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뼈
기형도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 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 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 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가
각자 일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 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주) <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nann Wittgenstein 1889~1951)은
"언어는 삶의 문맥에 따라 다양하다“고 했다.
강의실의 언어, 종교의 언어, 과학의 언어, 교회의 언어, 시장의 언어, 이 게시판의 언어...
이 모두가 같은 말이라도 그 삶의 문맥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삶의 자리와 환경을 고려해서 이해해야 한다.
재래시장 국밥집의 욕쟁이 할머니의 언어와 교회에서의 언어를 혼동하면 안 되고,
종교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를 혼동하면 안 된다.
이 게시판에도 나름의 언어의 용례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욕쟁이 할머니의 국밥집 언어는 국밥집 언어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다른 언어로 간주해서 법정으로 끌고 가면 한편의 코메디가 될 것이다.
민초 미장원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재춘이행님의 투박한 언어,
시골 촌놈님의 음엉한 언어,
삼천포 할아범의 삼천포 언어,
미장원 김씨 아줌마의 다감한 언어를 모르면
희대의 코메디언이 탄생한다.
이 언어사용의 규칙이 무너지면
마치 상처를 뚫고 튀어 나온 뼈처럼 ‘소리의 뼈‘가 드러난다.
이럴 경우 우리는 자신들이 사용해 온 언어가
얼마나 맹목적으로 사용되어 왔는지 자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일상에서는 뼈의 존재를 모르다가
몸살이 나서 온 몸의 뼈가 쑤시는 아픔이 오면
그제야 말을 멈추고 자신의 뼈의 존재를 인식한다.
어쩌면 우리가 서로의 소리의 뼈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김교수님과 같이 침묵의 강의가 필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말할 수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비트겐슈타인
그것은 말로는 깨달을 수없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