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평화교류협의회의 평화 프로젝트] 제1부 38평화 (제2회) (3:30-3:55): 길은 가면 뒤에 있다 (최창규 장로) ■ 제2부 평화의 연찬 (제141회) (4:00-6:00): 스스로 져주시는 예수님 (김춘도 장로)

by (사)평화교류협의회(CPC) posted Nov 20, 2014 Likes 0 Replies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웃는예수.jpg




[사단법인 평화교류협의회의 평화 프로젝트] 

제1부 38평화 (제2회) (3:30-3:55): 길은 가면 뒤에 있다 (최창규 장로) ■ 

제2부 평화의 연찬 (제141회) (4:00-6:00): 스스로 져주시는 예수님 (김춘도 장로)



2014년 11월 15일 토요일, 사단법인 평화교류협의회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프로그램명은 '38평화'입니다. 38은 민족 분단의 상징인 38선(線)을 의미합니다. 우리 민족을 갈라놓고,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은 38선. 이 분열의 상징에 대하여 우리 (사)평화교류협의회는 더 깊이 해석하고 이를 남북 분단의 차원을 넘어 세계사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작업을 하고자 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 없었다면 38선은 없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하던 시기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미국의 소련에 대한 제안으로 위도 38선을 군사작전분계선으로 정하고 작전에 돌입한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민족의 분단이 시작되었습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불침례였습니다. 그 불침례의 결과 우리는 누천년 역사의,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잇는 21세기 신동방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보릿고개를 넘어 민주화를 이룩하였고 마지막 분단국가의 통일 염원을 실현키 위한 내외의 역량을 강화해가고 있습니다. 찌그락째그락 해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알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하여 부단한 공부를 합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고자 주의 말씀을 더 깊이 연구하고 해석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 이를 실천하고자 합니다.


지난 2012년 3월 첫째 주부터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이어 오는 '평화의 연찬'이 2014년 11월 15일(토) 현재 140회를 맞았습니다. 이는 우리 사단법인 평화교류협의회 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의미있는 성취입니다. 


매주 토요일 제1부 '38평화'(오후 3:30-3:55)는 TED와 같이 15분 강의 10분 질문, 또는 20분 강의 5분 질문의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시대적 맥락에서 구현하는 작업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우리 사단법인 평화교류협의회는 부단히 전진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의 정체성 형성을 위하여 우리의 설립 이념을 구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참여를 바랍니다. '열리면 찾아가고, 닫히면 연구하고!'  





제1부: [38 평화 제1회: 2014년 1122() 오후  3:30~3:55] 


              인도자: 최창규 장로((사)평화교류협의회 상생공동대표)

           

           제목: 길은 가면 뒤에 있다






제2부: [ 평화의 연찬 제140회: 2014년 1122() 오후  4:00~6:00] 


              인도자: 김춘도 장로(광나루교회)


            제목: 스스로 져주시는 예수님


   



[사단법인 평화교류협의회의 평화 프로젝트 : 2014 11 22()]

- 주 제 

    제1부 38평화 (제2회) (3:30-3:55): 길은 가면 뒤에 있다 (최창규 장로, (사)평화교류협의회 상생공동대표)

    제2부 평화의 연찬 (제141회) (4:00-6:00): 스스로 져주시는 예수님 (김춘도 장로, 광나루교회) 

- 장 소 : 서울조선족교회(서울 동대문구 용두2동 118-65 주원빌딩 4층)

[서울동부시립병원] 정문에서 청계8가 방향으로 50미터 지점 '유창철강'을 끼고, 좌회전

후 50미터 가면 오른쪽에‘주원빌딩’4층]

- 대 상 : 누구나 환영합니다.^^   오셔서 듣고 느끼시면 됩니다.

- 주 최 : 평화교육실천학교, 평화예배소

- 주 관 : (사)평화교류협의회(Council for Peace Cooperation), 홈페이지: www.cpckorea.org

- 연 락 : 조문산목사 010-8225-6670 : 서울조선족교회. 김동원 010-2786-1302, 김춘도 010-2284-3130, 김한영 010-7641-5656,명지원 010-6327-3935(삼육대학교), 박문수 010-2022-4620, 박준일 010-8901-4612, 최창규 010-3358-3508



제1부: [38 평화 제2회: 2014년 1122() 오후  3:30~3:55] 


              인도자: 최창규 장로((사)평화교류협의회 상생공동대표)

           

           제목: 길은 가면 뒤에 있다


 

- 이 시대는 심장 하나. 쓸개 하나씩 더 만들어야

- 나는, 우리는 누구인가?

-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된다.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어떤 주의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의 조선이 된다”. 단재 신채호.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늘 밖만 쳐다본다

 

- 황지우 시인 '마음의 지도 속 별자리'

'지금 나에게는 칼도 도 없다.

이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길이라면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에서는 다르다.

그동안 걸어온 길은 보이나,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막에서처럼.

 

- 세상중심은 어딜까.

아픈 곳.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은

지금 우리가 앓고 있는 분쟁과 갈등의 진원지.

가장 아픈 곳의 중심점은?

 

시대를 읽어내는 고뇌와 고통을 통해

지혜를 얻어내고 갈등의 진원지를 찾아내어

풀어 나가는 일이 시대의 하늘정신.

남과 북,

품고 나가는 일.

어렵더라도 피할 수 없는 일,

심장하나 쓸개하나가 더 필요한 지금의 세월.

남과 북, 서로를 이어주는 게 시대정신이자 우리 몫.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드리는 1% 제사.

여린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

웃으시며 무겁게 받으시겠지





제2부: [ 평화의 연찬 제141회: 2014년 1122() 오후  4:00~6:00] 


              인도자: 김춘도 장로(광나루교회)


            제목: 스스로 져주시는 예수님



스스로 져 주시는 예수님

 

김춘도 장로(광나루교회)

20141122()

 

 

각 나라 국민은 나름대로 다른 나라 국민들과 비교되는 특성을 지니고 살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국민성이라고 합니다. 한 예로 이탈리아 국민은 다혈질적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성격과 비슷하여서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를 재미있어 합니다. 반면에 영국은 몇 개의 잉글리시, 아이리시, 웨일스, 스카티시와 같은 다른 종족이 모여 살아서 그런지 각 종족의 특징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잉글리시는 영국에서도 성격이 별로 좋지 않다는 평판을 지니고 있으며 겉으로는 점잖은 척을 하지만 항상 남들의 위에 올라타려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들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예외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국민성을 특정지우는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그 요소 중의 하나는 유난히 흑백논리가 강하다는 것에는 많은 분들이 공감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쇠고기 파동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한 치의 양보 없는 대결을 벌이고 특히 정치적 성향에 관하여 우파, 좌파로 나뉘어 상대방을 무시하고 스스럼없이 상대방을 향하여 언어의 폭력을 사용하여 자기 의지를 관철하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어떻게 좌우로만 재단(裁斷)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양한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좌우파로 나누어 놓고 벌이는 소모적 논쟁이야말로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냉전 강경세력들은 상대방을 종북주의자라는 근거 없는 낙인을 찍어 자기편의 완승을 꾀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는 종교 안에도 존재하는데 종교 간의 대결도, 한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종파간의 대결도 상대방 교단을 이단이라고 따돌리면서 극한으로 달리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이런 각박한 현실을 지켜보면서 어른처럼 한발 나아가서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듯한 여유있는 행동이 그리워집니다. 상대방에게 져줌으로서 함께 이기는 싸움 그것이 곧 함께 평화를 이루는 비법일 듯합니다. 역사 현실에서 다툼은 완전히 배제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사는 다툼의 일로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다툼이 서로 상처를 내고 공멸하는 비극으로 치닫는 대신 인간적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길로 나아가게 하려면 멋지게 지는 성숙한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특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과 뭔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이용하여 상대방을 이기려 하는 극단적인 태도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 사랑의 성품을 닮아서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른바 윈-윈의 전략이 되어야합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이방 여인의 딸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이하여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첫 말씀이 예수답지 않아 놀라고 이방여인의 재치 있는 믿음의 대응에 굴복하시는 흐뭇한 예수의 모습에 더욱 더 놀라게 됩니다. 이방 여인의 대응에서 믿음의 아름다움과 힘을 새삼 느끼게 하여 줍니다.

 

예수는 당시 가장 신성한 제도로 강요된 정결법에 정면 도전하셨습니다. 그 결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부터 끈질긴 공격을 받으셨고, 그 결과 그들이 만든 함정을 지혜롭게 피하면서도 당당하게 인간이 법과 제도의 주인임을 선포 하셨고, 위선적이고 억압적인 관례와 제도에 끊임없이 도전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는 피곤하셨는지 잠시 두로라는 지역으로 물러나 조용히 기도하면서 쉼을 얻으시려고 합니다. 그곳은 시리아의 땅으로 유대인들을 피하여 잠시 이방인의 땅으로 쉬려고 가십니다. 고향 땅에서 헤롯왕의 세력과 친로마 유대인 세력에 심지어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셨던 예수는 쉼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집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번 경우는 예수님의 성품까지도 의심을 받게 만들어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성경을 공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한 이방인 여인이 예수를 찾아와 귀신에 들린 자기 딸의 이야기를 하면서 도움을 청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가 두로에 와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딸의 병을 낫게 하고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여인에게 너무나도 냉랭하게 대응을 하시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값진 교훈과 깨달음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의 거친 모습에 주목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친근하게 여기고 절대적 사랑을 보여주시는 예수의 인자(仁慈)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지독히 배타적인 예수를 보게 됩니다. 자기 딸을 고쳐달라는 불쌍한 헬라여인의 간청을 이렇게 거절하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이 말씀은 한국인으로 예수님의 사상을 알고 배우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 귀를 의심하게 합니다. 유대인도 아닌 한국 사람이 한때는 백인의 종교로 알고 있었던 기독교를 믿어야 하나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을 갖게 만듭니다. 또한 지극히 인종차별 주의자의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자녀란 선민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다른 이방인들은 모두 졸지에 개들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모두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로서 동등하다는 기본적인 가르침의 믿음이 와해되는 순간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문장을 해석하는데 고민 끝에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개나 다른 가축에 앞서 자기 자녀를 먹여야한다는라는 상식을 예수께서 인용하였다고 하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은 이의 의견에 동의를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성경이라는 틀에 올린다는 것조차 좀 유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예수의 동족(同族)인 유대인을 먼저 돌보아 고쳐주고 다음에 이방인 환자를 돌보겠다는 뜻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것을 구태여 부당한 것으로 보기 힘들고 동족애의 표현으로 볼 수 있기도 해서 참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국인 우리가 이런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는 다시 생각하여 보여 질 것으로 보여져 우리의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으로 생각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개에 대한 인식은 별로 좋지 않게 성경에 인용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게 보는 것은 어느 문화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구약에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에 세상의 모든 동물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이들을 다스리고 생육하라고 하신 뒷배경을 본다면 이런 말씀도 사족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런데 성경에는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는 일반 개들이 아니고 난폭하게 구는 개로 보는 것이 타당하여 보입니다. 다만 그 당시에 동족에게도 시달리시던 예수가 조용히 쉬고 있는데 이를 귀찮게 한 헬라 여인에게 신경질적으로 대응 하셨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갈 일도 아닙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셨으니까요.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런데 지극히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헬라여인은 정말로 뜻밖의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예수의 신경질적이고 잔인한 말씀에 이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그렇습니다. 저는 개와 같은 존재라고 이를 시인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어찌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이 여인의 대응이 공격적인 발언으로 이루어졌다면 모두가 공격적으로 되어 결국은 둘 다 모두 패하는 모습이 됩니다. 이 여인은 자기비하를 통하여 예수와의 대화를 이어갑니다. 스스로 개요 부스러기를 얻어먹어 마땅한 존재임을 차분히 시인하면서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른 최초의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헬라 여인의 깊은 믿음과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녀의 귀신들린 딸을 고치려고 하는 믿음과 자녀에 대한 사랑은 그녀가 입는 정신적 상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는 이 이방 헬라인의 자신의 딸을 향한 사랑에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마침내 딸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또한 여인의 깊은 사랑에 주목을 합시다. 여인이 보여준 여러 놀라운 자질 즉 겸손, 인내, 믿음, 재치 등이 여인의 깊은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놓치지 않아야합니다. 마침내 헬라 여인은 참으로 부드럽게 예수를 이겼습니다. 예수와의 논쟁에서 승리한 최초의 인간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예수가 져 준것이겠지요. 저는 그래서 이런 예수가 정말 좋습니다.

 

 

멋진 패배가 가져온 치유의 기적

 

이제는 눈을 예수께 돌려봅니다. 대단한 논객이었던 예수는 한 번도 진적이 없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마귀와의 논쟁에서도 이기신 분입니다. 세금 문제로 논쟁을 걸어오는 바리새인들에게도 이기셨지요. 영생에 대한 문제로 예수를 시험한 율법학자에게는 선한 사마리아 비유로 크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으로 논쟁이 벌어지자 장엄한 인권선언을 함으로써 대적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아무도 당해 낼 수 없는 논객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잘 것 없는 이방인 여인에게 지고 맙니다.

예수는 스스로 지셨습니다. 멋지게 패하셨습니다. 그 분의 멋진 패배가 엄청난 치유의 효과를 낸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멋지게 지는 것을 보기가 극히 어려운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멋지게 지게 되면 이긴 자도 겸손하여 집니다. 그런데 교회 안팎의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아름답고 배려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는 정치 갈등, 나이 갈등, 지역 갈등, 노사 갈등, 남북 갈등 사이에서 오만한 완승을 행하여 미친 듯이 질주하는 탐욕의 목숨들이 아닙니까? 약자를 향하여 문이 열려 있어야 하고 약자를 이해해야 하는 교회가 강자의 승리를 즐거워하며 앞에 나서서 이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생기며 도망가고 싶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열고 비우고 짐으로써 모두를 채우시고 이기게 하신 치유의 예수, 그 분의 놀라운 구원 행위가 너무나 그립습니다. 예수의 이 멋지심을 개인의 삶, 교회의 삶, 민족의 삶속에 우리가 실천 할 수 있다면 서로를 건강하게 하는 기적에 일어날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교인들 안에서는 우아하게 서로 져주는 지혜, 서로 지는 믿음, 서로 지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조차 예수님을 이용하여 남의 이해에 상관없이 내 것 만을 추구한다면 그 교회는 귀신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예수의 몸이 아니라, 탐욕의 귀신에 사로잡힌 마귀의 몸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추악한 다툼과 분열이 거듭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패하셨던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치유하여 주십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온갖 고통의 족쇄에 매인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은 바로 스스로 멋지게 지신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멋진 패배자 예수를 우리는 늘 가슴에 사모하며 우아하게 지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참된 평화와 사랑의 공존이 펼쳐지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나는 이런 예수의 절대적 사랑을 통하여 예수의 성품을 배우게 됩니다.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