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년시절-마르지 않던 어머니의 눈물(장도경.카스다펌)

by 카스다펌 posted Nov 26, 2014 Likes 0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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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이 신앙윤리적 논쟁으로 너무 삭막해지고 있으니

소설같은 내 어린시절의 이야기 하나 끼워넣고

뉸요기 내지는 방향전환을 좀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다.


여기에 아무개 목사는 삼형제가 있다하고

또 이런저런 내 글들에 "민초논객"  하면서 운을 띠우던 분이나

서모 목사까지 다 형제분들이 있는 분들이다.


사립학교 미술교사로 전전하시던 아버지와 

공립학교 음악선생으로

전전하던 부모 사이에 우리집도 삼형제가 살았었지만 

부모님이랑 온 가족이 다 함께 살아가던 날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십오년전

형이 열두살이고

내가 아홉살

그리고 내 동생은 네살이었다.


경남 밀양 가까이에 무안이라는 곳이있다.

무안중햑교에 음악선생으로 발령이 난

어머니를 삼형제가 졸졸이 따라갔다.


형은 어린시절 부터 음악과 공부를 아주 잘했고

키도 또래의 아이들보다 머리하나는 더 커서

부모님과 주변에서 대단한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런 형을 시골아이들 (두세살 위의) 이 사사건건

미워하고 시비를 걸며 괴롭혔다.


교회가 없는 곳이지만 이따금씩 문서전도하시는 한분

(나중에 목사 안수를 받으시는) 이 오셔서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추운겨울 그날은 오시지 않아서

네살박이 동생을 집에 두고 형과 나는 썰매를 만들어

동네 웅덩이에 썰매를 타러갔다.


웅덩이 가상자리엔 얼음이 두껍지 않아서 위험한 곳들이 있었다.

그런데 동네 나이많은 아이들이 몇이서 형의 썰매를 거기로 몰아부텼고

결국 얼음물에 형이 빠지게 된다.


좀 미안하게 생각한 그 아이들이 웅덩이가 있던 논둑에 쌓여있는 집단을

가져와서 불을 지피고 형을 옷입은채로 말리려고 시도했다.


앞쪽으로 다 말리고 뒷쪽으로 돌아서서 말리다가

형의 옷으로 불이 옮겨 붙었다.


내복을 입고 그 위에

미군 군복을 줄여서 입고 있었는데

미처 옷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그 옷으로 삽시간에 불이 붙었다.

어둑어둑하던 저녁시간이라 그 불덩이는 논둑의 이곳저곳을

마치 볼놀이 하듯이 뛰어다니는데 워낙이 힘이세고 빠른 형을

아무도 붙잡고 불을 끌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불이 온몸의 모든 옷가지를

다 태우고 난 다음 시꺼먼 나무 막대기가 된  물체가 논둑에

털썩 드러눕는다.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갔지만

백일정도의 기간에 별로 할일은 없었고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뭉그러진

몸뚱아리를 건조시키고 껍질에 약을 발라주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위해

모든것을 하고싶은 어머니는 그야말로 있는것 없는 것

다 팔아서 정성을 드리지만

병원에선 더 할일이 없다고 집으로 돌려 보낸다.


형이 돌아오고 건조대를 세운 아랫목에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형을 눞혀놓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한약을 다리고 계셨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약의 이름

"삼기룡탕" 이라는 것이다.


한약을 끓이는 불을 지피는 어머니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늦은 저녁 시간에 형은 조용히 방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십년이 넘도록

한밤중에 일어나셔서 마치 지진에 흔들리는 것처럼

오열하며 한두시간 눈물을 흘리시다가 

잠이들곤 하셨다.


미처 철이 들지 못했던 둘째 아들의 

마음에 밤이면 밤마다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던 어머니의 눈물을 등뒤에서 느끼며


나는 이런 독한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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