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죄악의 시작은
물론 우주의 죄악 시작도 포함된다
모두가 하나님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
북극 높은 곳에 보좌를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분별하려는 욕망
그 인간들의 욕망이 잘못된 해석을 낳은 것이 바로 이 구절이다
벧전 1:15, 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래서 인간도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고들 난리다
고기 먹으면 절대로 거룩할 수 없다고 우유도 계란도 안 먹는다
이 구절의 원 성경은 여기서 유래한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 구절을 다시 해석해 보자
이 구절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레위기 11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 되려고 애급에서 인도했다
그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라...내용은 이렇다
그런데 그 구절이 나온 연유를 좀 보자
레 11:44 ,46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이는 짐승과 새와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땅에 기는 모든 기어다니는 것에 대한 규례니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
이것 먹지마라
이것 먹으면 부정하게 된다
이것 먹으면 거룩하지 못하게 된다
내가 너희를 내 백성 만들려고 애급에서 불러냈다
애급인들 하고 다르게 살아라
이것 안 먹으면 거룩하게 된다
이 말이다
그 백성들이 얼마나 지키기 힘들어했으면 이것 안 먹으면 거룩해 진다고 했을까?
생각 한 번 해 봤는가?
그것을 베드로는 이렇게 그 동족들에게 말한다
너희가 예수를 안 봐도 사랑하는 것 보니
보고 믿는 나보다 낫구나
보지 못하고도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데
그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잘 살펴봐라
너희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고 예수 오실 때까지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 좋겠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어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벧전 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하던 짓 즉 사욕-사사로운 욕심-을
본 삼지 말고..... 그리고 본문의 1:15,16을 말한다
거룩해라
사욕을 좆지 않으면 거룩해 진다
나도 너희를 내 백성 삼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
내 자신까지 버렸다
그리고 거룩한 자가 아니더냐?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려거든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라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답은 간단하다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거룩하게 되려고
내 몸을 불살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 거룩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 19)
답이 되는가?
믿음과행함/
그래서 신의 성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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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이 구절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안식교인들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즉 이리해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려면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고 말한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준이 바로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등등에다가
결국 사랑을 공급하는 행위를 말한다
여기 이것 중에 하나만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
나는 절제 하나 밖에 못해요
그래? 그것이라도 해 봐라 그러면 그것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게 뭔지를 알게 돼
그러신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 다 할 거라고?
그건 신의 성품이 아니라 직접 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 11)
그래서 이런 게시판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다고 떠들고 있으면서
그것 아니라한다고 욕질 비스무래하게 하는 분들 그 성깔로 하늘길이
“넉넉”할 거라고 믿으신다면 큰 오산이다
석국인/
fal님 님은 하나님의 법을 도무지 지킬수 없는 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묻겠는데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완벽하게 지켜집니까 못지켜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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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묻겠는데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 법을 완벽하게 지킬 거라고 악전고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세
석국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인도하심이면 이룰수 없는 것이 없는데 님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놓고 말을 하고 있읍니다. .......완벽하게 지킬수 없다는 결론은 사람이 낼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안에서는 불가능할 것이 없는 것이며 그래서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동화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세상의 혼란하고 죗된 환경에서 그리고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할 법이라 결론을 내고 그 법을 폐하려 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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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킬 수 있다고 이룰 수 있다고 떠드는 행위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옛날 우리 선구자들이 그랬다
출 19: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봐라 이스라엘이 지킨다 하고 못 지키지 않았느냐 이건 거짓말하는 것이고
차라리 못 지키겠습니다 했더라면 더 양심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못 지키는 법을 주셨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 보니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할 법이라 결론을 내고
그 법을 폐하려 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로고 호도하고 있다
이스라엘 선조들이 지킨다 하고서 못 지켰다
그것은 율법에 억매인 생활을 가지고 억지를 지긴 결과이다
믿음과행함/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벗어났다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 죄를 알게 된다"(여기는 내가 쓴 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게 아니라면 율법의 하는 역활은 무엇인가요?(이건 질문한 글)
오늘 교과 시간에 내가 물었다
지난 한 주일 동안 십계명을 머리에 이고 산 사람 있습니까?
이건 죄다 이건 아니다 하고 산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죄인입니까?
그렇다고 한다
그럼 그 죄가 양심으로 소리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율법이라는 십계명의 소리입니까?
양심의 소리라고 한다
답이 됐는가?
믿음과행함/
>즉 계명은 죄인을 지적하는 기능에서 죄인을 사랑하는 기능으로 변했다는 겁니다
=>계명은 죄를 지적하여 알게 해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입니다.
그런데 계명이 사랑하는 기능으로 변했다고요?
율법에 또는 계명에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김균님, 율법은 오로지 거울역활 밖에 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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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과의 제목이 바로 사랑과 율법이었다
한국에 계시면 공부 잘 하셨을 것이고 미국에 계시면 내일 교회가서 떠들고 있겠네
율법이 거울 역할만 하는지 아니면 그 율법이 마음에 새겨져서 새로운 역할을 하는지
공부 좀 잘 하기 바란다
믿음과행함/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겁니다
아버지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마치는 것이 아닌
몽학선생 노릇하던 예식의 법, 형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겁니다."(이건 내가 한 말)
=>사랑이라고 하면 참 두루뭉실하고 애매한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이란 말 더 잘 씁니다. 사랑이란 말을 쓴다고 모두 같은 의미가 아니라 다 제각각 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이 십계명 입니다.
십계명 전반부는 하나님 사랑, 후반부는 이웃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이건 믿음과행함이 한 말)
사랑이 두루뭉술한 애매한 표현이라고?
그럼 믿음과행함님이 마누라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말도 두루뭉술한 표현이라면
마누라가 뭐라고 답을 할까?
사랑이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사도는 이야기했는데
그럼 사도도 두무뭉술한 말로 교인들에게 권면했구먼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이 두루뭉술하다고 패대기치는 이 표현을 현실적으로 바꾼다
그분을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눈물을 흘릴 만큼 그에게 젖으면
그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를 발견한다
그런데 장황하게 율법을 설명하다보면 예수는 없어지고 나만 남는다
제사제도는 큰 틀에서의 몽학선생이요 율법은 다음 틀 안에서의 몽학선생이다
율법이 죄를 지적하는 기능만 할 경우 그것은 영원한 몽학선생이다
그 몽학선생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승화함을 경험하지 못하면 영원히 몽학선생 밑에서
천자문만 낭독하고 잘하면 진사 벼슬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한 나라가 된다고 그의 백성이 된다고 하셨다
법이 있어도 법을 의식하지 않는 생활
법이 있으나마나 그 법이 지켜지는 생활 그것은 오직 예수로 말미암음이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했다
그럴까? 하고 의심하면 그게 바로 몽학선생의 지도하에서 죄인 되는 법이다
우리는 줄창 몽학선생은 제사제도 만이라고 배웠고 가르쳤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율법에서 해방되는 것이 뭘까?
제사제도일까?
아니다 제사제도는 그 제도를 그만 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도 그런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몽학선생이다
유대인들이 그랬다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경계한 것이다
우리가 애써 율법의 기능을 잊어버리려고 하지는 말라
우리가 세상 법을 알지만 법을 의식하지 않고 살듯이
하나님의 법도 의식하지 않고 내 속에 거하는 새 언약으로 이해하고 살면
그게 바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무슨 법이 폐지되었고 무슨 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하늘까지 가지고 간다는 식으로
예수 믿으신다면 그런 예수는 믿을 가치가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파하시고 새로운 것으로 다가오신다
그분 이외는 구원이 없다는 새로운 사실 그것은 율법관에 젖은 재림교인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심는 계기가 될 것이다
평생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내가 떠들고 있으니
날 보고 별 소리 다 하고 있는 줄이나 아시게
믿음과행함/
유대인들은 2개의 몽학선생 노릇하는 율법의 아래에 있게 되었지만,
예수께서 육체로 오셔서 이루시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한 개는 폐한바 되었고
한 개는 믿음으로 직접 예수의 피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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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십계명도 몽학선생이었다 하는 말이군
지금까지는 그런 표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슬슬 변해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십계명이란 율법을 언제까지나 몽학선생으로 모시고 있을 것인지?
그런데 계명을 “믿음으로“ 직접 예수의 피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물론 나도 그의 글 뜻을 안다
없앨 수 없으니 영원토록 하늘까지 가지고 가려니 정죄된 것을 믿음으로 해결하려는 거다
그게 말이 되는가?
이럴 때 믿음이란 단어가 참 기분 좋겠다
이런 곳에도 사용될 수 있다니 말이다
한 개는 폐하고 한 개는 “믿음으로“ 직접 예수의 피를 사용한단다
율법의 기능이 죄를 지적하는 것이라면서 예수의 피를 사용하는 것이란다
그럼 이 율법은 매일 예수의 피를 사용(기념)하려고 남겨뒀단 말인가?
아니면 시내산에서 그 법을 주실 적부터 몽학선생이라는 말인가?
왜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불쌍한 백성을 끌어내서 두 개나 되는 몽학선생을 주셨을까?
내가 앞에서 그들을 끌어낸 것은 거룩하게 해서 그의 백성 삼을 거라고 했는데
그런 백성들에게 왜 두 개나 되는 몽학선생을 한꺼번에 주셨을까?
하나는 종교적 몽학선생이며 하나는 정치적 몽학선생인가?
눈물 나게도 재림교회는 처음부터 몽학선생은 하나뿐이라 가르쳤다
제사법이 몽학선생이고 계명은 몽학선생이 아니라
히브리서 8장에서 말하는 새 언약이라 가르쳤다
그런데 성경은 십계명을 오늘 우리교단이 가르치듯이
그렇게 독단적으로 가르친 구절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넷째 계명만 특별히 빛나는 그런 구절이 별로 안 보인다는 것이다
십계명을 설명할 거라고 예수께서도 “계명들”이라 하셨다고들 떠들지 않는가?
이젠 결론이다
거룩하게 되고자 하면 사탄이다
신의 성품을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라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가르치는 것도 사탄의 행동이다
이렇게 내가 뭔가를 이루려는 것 자체가 사탄의 정신에서 나왔다
우리는 법이 있으나 없으나를 막론하고 이 땅의 죄인이다
이런 죄인에게는 율법이전에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법으로만이 아닌 은혜의 보좌로 나가지 않으면 죄인이다
그분의 덮어주시는 의의 두루마기가 없는 것은 죄인이다
그의 옷을 입고 있으면 언제나 의인이다
덮어주신 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함을 받지 않음은 이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글이 덜 완성 된 것 같은데 그냥 올린다
내일 일찍 일어나서 어시장 갔다가 의정부까지 가야하니 말이다
덜 된 것 지적해 주시면 달게 받고 하늘 길에 쓰임새 있게 사용하겠다.
줄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한 번 되 보려 한다
아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