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인식된 사실이다
그것은 내가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는 것이다
이름하여 말 더듬이였다.
내가 말을하면 주위의 분들이 내 말을 정확하게 이해를 못하신다
유일하게 어머님만이 내 말을 이해하신다
그러다보니 말 수가 적어지고 홀로 남는 일이 많았다
나에게는 말 더듬는 것은 유전 인자가 큰 요인이었다
아버지께서 역시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자이셨다
나는 선천성 언어 장애자로 이 땅에 태어난 것이다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학창 시절에
가장 두려운 것이 국어 읽기 시간이다
읽는 시간 내 차례가 돌아오면 나는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진다
겨우 읽다가 멈추면 다음 학생이 받아 읽는다
그러면 얼굴에는 진 땀이 가득 흐른다
그 때 느끼는 처절한 자괴감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말을 잘 못하는 언어 장애가 얼마나 처절한 장애인지를
학창 시절에는 늘 외톨이의 삶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은 힘들었다
자연스레 혼자서 슬픈 고독을 친구 삼아야 하였다
사춘기 시절에는 나에게 이런 삶의 무거운 짐을 안겨주신 아버님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어쪄라 유전 인자의 대물림을 어이한단 말인가 ?
고등학교 1 학년 여름방학 시절이다
나는 대단한 각오로 내 삶을 돌아보았다
이번 여름 방학 동안에 나의 엄청난 삶의 블랙홀을 탈피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 뒷산 성암산을 매일 찾았다
내 손에는 초등학교 국어 책이 들려져 있었다
그 책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는다
호흡이 맞지않아 잘 되지를 않는다
나는 좌절하여 울며 주님께 기도드렸다
주님 제가 이리 평생을 살아야 합니까 ?
책을 읽고 또 울부짖고
마치 야생마의 울부짖음 같았으리라
그러기를 2 주가 넘고 방학이 거의 다 마치게 되었다
그 후 조금씩 말하는데 자신감이 들기 시작하였다
집에서도 계속 읽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해 2 학기 학급 목사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세월이 흘러 신학을 마치고 목회 현장에 나왔다
설교 시간이면 나는 이중적인 고통을 감내하여야 하였다
말을 더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설교에 대한 부담감이었다
부산 어느 교회로 부임하였다
첫 안식일에 고등학교 후배가 참석하였다
설교를 마치고 뒤에서 인사를 하는데
그 후배와 반가이 악수를 하였다
그 후배의 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대답이 걸작이다
오빠 설교 들으면서 언제쯤 말이 더듬을지 걱정이 되어서
시간내내 조바심이 너무 - 그래서 두 손을 꼭 쥐고서 설교를 들었노라고
그래서 긴장되어 땀이 고였다고
고향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 내가 목사라고 하면
다 놀란다
말 더듬이 너가 어떻게 목사를 하느냐고
하늘이 내려준 이 장애로
소심한 성격과 대인관계 기피증까지 선물로 얻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주님의 은혜요 기적의 산물이다
지금도 긴장을 풀면 말이 더듬는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딸만 둘 낳았다
둘 다 언어 장애 증상이 전혀 없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아이를 임신 할 때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지 모른다
친구의 귀 장애를 듣고서
나 역시 혀 장애로 살아온 삶을 고백하여 본다
주님만을 찬양한다
그래서 늘 할렐루야를 높이 찬양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방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살아가는것 자체가 기적이 아닐런지요
우리 신랑이 적록색약인것을 결혼후에야 알았습니다
고추는 아예 따지를 못합니다
중학교때 그 사실을 알고 공부해서 뭐하나 하고 공부를 안했다나요
다행히 저도 딸만 셋이라 현재 나타나지는 않지만 인자를 가지고 있어서
딸아이의 후손들에게도 나타나는지 알수는 없지만
길을 열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목사님은 인간극장 다큐이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