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전의 두번째 상태는 공허라는 현상이다.
텅 비어있음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오신 한 지성인과 삼년정도 함께 지낸 동안에 우린 서로간
셀수도 없는 농담과 유모어를 즐기며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가 내게 하는 말이 "사물에 대한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했다.
대뜸 내가 한말은 당신은 젊은 날에 오직 공부만을 하다가 머리가 충만해서
더 들어가지 않는 까닭이요 나의 머리는 젊은 날에 거의 깡통수준에 달할만큼
공부를 하지 않아서 텅 비어있음 때문이오 그래서 그 흡인력이 강한것이
라 생각한다고 대답을 했더니 그분이 사람들을 만날때 마다 나를 소개하며
머리가 텅비어있는 사람이니 무슨 말이든지 잘 이해할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가리키며 이 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는 말씀을 하실때에 염두에 두신 의미가 어린아이의 순진함 보다도 어린아이의 텅비어있음이다.
의식이 담겨있지 않는 시절의 어린아이는 어디로 가든지 그 적응력이 강하다,.
늑대가 데려가면 늑대 소년도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누기에 가장 좋은 상태는 섞여 있음이고
채우기에 가장 적당한 상태는 비어 있음이며
빛이 가장 환하게 비추일 수 있는 상태는 어둠이 깊은 샹태이다.
죽어있지 아니하면 부활이 가능하지 않음처럼
침례는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서 먼저 물속에 장사됨 (잠김) 이
있어야 하고 그런후에 그 속에서 올라오는 부활의 의미가 있는것이다.
처녀성 또한 텅 비어있음이다.
심리학자들은 그 처녀성은 제일 먼저 접촉하는 남자의 육체로 채워지게 되고
그가 그 여자의 유일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복음서에는 의원이 동네에 왔을 때
아픈 병자들만 모여들고
생명의 떡이 오셨을때 뱃속이 텅 비어있는 자들만 모여들었다.
생명의 강이 오셨을 때 목마른 자들만 모여든것처럼.
아프신가
배고프신가
목마르신가
그렇다면 그분이 당신 가까이 계신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나는 십일조를 철저히
계산해서 드리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분에게 닥아서지 못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얼굴을 쳐들지 못하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 세리에게
갈 수 있었던 까닭은 의인은 죄인에게만 필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의인과 죄인을 행동의 발상으로 끌고간 일이 없다.
그러나 언제나 사단은 그 의롭다는 것을 행동의 발상으로만 끌고가려
한다. 그것을 교만이라 하는것이다. 높음이 낮음에만 이를 수 있으나
사단은 늘 높음을 가르친다.
율법을 주신 분과 왜 주셨는지를 알지 못하고 율법의 내용만
알게 되면 이런 교만에 쉽게 이를 수 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지 않는것 처럼
죄인이 자기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절규를 이해해야 한다.
사랑이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이 없는 텅비어 있음이어야 하며
동시에 그 사랑이 그리운 목마름이어야 한다.
기도는 죄인의 특권이며
의인의 특권이 아님을 아시겠는가
의인과 의인의 만남은
적어도 성경의 진리대로라면 불가능하다.
남극과 북극이 만날 수 없음처럼.
오직 죄인되지 아니하면
오직 죄인이라 날마다 깨닫지 아니하면
의인은 결코 오시지 아니하신다.
오신것처럼 착각할 수는 있어도.
우리는 백로가 될 수 없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행동의 여러가지 발상과 행함으로
백로가 될 수있다면 다윈의 진화론이 승리하는 것이다.
원숭이는 원숭이일 뿐이다.
그러나 백로는 가마귀들이 모인곳으로 오셨다.
그 중에서 자신들의 검은 들판으로 오신 백로의 순백과 순결앞에서
가슴을 치고 통곡한 가마귀들이 있었다.
그 가마귀들에게 백로의 집 (교회) 을 맡기고
가신 그 백로는 여전히 가슴을 치고 통곡하는
가마귀들을 데리러 오실 것이다.
제발 그분이 오실때에 그대가 흉내를 내어본
그 허여멀금한 색갈들은 숨겨야 한다.
겸손한 자는 겸손한 흉내를 낸자들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자
목이 마른자
마치 죽은자 처럼 ego (자신을 의식함) 가 잠들어 있는자를
말함이다.
그가
채움을 당하게 되면
비어있는 자에게 채워주는 분을 소개하게 되고
그가
생수를 마시게 되면 그 생수를 소개하는 자가 될 것이다
아브람과 사래의 생식능력을 텅비게 하시고
마침내 웃음의 아들을 충만하게 채워 주신이가
우리의 생식기 (의를 만들어 내는) 가 텅 비어있기를
원하신다.
그런면에서 마리아는 텅 비어있던 자궁이었다.
충만을 잉태할 수 있는.
거룩한 자궁이 아니고
마음대로 하시라는 텅비어있는 자궁이었다.
거룩한것에서 거룩한것이 시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텅비어있는 믿음의 여인이지
성모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대
텅 비어있는가
아니 공허를 깨달으시는가
곧
충만케 될 것이다.
창조도 구속도 같은 맥락의 신학이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