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과 다른 교리를 가지면

by 민들레 posted Nov 30, 2014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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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사도신경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몇몇 독립적 침례교회들과 그리고 여러 이단들이 사도신경을 거부한다.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에서 그들이 사도신경과 다른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면 당연히 이단이다.

물론 사도신경 자체가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원래 이단을 분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암송하는 한글 사도신경은 매우 훌륭하게 번역된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신앙고백으로서 손색이 없다. 사도신경에 대한 비난과 그 문제점을 살펴보자. 사도신경은 현재 주기도문과 더불어 공식예배의 암송과 회중기도로 사용되고 있다.

1. 초대교회 때에는 없었다는 견해에 대하여

물론 초대교회에 지금과 똑같은 사도신경은 없었으며 물론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유래된 것이다. 우리 개신교에서 오직 인정하는 신조가 4개가 있는데, Apostle's Creed(사도신조),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Definition of Chalcedon(칼케톤신조), The Athanasian Creed: Quicumque vult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이다.

아래는 니케야-콘스탄틴노플 신조이다.

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
Forma Recepta Ecclesiae Orientalis. A.D. 381
이정석 역
Credimus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factore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Et in unum Dominum Jesum Christum, Filium Dei unigenitum, natum ex Patre ante omnia saecula, Deum de Deo, Lumen de Luminequem, Deum verum de Deo vero, natum [genitum], non factum, consubstantialem Patri; per omni facta sunt; qui propter nos homines et [propter] salutem nostram descendit de coelis 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ine et humanatus [homo factus] est; et crucifixus est pro nobis sub Pontio Pilato [passus] et sepultus est; et resurrexit tertia die [secundum scripturas]; ascendit in coelum [coelos], sedet ad dexteram Patris; interum venturus, cum gloria, judicare vivos et mortuos; cujus regni non erit finis.
Et in Spritum Sanctam, Dominum et vivificantem [vivificatorem], ex Patre [Filioque] procedentem, cum Patre et Filio adorandum et conglorificandum, qui locutus est per sanctos prophetas. 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 Confitemur unum baptisma in remissionem peccatorum. Expectamus resurrectionem mortuorum et vitam futuri saeculi. Amen.

우리는 천지의 창조자이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만드신 한분의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중의 신이며 빛중의 빛이고 참 신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으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와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받아 인간이 되었고,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받았읍니다. 그는 고난을 받고 장사되었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읍니다. 그리고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 생명의 부여자와 주님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거룩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사도적인 세계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주시는 하나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립니다. 아멘.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이라는 단어에서 원래 ‘신경’(Creed)라는 단어는 CREDO(내가 믿는다)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것이 381년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로서 확증된 것이며, 이것을 부정하면 이단으로 분류하는 공식입장을 재확인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교단들은, 그러한 용어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사상과 교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거부를 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2. 하나님 홀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적인 문맥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니케야-콘스탄티노플 신조도 잘못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우리는 천지의 창조자이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만드신 한분의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구약의 엘로힘이 복수명사이기 때문에 삼위의 창조를 뜻한다고 해석한다면, 신약에서 데오스가 단수이기 때문에, 신약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말하는 구절은 모두 오류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구약에서 엘로힘이 한분이라고 하신 수많은 구절은 모두 오류인가?
삼위일체에서 삼위는 인격적인 복수를 말하는 것이며,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히 한분을 말하는 것이 당연하며, 한분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고 하여 오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3. 외아들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외아들이라고 하면 딸도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렇다면 아래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첫아들이라고 하였으니, 다른 딸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이 되는가?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

또 아래 성경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더 있다고 해석하여야 하는가?

“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히 1:6)

4. 동정녀에 대하여

“동정녀 마리아”라는 단어는 예수를 낳은 후에도 동정녀였다는 가톨릭 교리를 전혀 증거하지 않는다. 사도신경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으시고”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와 처녀에 대한 단어풀이는 안티기독교인들의 전용수법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마태복음의 임마누엘에 대한 기사는 구약의 이사야7장의 말씀을 상기시킨 것인데, 임마누엘이란 뜻은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다. 임마누엘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주실 징조로써 처녀가 낳는다고 예언한 아들의 이름이다. 마태복음 1:23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임마누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비판이 있다. 이러한 비판은 자유주의신학에서의 비판이 있으며, 또 이단들의 비판이 있다. 이들이 힘을 합하여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첫째는 구약의 “젊은 여자”(처녀)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동정녀”(처녀)의 개념으로 부적절하게 번역되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사야에서의 임마누엘과 처녀가 신약에서 예수와 마리아로 해석되어지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첫번째 비판은 19세기 초, 쉬트라우스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제기된 주장으로서, 알마(almah, 젊은 여자)라는 히브리 단어가 70인역에서 헬라어 파르테노스(parthenos, 처녀)로 번역된 것에 근거하여 잘못 오역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쉬트라우스의 주장을 정리하여 보자면, 마태복음에서 사용된 남자를 경험하지 못한 동정녀(virgin)를 뜻하는 헬라어 “파르테노스(parthenos)”는 히브리어 “베툴라(betulah)”로 번역해야만 정확하고, 이사야서에서 사용된 아이를 낳은 여자도 포함하는 “젊은 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알마”(almah)라는 단어는 헬라어 “네아니스(neanis)”로 번역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사야7장4절의 “처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알마”로서, 그 단어는 “처녀”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젊은 여인”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그것이 70인역에서 오역되어서 처녀를 의미하는 파르테노스로 번역되었고, 그 오역으로 인하여 마태복음의 기자 마태도 역시 처녀(동정녀)라는 뜻을 가진 파르테노스로 번역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불신자, 자유주의신학자 그리고 반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상용적인 수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공식화된 고등비평의 대명사로서 사용되어지고 있다.

먼저 이 주장이 사실인가 아닌가 살펴보자.

히브리어 “알마”의 경우 ..... 그 단어가 “젊은 여인”을 뜻한다는 것을 옳지만, 그 단어가 결혼한 여인에게도 사용된 적은 없다는 것이며, 특히 아이를 낳은 여자도 “알마”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성경에서 “알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내가 이 우물 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알마)가 물을 길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하여....”(창24:43).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알마)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출2:8).

“소고 치는 동녀(알마)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시68:25).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알마)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1:3).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알마)가 무수하되”(아6:8).

성경에서 “알마”라는 단어는 결혼한 여인 혹은 아이를 낳은 여인에게 사용된 적은 없다. 히브리어 알마를 히브리어 사전에 찾아보면, 젊은 여자라는 뜻도 있지만, “처녀 혹은 소녀”라는 뜻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젊다”는 개념을 가진 처녀로 사용된 것으로 보면 큰 이상이 없다고 생각되어지며, 물론 결혼한 여인에게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베툴라”라는 단어에 대해서 살펴보자.

“베툴라”라는 단어는 “분리되다”는 어원을 갖고 있으며, 남자로부터 분리된 처녀를 의미하며, 그것은 남자를 모른다는 개념, 즉 “처녀, 동정녀”를 의미한다. 특히 구약의 율법에서 처녀성을 확인하는 율법이 언급되는 본문에서는 “베툴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진다.

그런데 오히려 베툴라라는 단어가 “분리된다”는 개념의 “남자를 모른다”는 그 어원적인 개념으로 말미암아, 남편이 죽은 과부(욜 1:8)를 의미하기도 한다.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베툴라)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지어다”(욜1:8).

번역본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이라고 되어 있지만, 성경원문은 “젊었을 때의 남편”이라고 되어 있다.(나우르 바알: 젊은 시절의 남편)
또 “파르데노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전을 찾아보면, 동정녀, 처녀가 분명하지만, 결혼적령기의 여인 혹은 정혼한 여인에게도 사용되어진다. 헬라어 사전을 찾아보면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여인에도 사용되고, 정혼한 여인, 혹은 결혼 직후의 여인을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파르데노스)에게 이르니 그 처녀(파르데노스)의 이름은 마리아라”(눅1:27).

사실 젊은 여인과 처녀에 대한 엄격한 구별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창24:16을 보자....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베투라:처녀)더라 그가 우물에 내려가서 물을 그 물 항아리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창24:16).

그 여인은 동일한 훗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결혼을 하게 되는 리브가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감을 찾기 위하여 그 고향에 간 장면이다.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성적관계가 없는 처녀를 말할 때에는 당연히 “베투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진다. 그런데 동일한 여인과 동일한 조건에서 그 베투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알마라는 단어로 사용된 적이 있다.

“내가 이 우물 곁에 섰다가 청년 여자(알마)가 물을 길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하여....”(창24:43).

창24:43은 아브라함의 종이 창24:26의 사건을 라반에게 그대로 다시 설명하는 장면이다. 베투라와 알마가 동일하게 사용된 증거이기도 하다. 개역성경은 성경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기 위하여 “청년 여자”라고 번역하였으며, 공동번역은 “혼기가 찬 여자”로, 현대인의 성경은 “처녀”로 번역하였으며 표준 새번역도 “처녀”로 번역하였다.

[공동번역] 지금 제가 샘터에 서 있는데, 혼기가 찬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오면, 항아리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게 해 달라고 말을 걸어 보겠습니다.

[현대인의성경] 내가 이 우물 곁에 섰다가 처녀가 물을 길으러 오면 항아리의 물을 좀 마시게 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표준새번역] 제가 여기 우물 곁에서 있다가, 처녀가 물을 길으러 오면 그에게 항아리에 든 물을 좀 마시게 해 달라고 말하고....

즉 베투라와 알마는 리브가에게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며, 다시 말하여 서로 구별되어지는 단어가 아니라, 호환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같은 처녀를 의미하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베투라는 남자를 모른다는 “분리적” 개념이 강조되고, 알마는 “젊다”는 개념이 강조된다.

성경에서 그러한 증거는 매우 많다.

“너로 남자와 여자를 부수며 너로 노년과 유년을 부수며 너로 청년과 처녀(베투라)를 부수며...”(렘51:22).

이 성경본문은 남자와 여자가 대조되고, 노년과 유년이 대조되어진다. 그렇다면 청년과 처녀가 대조 되어지는데, 청년(히브리어: 바후르)은 결혼하지 않은 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남자를 의미하며, 그렇다면 처녀는 “젊은 여자”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에서 보면 당연히 “알마”가 사용되어져야만 하는데 이번에는 “베투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즉 본문은 성적관계의 유무와 아무 관련이 없다. 단지 젊은 청년에 대조되는 젊은 여인의 의미인데도 불구하고 베투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알마와 베투라라는 단어는 정해진 용법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호환성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그러한 단어적인 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본문이 의미하는 것은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사야 본문은 “주께서 주시는 징조”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유의하여야 한다. 만일 알마라는 단어를 처녀가 아니라, 일반적인 젊은 여인을 뜻한다고 해석하여 보라. 일반적으로 젊은 여인이 아기를 잉태하였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징조가 될 수 있는가? 혼기를 앞둔 젊은 여인들은 항상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특별한 징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징조란 히브리어로 “오트”로서 신호, 상징, 기적을 의미한다.
그 본문은 그 아기가 주님께서 주시는 징조라는 것이며, 그 이름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젊은 여인이 낳은 아기는 특별한 상징이나 기적이 되지 못하며, 더욱이 어떤 아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5.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에 대하여

이 영어문장은 ‘under Pontius Pilate’ 이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번역은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가 맞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문장이 틀림을 말하지는 않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 당시 실질적인 책임자였으며, 모든 것이 그의 통치하(下)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빌라도는 실제적으로 예수께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에게 채찍질을 하고 고난을 주었으며, 군중들의 압력에 못 이겨 바라바를 놓아주는 비열한 인간이었다. 과연 빌라도가 무죄한가? 빌라도가 누구였는가?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눅 13:1).

저희의 우상의 제물을 위하여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제물로 바친 자가 바로 빌라도이다. 즉 빌라도가 무죄하다는 사람들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더욱이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직접 받은 적이 없으므로, 사도신경을 부정한다는 것은 이상한 주장이 된다.

6. ‘거룩한 공회가 가톨릭교회’라는 견해에 대하여

사도신경의 가톨릭은 현재의 가톨릭교회를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사를 모르는 무지한 주장이 된다. 그 당시 초대교회는 이단들에 대하여 구별된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Catholic Church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그 의미는 ‘보편적인 교회’ 혹은 ‘일반적인 교회’ 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다.

그 당시 이단들이 너무나 성행하였고, 그 이단들의 교회와 구별하기 위하여 ‘보편적인 교회’ 혹은 ‘일반적인 교회’라고 명칭을 붙였던 것이다. 그 당시 초대교회는 종교개혁이 있었던 시기가 아니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별이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것을 거룩한 공회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곳에서 ‘공회’라고 번역된 단어는 지금의 가톨릭교회나 교황권의 공의회를 말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 교회란 헬라어 ‘에클레시아’로서 부르심을 받은 회중을 말하며, 히브리어 ‘카알’로서 ‘하나님의 회’, ‘여호와의 회’라고 이미 성경에 번역되어 있다(렘 23:18, 22).

또한 헬라어로 교회란 ‘에클레시아’로서 에크(···로부터)와 클레시아(불러내다)라는 말의 합성어이며, 즉 하나님이 부르시고 선택한 ‘성도들의 모임이나 회중’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의미로써 The Holy Catholic Church는 지금의 가톨릭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한글로 ‘거룩한 공회’라고 번역한 것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다.

즉 사도신경의 ‘공회’란 회중적 모임, 예배 등을 의미하는 교회의 원래적인 개념이며, 초대교회부터 이단교회와 구별하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공회가 유대인의 공회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만일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거부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초대교회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는 이유로 모든 초대교회들을 거부하여야만 할 것이다. 즉 사도신경의 공회(Catholic Church)는 지금의 가톨릭교회를 가리키지 않으며,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영어성경은 ‘The Holy Christian Church’ 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7.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에 대하여

가톨릭에서는 죽은 사람들에게 성인(Saint)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그러나 The Communion of Saint 의 Saint는 ‘죽은 성인’과의 교통을 의미하지 않으며, 성도들의 교제(코이오니아)를 의미한다. 죽은 성인과의 교통이라는 교리를 지지하는 개신교회는 없다.

“Saint” 라는 단어는 원래 기독교인, 즉 성도를 의미한다. “Sunday Saint”는 죽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요일만 기독교인인척 하는 사람이며 “The Blessed Saint”는 기독교 신자를 말한다. “Saint go march”는 죽은 자들의 행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행진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는 번역은 매우 훌륭한 번역이 된다.

가톨릭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성인’(Saint)이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제도는 사도신조(니케야신조) 훨씬 이후에 만들어진 제도이므로, 사도신경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가 행하여지는 일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787년 제2차 니케야회의부터였으며, 죽은 사람들을 성인으로 선언한 것은 A.D. 995년 요한15세 교황 때부터였다.

오늘날의 성경에서도 ‘성도’는 영어로 Saint라고 번역되어있는 것을 영어사전을 통하여 확인하기 바란다. 성도라는 단어가 죽은 자를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하여, 성도의 교통을 부정하는 목사가 있다는 것이 비극이다.

8. 원어와 영어성경에 기록된 "He descended into hell"

이 문장이 가장 논란이 될 것이다. 직역하면 예수님이 지옥으로 하강하셨다는 것인데, 한글 사도신경에서는 문제의 여지를 없애기 위하여 생략되어 있다. 이것을 예수님이 죽고 지옥을 방문하셨다고 해석하는 견해는 아주 잘못된 번역이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해석이 있다.

첫째 견해로는, 다음에 언급되는 ‘He ascended into heaven’(하늘에 오르사)과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서 문학적인 표현방식이라는 주장이다. ‘하늘에 오르사’라는 승천은 영광과 존귀의 의미가 된다. 즉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실감적인 의미로 표현하기 위해 ‘descended into hell’(지옥에 내려가셔서)라고 하였다는 견해이다. 즉 descended 와 ascended라는 두 단어와 into hell과 into heaven, 즉 문학적인 표현기법으로서 영광과 고통이라는 두 단어를 비교하며 대조시켰다는 견해이다.
또 둘째 견해로는, 예수님이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은 벧전 4:18-19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 4:18~19).

가톨릭은 이 구절로 연옥에 있는 자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두 번째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며 후에 면죄부의 동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옥”은 지옥이 아니라 감옥을 뜻하며, "전파하다"는 단어는 "유리겔라조"(복음을 전하다)가 아니고, “케루소”(선포하다)이다. 즉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승리를 널리 선포하신 것이며 그것을 강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 증거로 예수님은 십자가 우편의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글 사도신경은 물론 이 구절을 넣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이 문제를 생략하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고 번역함으로써 혹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의 소지를 없애 버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글 사도신경을 암송하며, 한글 사도신경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글 사도신경은 교리적이나 성경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번역을 한 것이다.

9.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성경은 예수님이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구절이 수십 개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부정하는 주장이 될 것이다. (막12:36, 막14:62, 눅22:69, 골3:1, 히1:3 등)

10. ‘고어적인 용어’에 대하여

또 한 가지 “저리로서”라는 의미로는 From thence 이며 현재용어로는 from there 즉 “저곳으로부터” 라는 의미로 전혀 이상이 없는 고어체이다. 현대적인 어문으로 이것은 수정됐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인정하되, 교회 예배의식에서 암송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사도신경의 내용을 부정하는 대부분의 교회들은 일반 기독교와 무엇인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강문호 목사(갈보리감리교회)가 <당당뉴스>에 기고한 ‘사도신경은 사도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에 대한 반박이다. <당당뉴스>는 강문호 목사의 글과 한준호 목사의 반박문을 실렸으며 <교회와신앙>은 이를 11월 27일 “사도적이지도 성경적이지도 않다”는 제목과 ‘강문호 목사 “가톨릭이 만들었다” … 오해와 빌미 우려’라는 부제로 보도한 바 있다. < 편집자주 > 
강문호 목사의 <당당뉴스> 기고문 보기
한준호 목사의 <당당뉴스> 반박문 보기
<교회와신앙> 관련보도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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