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없는 나라 60주년 기념사

by 로산 posted Feb 10, 2011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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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십니꺼


2011.02.10.목요일

산하

 

 

 

1951년 2월의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도 설은 돌아왔습니다. 전란 중이지만 설은 설이라 차례도 지내고 식구들끼리 모여 막걸리라도 추렴해서 들이키며 명절 분위기를 냈겠지요. 그러나 그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았을 음력 정월 초사흘 양력 2월 9일, 상상도 못한 죽음의 사자들이 발을 맞추어 신원면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틀 전 정월 초하루에 이미 신원에 들어왔던 11사단 13연대 병력은 적정을 찾지 못하고 일부 병력을 남긴 채 산청으로 이동했어요. 그런데 이 잔류 병력들이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남부군이 공격을 가해 면사무소와 경찰 지서를 불태워 버리는 일이 벌어졌죠. 이에 바짝 열받은 연대장 오익경 대령은 3대대장 최동석 중령에게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립니다.
 
명령은 세 가지였어요. “공비 근거지가 될 가옥 소각” “식량 확보 및 불가능시 소각” 그리고 또 하나의 건조한 한 마디. “작전 지역 내 인원 전원 사살.” 연대장에게 조인트를 까인 대대장은 중대장들을 다그치고 중대장들은 휘하 병력들을 닦달하면서 3대대는 독이 잔뜩 오른 채 신원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망라한 76명의 민간인을 총살함으로써 3일간의 거창양민학살의 끔찍한 서막이 올라요.

 

학살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


2월 10일(60년 전의 오늘이 되겠지요.) 탄량골에서는 106명, 11일에는 신원국민학교에 수용된 인근 부락 민간인 519명이 국군의 총탄을 온몸에 박은 채 널부러진 뒤 휘발유 뒤집어쓰고 불태워집니다. 군경가족을 제외한 전원, 어린 아이에서 호호백발의 노파에 이르기까지 미친 군대의 총질이 사정을 봐준 사람은 없었어요.

탄량골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임분임 할머니에 따르면 군인들이 빙 둘러서서 총을 겨눴을 때 어떤 남자가 손을 들고 외쳤다고 합니다. “대장님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말 한 마디 하고 죽읍시다.” 죽음을 예감한 이의 절망적인 외침이었죠. 순간 총살 신호를 내리려던 장교의 손도 멈칫했을 겁니다. 애끓는 목소리가 이어졌습니다.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십니꺼”
 
너희 따위 백성은 필요 없다는 듯, 너희 따위는 없어지는 게 나라에 이롭다는 듯 엠원 소총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습니다. 군경가족이 아니면 다 통비분자라는 어처구니없는 분류에 의해 “전원 총살”의 대상이 된 주민들은 순식간에 시체가 되어 땅에 나뒹굴었고 군인들은 조명탄까지 터뜨려가면서 확인사살을 했다고 해요. 그리고는 나뭇단을 가져다 놓고는 몇 시간 전만 해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 주고받으며 웃음 지었을 육신들을 깡그리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후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대한민국 국군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가 만천하에 공개되지만 이승만은 “부끄러운 치마폭은 외부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사건을 덮고자 합니다. 학살의 주범들 모두를 형집행정지로 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국회 조사단에게 총질을 했던 김종원을 되레 경찰 간부로 특채를 하고 사건의 최고 책임자라 할 국방장관 신성모는 주일 공사라는 최고의 땡보직으로 옮겨 버립니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그 누구도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았어요, 그게 우리 나라였습니다. 높은 사람들 눈에 백성이란 안 되긴 했지만 작전상 죽어 줘야 할 지푸라기들에 불과했고 수백 명 정도는 적성분자로 몰아 죽여 없애서 본보기로 삼아도 아무 아플 것이 없는 나무토막들이었던 겁니다. 그게 대한민국, 백성이 국호의 일부로만 존재할 뿐 누구의 염두에도 없던 나라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러 거창 양민학살은 올해로 환갑을 맞습니다. 그 해도 올해도 신묘년입니다. 그 60년간 우리는 실로 신묘한 변화를 일구긴 했어요. 이디오피아가 동정하던 세계 최빈국이 G20을 개최하는 대단한 국격의 나라로 부상하고 전광석화와 같이 해적들을 제압하여 뭇 세계의 찬탄을 받는다는 파워풀 코리아가 되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하나 신묘하게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건 높은 분들이 백성을 바라보는 눈길입니다. 그들이 백성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또 그들이 요구하는 백성된 도리입니다.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흙 속에서 발버둥치며 죽어가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한 축산농들이 자살하는 판에 농림부 간부라는 사람이 “기본 소양을 갖춘 자만이 축산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걸 들으면서, “보상금 받아서 동남아 가는 축산농”을 질타하는 장관을 바라보면서 “일부 억울한 사람들은 있을 수 있지만 사망자들은 공비와 내통하는 통비분자”라고 강변하던 60년 전의 군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석 선장이 우리 해군 총에 맞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우리 사회의 신뢰를 실추시키고 갈등을 부추기려는 간첩의 소행이나 다름없다는 의견이 있다”면서 빨간 물감 든 물대포를 인터넷의 바다에 뿌려 보려던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의 발언은 글자 몇 개 바꾸면 60년 전 당시의 신성모 국방 장관의 주장에 거의 그대로 갈음됩니다. 신성모는 “양민학살은 사실 무근이다. 공비와 내통했기 때문에 즉결처형했을 뿐이다.”라고 주장했고 이어서 “국군의 치부가 드러나면 국민들의 불신감이 증폭되며 외국의 원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기상천외한 협박을 감행했었거든요.
 
“백성이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에 닿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생명력만큼은 참담하게 인정해 줄 만합니다. 백성을 졸로 보고, 또는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나라의 맥은 이리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무고한 백성 수백 명이 군대 손에 몰살을 당한 사실을 앞에 두고도 “님자들 치마폭은 남에게 보이는 게 아니라고.” 를 뇌까리며 무표정하게 눈썹을 떨던 노인을 ‘건국의 영웅’으로 찬미하고 그 동상을 광화문 네거리에 모셔야 한다는 아우성 드높은 나라에서 과연 백성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그 동상을 세우자는 사람들은 대관절 백성을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요.
 
2011년 2월 9일 한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은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 동안 도와 준 것에 감사”하면서도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그러니 남는 밥과 김치가 있으면 문을 두드려 주십사” 부탁한 병든 작가의 메모는 유서가 되어 사람들의 눈가를 후벼 팝니다. 

 

故 최고은 작가


2011년 2월 9일 아무리 따뜻한 고장이라고는 해도 칼바람 체감 온도는 어디 못지 않은 부산의 크레인 위에서는 한 중년 노동자가 수십일 째 농성 중입니다. 

2011년 2월 9일 한 달 식대 9천원 (하루가 아니라 한 달)을 받던 대학의 미화 노동자들은 지금도 농성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고 2-30대 젊은이들의 가장 주된 사망 사유는 자살이란 트윗이 양미간을 좁힙니다.  

2011년 2월 9일 매값을 주고 방망이를 휘두른 재벌가의 일원이 “훈육 차원”에서 열 한살 위의 노동자 엉덩이를 때렸다는 말을 변명이라고 늘어놓았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하지만 그런 나라의 대통령은 “이 나라는 복지 국가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기염을 토하며 G20을 개최한 나라의 국격을 드높이자면 “생활수급자들 술이나 퍼먹지 말고”, “노후는 국가가 개입할 것이 아니라 각 가정이 책임져야” 한다며 그 휘하 관료들은 노래합니다.
 
백성 없는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냐던 질문이 벌집이 되었던 양민학살 시작의 날인 오늘, 저는 60년 전에 비해 조금은 달라졌지만 대차가 없는 한 질문을 입 밖으로 토해 내게 됩니다.

 

“국민의 격이 이렇게 천박한 나라의 국격이란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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