
흡혈귀로 표현된 이유에 대해 1992년 귀순한 강 봉학은
그의 저서『동토의 땅에서 원쑤의 나라로』에서 어떤 아이가
선교사의 과수원에서 떨어진 사과 한 개를 주웠는데
그것을 목격한 선교사가 개를 풀어서 아이를 추격한다.
결국 아이는 잡히면서 개에게 심하게 물어 뜯긴다.
그것도 모자라 선교사는 아이를 나무에 묶어 놓고 청강수(염산)로
이마에 도적이라고 새겨놓는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규무의 <‘허시모 사건’의 경위와 성격>이라는 논문은

이 사건을 당시 자료들을 통해 재구성하고 사회적 파장이 일어난 과정을 살피는 글이다.

기독교사에서 결코 아름답지 않았던 이 사건을 제대로 다룬 논문 한 편 없었음을 감안할 때,

이 논문은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다소 잘못 알려지거나 과장된 내용이 많다는 관점에서 사건을 추적한다.

저자의 그러한 지적에 유의하며 내가 이 글에서 새로 얻게 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허시모가 ‘도적’이라는 글자를 새긴 것은 이마가 아니라 양쪽 뺨이며,
그냥 염산이 아니라 초산은을 사용하였다.
초산은은 염산에 비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지 않으며,
이것은 허시모가 글씨를 일시적으로만 남겨두려한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 처음에 명섭이를 잡았을 때, 허시모는 부모를 불러 돈 5원을 요구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자 2원 벌금에 2주간 노동을 제안하였고,
2원 마저도 낼 형편이 안 되자 대신에 ‘도적’이라는 문자를 새기기로 합의한다.
글자는 몇 주 후에 소멸될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서.

3. 위의 세부적인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허시모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실제로 명섭이 뺨의 글자는 잘 지워지지 않았고,
이에 대해 허시모는 아이가 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등 이물질이 들어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을거라고 발뺌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허시모는 처음부터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나중에 문제가 커지자 사과문을 내기는 했지만
재판 진행 중에 피해자측과 몰래 합의를 봐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 했다.

4. 이 사건은 1925년 9월 경에 일어났으나,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26년 6-7월경으로,
이 때 일반 신문들에서 대서특필함으로써 재판이 진행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다.
사회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대한 한국기독교계의 입장 표명은 거의 없었다.
안식교회가 주류 교단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른 척 했을 공산이 크다.

1920년대 중반은 기독교가 문명국의 종교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잃어버리고,
그저 하나의 보수적인 세력으로서 지식인들의 비난을 받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반기독교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러한 시기에 터진 사고에 대한 교계의 뻣뻣한 태도는 요즈음의 교회 모습과 많이 겹쳐진다.
요즘과 같이 교회 인구가 정체되어 있고, 여러 사안에서 사회적인 비판에 직면한 시점에서,
1920년대의 교회사에서 시사받을 것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넓게 보면, 이것은 서구의 죄 개념이 우리나라의 서리 문화와 충돌한 사건이다.
허시모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아야 알겠지만, 그는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그는 절도라는 범죄는 응징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 죄에는 상응하는 배상이 있어야 하며,
그 배상이 돈으로 지불되지 못하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미국적인 사고를 실천하였다.

그런데 재수없게도 애가 상처를 잘못 덧대는 바람에 흉이 남은 것이고.
그의 세계관은 우리나라 서리 문화에서 나타나는 다른 형태의 죄개념과 충돌하였다.
우리에게도 절도라는 개념은 고조선부터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적용되는 방식, 거기서 나타나는 유들이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죄란, 절대적인 도덕 명제이기에 앞서 사회적인 합의인 것을 그는 인식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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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衍塘 2006/06/30 13:46 # 답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본 논문에 실린 글들을 읽다가 한자 앞에 좌절하기도 했지만요.ㅎㅎ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참 많이 담겨있는데,
우선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 '절도'와 '서리'라는 단어에서 오는 차이였습니다.
조선땅에서의 선교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해, 선교사 더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당시의 반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몇차례의 폭행과 성추행으로 인해,
 기사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가 궁금해집니다.

선교라고 하니 또....
러시아에 들어와있는 몇몇 한국인 선교사들에 대해 러시아인들이 내뱉던 조소가 생각나네요...
'정교 1000 년의 나라에 와서 돈으로 사람을 사려 한다'는...

 房家 2006/06/30 20:31                   

선교사에 대한 반감이 몇몇 사건으로 바로 생겼다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폭발한 것이겠지만,
그 폭발 시기는 1920년대 중후반입니다.
몇몇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고, 한국교인들의 자치권 요구도 강해져 충돌이 있었죠.
 대표적으로 구세군에서 그 충돌이 있었고,
장로교회에서도 선교사 지배로부터 독립교회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저는 유구한 기독교 문화를 지닌 지역에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파견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색안경을 끼고 보는 편입니다.
 정교회 지역의 선교사들도 그럴 것이고 가톨릭 지역, 특히 필리핀과 같은 곳에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파견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free-rein 2006/07/20 02:23               

이런 사건도 있었군요...
새로운 거 알고 갑니다...

 이요셉 2009/11/26 16:27 #                 

저는 북한에 살았기에 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돌렸습니다.
특히 지금 북한 선교의 걸림돌이기도 하고요.
기독교의 특징은 회개를 기본으로 시작합니다.

회개없는 믿음 또 회개는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을 근본으로 합니다.
성경전반에 기록된 죄는 다 그 대가를 치릅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용서받는다는 것은 허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회개가 아니지요 실례로 다윗도 청부살인하고 회개할때
그 대가로 바세바에게서 난 첫 아들이 줌임을 당합니다.
대가 없는 회개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지금 죄가 반복되고 심지어 회개하고 목회자가 된사람들 다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의 논문이 바로 된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질산은은 햇빛을 볼 수록 검해지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습니다.
물론 약간 바른것은 새살이 돋아 나면서 없어질 수 있지만 용액의 농도에 따라 다르지요.

실제 김명섭이 해방후 존재한 인물이며 그 정도와 경위를 따나 그런 행위를 한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유를 망론하고 이마나 볼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마면 더 죄가 크고 볼이면 더 작습니까?
사실 이마의 흠짐은 가릴 수 있으나 볼의 흠집은 가리지 못하지요
그리고 청강수와 질산은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어느것이건
살을 녹이고 쇠까지 부식시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사과요 무엇이요 하는데 개인적인 사과나
교단적인 사과가 문제가 아니라 진심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단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교단을 떠나 사람개인을 떠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교단이라면
허심하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정식 해야 합니다.

과거 교황청이 잘못을 성명을 통해 정식 사과 하듯 말입니다.
북한에는 <승양이>(한설야작)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교단을 떠나 누구이름있는 목사의 이름이나
교단이나 총회의 이름으로 사죄하고 김명섭또는
그 후예들에게 정식 사과나 보상까지 생각해 보았습니까?

북한 선교의 걸림돌을 제거하지 않으면 북한선교의 장애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저는 때문에 늘 북한 사람들을 만나서 이말이 나오면 자신의 일 처럼 사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진실만이 통하지 가면은 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처럼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요셉 2010/03/07 05:43 #                 

김명섭이라는 도벽이 있는 습관성 도적질을 하던 아이의 이야기 인데요.
허시모 선교사가 도적질하다가 잡힌 이 아이를 간호사한테 넘겨주었는데
 당시 간호사들이 염산도 아니고 질산도 아닌 초산(식초)로 됴적이라고 쓴 사건입니다.

 오스왈드 2010/06/08 08:43 #                 

습관성 도적질이라기 보다는 흔히 볼 수 있는 서리 문화였을 뿐이지요.
문제는 그 서리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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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허시모 사건 


1925년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면 남창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건의 무대는 지금 청량리 위생병원의 전신인 평남 순안 병원 원장으로 일했던

미국출신의 안식교 출신인 `헤이머스`선교사의 과수원에서였다. 

12살 먹은 동네 꼬마아이들은 코쟁이라 부르는 헤이머스 선교사의 과수원을 지나다가

제법 잘 익은 사과를 보고 서리를 하게 되고, 그 중 한 명 `김명섭`이라는 아이가 도망가다 잡힌다.

잡힌 김명섭이라는 아이는 헤이머스 선교사에 의해 나무에 묶인채

염산으로 `도적`이라는 글씨를 이마에 쓰이게 된다. 그리고 한 시간쯤 볕에 말렸다고 한다. 

이 내용은 주 교재를 요약한 것이고, 다른 자료의 내용은 다음이다. 

「 3·1 운동이후 선교부 지도급 인사들의 총독부와의 우호관계는

의식있는 한국인들의 우려와 비난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더구나 1920년대에 내한한 '제2세대' 일부 선교사들의 백인 우월주의적 행태가 표면화되면서

전국에서 선교사들의 비행사건들과 인종차별 사건들이 발생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건 가운데 하나가 '허시모사건'(許時模事件)이다.


이에 대하여 북한 <역사사전>은 '순천 미제 선교사놈의 만행'이라는 항목에서 
매우 선동적인 어조로 묘사하고 있다. 

미제의 선교사 페소머(헤이스머)라는 놈은……

제가 가지고 있는 과수원 부근의 길가에 떨어진 사과 한 알을 주은 12살 된 조선소년을 붙들어다가

세퍼드에게 마구 물어 뜯기게 한 후 나중에는 나무에 결박해놓고

소년의 이마에 초산은수로 '됴뎍'이라는 글자를 새기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감행하였다.

미국 선교사놈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분격한 조선인민들이 항의투쟁을 전개하자

일제 경찰 놈들은 페소머놈을 극력 비호하면서 조선인민의 정당한 투쟁을 야만적으로 탄압하였다. 」 

사건에 대한 여론들 

이 사건이 우연히 일본인 검사에 의해 알려지면서 짧은 얘기지만

선교사라는 문제가 사회적 큰 사건으로 발달하게 된다. 

동아일보 1926/07/04  
「기독교 정신을 발휘하여 교도의 교화를 위하여 온 자로써,

진선 진미한 성서에 기록된 왼빰을 치면 오른빰을 내어 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라는 교훈을 망각하였더냐?

조선 사람인 까닭에 잔학한 일을 당해도 무관타 생각함인가?

소위 문명인이라는 백인의 간판을 붙였으니 무관할 줄 알았는가? 」 

좌파 계통인 경성 학생 연맹 - 「경성 학생은 고한다 !」 

「하나! 평원 미국인 선교사 허시모의 만행에 대하여

각 우익 단체와 협력하여 적극적 행동을 취하는 한편

이 기회에 현재 종교의 흑막과 침략의 전위인 선교사류(類)의 진면목을 폭로시키고

종교적 교육에 반대 운동을 일으켜 소위 교회와 학교의 분리 운동의 제일보로

각 학교의 성격 과목을 페지할 것! 

하나! 조선 학생의 역적(力的) 단결과 운동의 선전 및 그 요구를 표명하기 위하여

`학생 데이`를 정하여 각 우익 단체와 협력하여 구체적으로 결정할 것!」 

이렇게 언론과 청년기관에서 들고 일어서자 안식교단은 서둘러 사과문을 기재했고,

선교사 허시모도 공식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기에 이르지만 사회 각계의 지탄은 계속 되었다.

결과적으로 허시모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 전체에 대한 문제여지가 많았고 일본의 개입도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미 한국 기독교와 서양 선교사간의 고리를 차단하는 것이

자신들의 한국 민족 말살책이나 황민화 정책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반 선교사적 분위기를 크게 부추겼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 선동하는 계획을 이행했다.  

일제측의 주장은 허시모 사건을 통해 서양 선교사의 부당한 행위를 욕하던

우리나라언론과 같은 뜻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한국 지성들에겐 충격을 가져다준다. 

「 도대체 언제부터 일본이 그토록 조선인의 인권을 염려하고 그 침해에 대해 분개하게 되었는가?

수많은 조선인의 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알고 그 민족혼을 무참토록 짓밟아 온 일본이 아니었던가?

어찌하여 그들이 
서양인 선교사의 한 만행 앞에 조선민족 당사자들의 통분이상으로 흥분하여 떠들게 되었는가…? 」 

당시 민족 언론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일제가 동조하게 되자 놀라게 되고, 논조는 급히 바꿔게 된다. 

동아일보 1926/07/16 
어째서 떠드는가? 조선 소년의 얼굴에 도적이라는 글씨를 써서 세론을 일으킨

미국의 허시모 사건에 대하야 일본 사람들이 굉장하게 떠든다.

동경에서는 국민대회까지 열게 된다하며 상애회에서도

대합동으로  불철주야 한다고 한다. 

노할 때 노하고 웃을 때 웃을 줄 아는 것이 군자의 도리임을 아는 조선 동포는

이제 너그러운 뜻으로 이 문제를 수습하려는 이 때에 왜 이렇게....

정의와 인도를 위해서 떠든다하면 참 고마운 세상이다. 이렇게 
정의와 인도를 사랑하는 동무가 하나씩 둘씩 늘어가는 세상을 하나님 굽어 살피소서! 

그리하야 영원히 영원히 이 정의와 인도의 세상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오면 정의와 인도의 탈을 쓴 악마는 
영원히 없어질 것이로소이다. 아멘! 」 

이 논평은 무척 날카롭고 풍자적인 논평이었다.

발생 1년만에 사회를 온통 떠들게 했던 허시모사건은 이제 끝나게 된다.

1926년 11월 18일 경성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

원심대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을 선고받는다.

헤이스머 자신도 일수어탁이란 말을 사용해

자신 하나로 선교사 전체의 인식이 나뻐졌다고 후회했다 .   

이 일은 한 선교사의 실수 내지는 순간적인 잘못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큰, 선교사 일부의 구조적인 문제점이 노출되어 졌다는 평을 받는다.

선교사들의 인종차별 주의적 편견과 오만에서 빚어진 불행한 사건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

허시모사건은 당시 한국 민족 기독교, 서양 선교사, 일제측이라고 하는

시대적 구도 속에서 만들어진 갈등과 선택의 문제라는 점에서도 살펴봐야겠다. 

1923년.이상재 선생이 새로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한 강연 중 일부다.  

「 "그리스도 인으로 우리는 하나다. 우리의 천국은 세상의 어떤 경계도 초월한다.

그러므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

비록 천국이 전투적이고 진취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본래 목적은 남을 지배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닐지니,

오히려 서로 도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알아보면 미일통상조약(1858),

한미수호통상조약(1882)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아래서 미국의 교회는

제2차 대각성 운동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자유롭게 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파송 되었고,

 마침내 한국에도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105인 사건이나 3. 1운동을 통해 나타난 선교사들의 모습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에 대해 심정적인 동조는 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정부의 한국과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정교분리 신학배경으로 인해 적극적인 지원과 참여를 하지 못했다. 

특히 3. 1운동 이후 선교부 지도급 인사들이 보여주었던 총독부와의

우호적인 협력 및 동역관계는 의식있는 한국인들의 우려와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다.

선교사 중 상당수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다소 완화된 듯한 대한 정책을 추구한 사이토 총독에게 기대를 걸며,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교리적으로 불순한 행위로 규정하며 교회의 비정치화를 더욱 강하게 추구하였다. 

이로 의식있는 한국인과 선교사 사이에 갈등이 초래되었으며,

1920년대 내한한 제2세대 일부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적 형태가 표면화 되면서

민족감정문제를 일으켰고 서로 벽을 쌓게 되었다.

이에 대표전인 사건이 허시모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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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땅에 와서 순교자의 정신으로 희생한 재림교회 미국 선교사들]

1905년 11월에 스미스목사가  가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온 후 많은 선교사가 뒤이어 왔습니다. 
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수고와 헌신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초창기 역사는 선교사들의 ‘희생’으로 알알이 
1911년 11월에 원산에서 아들 지쓰로(Jethro)를 전염병으로 잃어야 했습니다. 

러셀((R. Russell, 노설) 의사는 다섯 살된 아들을 잃고 석박산 기슭에 무덤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순안 의명학교의 교장이던 리(H. M. Lee, 이희만) 선교사 역시 네 살배기 큰딸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또한 클로우스(J. C. Klose, 구치흔) 선교사도 한 자녀를 눈물을 감추며 우리 땅에 묻어야 했습니다.

왕거린(R. C. Wangerin, 왕아시) 선교사는 1909년 10월에 내한하여 
1911년 8월부터 남선지방의 선교 책임자로 크게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질병을 얻어 치료받고자 1916년 7월에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만 1917년 6월에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처형은 23세의 나이로 1907년 1월에 내한한 샤펜버그(M. Schaffenburg, 사엄태) 선교사였습니다. 
그녀는 교사로, 각부 주임으로, 편집인으로 큰일들을 맡아 비상한 정력으로 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1919년 12월 19일 향년 36세로 애석하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투병 중에서도 <고대사화(부조와 선지자)>를 번역하여 우리의 손에 들려 주기까지 했는데, 
그녀가 무섭게 일을 좋아하던 것을 아는 이들마다 부음을 접하고 참으로 가슴 아파했습니다. 
1920년 1월 호 <교회지남>에는 “사랑하는 우리의 누님…조선을 위하여…그렇듯 사랑하여 
막대한 근면과 고심으로 행하던 일,  심한 병을 얻은 후에도 힘쓰던 일에서 떠났으니… 지금 잠든  
누님의 훌륭한 모본을 힘써 따르기를 포고하노라.”라는 조선합회 평위원회의 추모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들 초창기 선교사들이 미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하여 목숨조차 아끼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눈’  정신은 후배 선교사들에게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고맙고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 한국 재림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재림 성도들은 이러한 훌륭한 선교사들의 한국 사랑과

한국의 영혼들에 대한 열정과 뜨거웠던 숭고한 희생 정신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허시모 사죄광고.png

(허시모 이름으로 낸 신문 사죄공고문)


허시모 사건 김명섭군.png

(당시 피해를 입은 김명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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