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꽃보다 아니 사과꽃 향기보다 진한

by fallbaram posted Dec 03, 2014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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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삼학년이 되는 해에 고등학교에선 새로운 신입생들이 들어 왔다.

그 중에 또래의 나이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한 남학생이 있었고

그 학생의 표정과 행동이 너무나 강렬하여서 내 시선이 나도 모르게

자주 머무르게 되었다.


야생마 같은 나에 비해서

잘 길러진 준마 같이 질서가 정연하고

얼굴도 근엄하고 행동도 판에 박은듯이 가지런한

학생이었고 그래서 그는 빠른 시일안에

학생들 사이에서

또 선생님들에게서

인정받는 지도자로 군림하게 된다.


무엇때문인지 확실하진 않은데

중학교 졸업이 가까워지는 무렵에 그에게 불려가서

꾸중을 들은 일이 있다.


어떤 무력이나 선배됨도 이 야생마의 마음에 한번도

위협이 되지는 않았는데 그의 그 짧막한 그 꾸중에

숙연해지는 내 모습을 느끼면서 난생처음

자신을 돌아보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한가지 잘 하는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나는 physical 한 삶과 생각속에 살지만

언제나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나 친구는

나하고는 정 반대의 언덕에 있는

누가 보아도 덕망이 있거나 지혜로운 자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의리와 양심이라고 할까.


그렇게 꾸중으로 시작된 그와의 관계는 또 한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마쳐가는 어느날

"도원의 결의" 로 발전하게 된다.

굳이 이름을 정하자면

그분이 유비가 되고

나는 관우가 되고

또 한분은 장비가 되어서


그러고 보니 셋이 다 일단은 목사라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고

셋다 목회일선의 일 보다는 다른면에서 재능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는 한쪽 다리로는 발바닥으로 걷고

다른 하나는 발등으로 걷는 특이한 장애자 였다.


내가 군대생활을 하는동안 어느누구도 한번 면회를 오지 않았지만

그가 고대병원에서 발등으로 걷던 다리를 수술한 후에 제일 먼저

나를 찾아와 면회를 한 형이요 친구였다.


우리사이엔 별로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관계의

사람이었다.


두번 다시는 이 교회를 돌아오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사회직장을 뚫어서 근무하던 시절

짙은 담배냄새와 담배갑이 보이게 옷을 입고 그에게

찾아와도 그는 한번도 그 담배 이야기를 끄내지 않았다.


나의 모자람과 넘침과

재능과 지능지수와 성질머리까지

그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인간됨을 한없이 존경하고

그는 나의 핏속에 흐르는 야생을 좋아했던것 같았다.


헤르만 헷세의 골드문트와 나르찌스 처럼

하나는 수도승처럼 단정하게

하나는 난봉꾼처럼 흩으러지게 살아가지만

둘은 언제나 함께 있어도 잡음이 일지 않고

평화와 고요를 나눌 수 있었다.


1981년 봄에 나는 사랑하는 이와 가약을 맺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로 이민을 와서 우리 사이는 먼거리로

남게 되지만

그동안 한번도 잘있냐? 하는 소리도 보내지 못하고

받지도 못했지만 십여년이 흘러서 만나면 그는 여전히

똑같은 얼굴 똑같은 소리없음으로 나를 반기고

나도 그리하며 살았다.


사실 나는 그가 순수 목회를 즐기기를 내심 원했지만

그는 교회의 행정을 염려하는 사상과 정신의 소유자였고

그일을 도전하는 투사같은 사람이었다.

 

맡은 일은 틀림없이 정확하게 하려하고

원칙을 깨는것을 너무나 싫어한 사람이었다.

 

나는 발치에서 그가 두번이나 한국 재림교회의 수장이 되려고

공개적 투표에 나섰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췌장암이라는 선고르르 받고 원주와 서울을 오가며

교회에서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즈음 누군가에 의해서

아마도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을 그의 얼굴에서 읽었다

내게 전해 주었고 나는 곧바로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서울로 갔다.

 

최종적으로 전기충격 요법을 받고 있는 그를

아직도 마지막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와

저녁마다 함께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번의 좌절의 원인은 타협하지 못한

아니 타협할 없는것이 원인이었슴을 이야기 하면서도

무대의 뒷골목에서 타협하던 자들에 대한 개인적이

감정의 표현은 전무하였다.

 

그리고 나흘을 보내고 닷새가 되던날에 다시 떠나오기로 되어있는데

신체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고 다시 며칠을 기다려야할 이유가 생겼다.

다음날 금요일

시내로 가서 여러가지 볼일을 보고 있는데 형수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응급실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서 

그가 나를 데리고 며칠전에 보여준 장의실로 그의

주검이 안치되고 그는 그가 그리도 고생해서 새롭게 단장한

서울 삼육병원의 자리에서 손발이 묶이고 소금에 저려서

차디찬 관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번도 그가 지도자로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가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은 했었더도

 

나는 그를 미워하는 무리들이 지어낸

 

부정 이야기

이야기

 

모든것을 믿을 없다


지금도 그가 남긴 가족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도저히 맡을 없다

 

학교의 정화를 위해서 횃불을 순수하고 능력있는 학생 하나

경산에서 쫓아 한국삼육의 사람이 되게 하고

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목숨도 기꺼이 바칠 사람을 교회는

성실하게 받아내지 못했다.

 

그의 육신이 그리고 그의 이름이 잊혀져 무렵 어느날

나는 서울에 볼일이 생겨서 장소에서 빌려주는 객실에 머물렀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밑에서 다른 오열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의 마음에도 평생 나를 잡아준 차겁지만 따뜻했던

사람 잊을 없어서 나도 어깨를 흔들며 오열했었다.

 

나의 인생에 이같은 지기를 만나 참으로 행복했다고 나는

여기 의리와 양심과 모든것을 걸고 천명할 있다.

 

교회도 그를 인해서 행복했다고 사람들 말고도 여기 있는가?

 

지금도 그가 남긴 가족들에게서 나는 냄새를 도저히 맡을 없다

 

학교의 정화를 위해서 횃불을 순수하고 능력있는 학생 하나

경산에서 쫓아 한국삼육의 사람이 되게 하고

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목숨도 기꺼이 바칠 사람을 교회는

성실하게 받아내지 못했다.

 

그의 육신이 그리고 그의 이름이 잊혀져 무렵 어느날

나는 서울에 볼일이 생겨서 장소에서 빌려주는 객실에 머물렀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밑에서 다른 오열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의 마음에도 평생 나를 잡아준 차겁지만 따뜻했던

사람 잊을 없어서 나도 어깨를 흔들며 오열했었다.

 

나의 인생에 이같은 지기를 만나 참으로 행복했다고 나는

오늘 여기에 아직도 남아있는 내 모든  의리와 양심을

걸고 천명할 있다.

 

교회도 그로 인해서 행복했다고 사람들

말고도 여기 있는가?

 



우화의 강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이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어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의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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