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기자가 만난 사람/조선일보에서

by 김균 posted Dec 14, 2014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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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이념'을 가져본 적 없어… 왜 자꾸 어떤 틀에 날 가두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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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15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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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꽃'과 '종북주의자' 사이… 임수경 의원의 內面 토로]

"1989년 평양축전 참가 때 위장한 안기부 직원이 따라와…
김일성을 '아버지'로 불렀다고? 그랬다면 南韓서 못 살았을 것"

"아들 잃은 뒤론 울 일 없었는데 나이 탓인지 요즘 눈물 많아져…
진심은 통하리라 믿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 많다"

사실 임수경(46) 의원을 오래 알아왔지만, 그의 머릿속 생각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 그에게 "오늘 이 자리는 공식 인터뷰"라고 일깨웠을 때 나도 긴장이 됐다.

―황선·신은미씨와 한 세트로 당신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조계사에서 열린 토크콘서트(11월 19일)에 참석한 게 불찰이겠지."

―초청받았나?

"행사 기획 단계에서 의견을 물어왔을 때 '지금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고 답했다. 언제 하는지도 몰랐다. 그날 조계사에서 스님을 만나고 나오니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맨날 집회에 모이는 단체 사람들만 있었다. 그쪽 관계자에게 '행사 홍보를 안 했나?'라고 하니, '많이 했다'고 하더라. 내가 '너네들끼리만 홍보했네' 하고 웃었다. 진행도 별로고 내용도 중구난방이라 정말 재미가 없었다. 무대 인사하고 잠깐 보다가 나왔다. 그게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황선·신은미씨와는 모르는 사이인가?

"황선씨는 알지만, 신은미씨는 전혀 몰랐다. 그 뒤 콘서트 강행으로 시끄러웠을 때 '더 이상 진행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만해라'고 전했다."

임수경 의원은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겠지만 나는 ‘從北’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임수경 의원은 “사람들은 믿고 싶은 대로 믿겠지만 나는 ‘從北’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매스컴의 주목을 끌었으니 성공한 것 아닌가?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을 말하나? 애초 콘서트를 열겠다는 목적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고 북한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희석시키려는 것'인데, 이처럼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낸 게 아닐까."

―이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나 발언 내용에는 동의하나?

"잠깐 있었기에 직접 들은 내용은 없다. 물론 언론에 보도된 것은 봤다. 내 생각을 말할 수는 있지만…, 대체 이들과 함께 내 이름을 거론하는 게 정상적인가."

―세간에서는 그렇게 본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가 그렇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조선일보에 '종북(從北)은 탈북(脫北)을 만나는 걸 두려워한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내가 탈북자를 만나면 흠칫한다고? 바로 어제 탈북자 3명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맞짱 토론'을 하자는 북한군 출신 여성 탈북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의정 활동으로 탈북 청소년 자료집도 냈다. 나는 탈북자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비례대표 의원이 되고 얼마 안 돼 탈북 대학생과의 술자리에서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 하태경 그 변절자 ××"라고 했지 않나?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 발언에 대해 사과한 걸로 아는데.

"발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만들었던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때 우연히 그 학생의 술자리에 합석하게 됐다. 내가 외국어대에서 강의할 때 배우던 학생이었다. 그가 '북한이라면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형'이라고 하기에, '네가 국보법의 근본에 대해 무얼 아느냐. 이 법으로 사람들이 끌려가고 고문받고 사형된 적이 있다'라고 했다. 언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헤어질 때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잘 끝났다. 며칠 지나 그 학생이 그걸 페이스북에 올렸다. 누군가가 그렇게 하라고 한 걸로 알고 있다."

―친구 하태경 의원을 '변절자'로 생각해왔나?

"하태경에게 그런 얘기를 한 것은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다시 묻는데, 하태경을 변절자로 보나?

"통일운동을 하다가 돌아섰으니 '변절(變節)'이 맞겠지. 그 단어가 나쁜 의미라면 '전향'이라고 고치겠다."

―당신의 생각과 이념은 대학생 시절 가졌던 그대로인가?

"솔직히 나는 이념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이념으로 재단되는 걸 싫어한다. 나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왜 자꾸 어떤 프레임과 주의(主義)에 나를 가두려고 하나."

―내가 그러는 게 아니라, 세간에서 임수경을 종북세력의 첫 줄에 놓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싶으면 어쩌겠나. 내가 아니라고 한들 믿어주겠나. 하지만 나는 '종북'이 아니다. 내 삶과 행동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

최보식 선임기자와 임수경 의원 사진

―'변절자' 발언 파문이 일어났을 때 새누리당은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라고 공격했다. 명예훼손 소송에서 재판부는 '임 의원이 북한 김일성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썼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결했다.

"항소심 중이다. 어떻게 내가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부르겠나. 평양축전 때 안기부 직원이 위장 신분으로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귀환해 안기부 조사를 받을 때는 이미 내 행적에 관한 자료철이 거의 만들어져 있었다. 명예훼손 소송 때 1989년 당시 안기부 수사기록과 재판 기록을 제출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내게 '김일성을 아버지로 안 불렀다'는 걸 입증하라고 했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국회의원은 물론 어떻게 이 땅에서 국민으로 살 수가 있겠나."

―김일성을 그렇게 받드는 일부 통진당원과 종북세력이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정말 나는 그들과 친하지 않다."

―그런데 왜 이들과 한패로 비춰질까? 이석기 사건 때도 임수경 이름이 나왔다.

"언론이 그렇게 만들었다. 대체 나를 어떻게 할 건가?"

―북한 정권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1989년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는 북한을 추종해온 사람이 아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북한 땅에서 태극기를 그려 머리에 둘렀던 사람이 있었나. 지금껏 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왜 사상 검증하나. 내가 왜 이렇게 맹목적인 이념 공격을 받아야 하나."

―억울한가?

"누가 뭐래도 내가 그렇지 않으면 되지 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내 업보(業報)인지 모르겠다."

―1989년 평양축전에 가서 본 북한은 그전에 본인이 생각했던 것과 어떤 차이가 있었나?

"나도 반공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그때 나는 북한 체제를 확인하러 간 게 아니다. 대학생으로서 북한 대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46일간 북한에 머물렀는데, 신은미씨처럼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해 코멘트할 게 없나?

"쇼케이스…, 그쪽에서 보여주는 것만을 봤는데 뭐라고 얘기하나. 당시 외국인 10만명이 참가한 세계축전이라 공식 행사가 계속 이어졌다. 주민들의 삶을 관찰하는 여행이 될 수가 없었다."

1989년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임수경 의원 사진
1989년 판문점을 통해 귀환

―당시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은 것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것이다. 그게 애초 목적이었다. 북한이 한걸음에 넘을 수 있는, 가깝게 있다는 걸 국민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조선일보가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원정대' 행사를 한 것도 같은 취지 아닌가. 경제 측면에서라도 우리가 돌파구를 찾으려면 북한 지역을 통과해 유럽과 연결돼야 한다."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때 북한에서 내려온 핵심 3인방 중 황병서·최룡해와 잠깐 인사했는데.

"이분들이 굉장히 반가워했다. 북한에서는 '남쪽에서 유일하게 친근한 사람'이 임수경일지 모른다. 최룡해 비서는 1989년 평양축전 때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서너 번 같이 식사했다. 그가 이제 북한 권력 2인자가 됐다."

―이런 관계도 '임수경은 종북(從北)'이라는 의구심을 굳게 하지 않을까?

"전쟁을 원하지 않는 한 남북한은 교류 협력을 할 수밖에 없다. 북한 입장에서 믿고서 대화할 수 있는 인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 같은 존재가 그런 자원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보호해줘야 하지 않나. 지금처럼 진영 논리로 나뉘어 있으면 이런 내 말은 설득력이 없다."

―그런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북한의 수령독재와 3대 세습에 대해 자신의 입장이 어떤지를 밝혀야 하지 않겠나?

"그건 잘못된 것이라고 이미 여러 번 얘기했다. 또 5·24조치(대북 경제협력 금지) 해제를 위해 북한도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왜 그걸 못 하나. 자국민을 위해서라면 지도자는 무릎을 꿇을 수도, 죽을 수도 있다고 본다."

―한 달 전쯤 당신은 "대북 전단 살포는 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블로그에 올렸다. 왜 당신이 나서야 했나?

"대북 전단에 내 사진이 무단 사용되기에 그랬다."

―대북 전단 단체는 "북측에서 '임수경이 남한에 가서 감옥귀신이 됐다'고 거짓 선전해 왔기에 임씨가 국회의원이 됐다는 내용과 사진을 담았다"고 했는데.

"나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 위원'으로 네 차례 방북했다. 북한에서 누가 나를 감옥귀신 됐다고 하나. 대북 전단을 규제하자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나를 갖고 장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때 운동권에서도 임수경을 놓고 설왕설래했다. 2000년 5·18 전야제 때 정치권에 들어간 386운동권이 광주 가라오케에서 노는 광경을 폭로해서 말이다. 그때만 해도 당신은 순수했던 것 같다.

"지금은 안 순수한 것 같나? 나는 계산에 약삭빠른 사람이 아니다…. 이념과 주의·주장에 관심이 없다. 나에 대한 (종북세력이라는)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려고 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극단의 슬픔을 겪고 난 뒤로는 울 일이 없었는데, 요즘 나이가 드는지 눈물이 많아졌다."

그의 눈 주위가 붉어졌다. 극단의 슬픔이란 필리핀에 일주일 영어연수를 보냈다가 사고로 숨진(2005년) 그의 9세 난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 저주의 댓글을 보고 '언제부터 우리 심성이 이렇게 됐나' 하는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부족한 게 많았다. 감옥에서 나와 대학을 다녔고 남들처럼 결혼했다. 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혼했다. 그동안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진심이 통한다고 믿었지만, 요즘 들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정말 고민이 많다."

―자기 뜻대로만 이뤄지면 사람의 인생이 아닐 것이다.

"인력(人力)으로 안 되겠지.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있을 줄도 모르는데."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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