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인간미 - 인간미 없는 우리들 에게 주고 싶어서 퍼옴

by 김기대 posted Dec 19, 2014 Likes 0 Repli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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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감리교 은명교회 숨빛인 설교에서




성공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겠지만, 비결은 제각각입니다. 요즘 제가 많이 생각하는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하려면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만 인간미야말로 성공의 밑거름입니다.

재키 로빈슨은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최초의 흑인 선수라고 합니다. 백넘버가 42번이었는데 이 번호는 영구결번이라나요?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얘기겠지요. 하지만 그도 처음에는 인종차별을 심하게 당했습니다. 경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흑인인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실력을 갈고 닦았고, 그럴수록 백인관중들은 그를 더욱 싫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에서 경기를 하던 중에 중대한 수비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관중들은 때를 만난 듯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낙담한 그는 그라운드 한쪽에 힘없이 서 있었습니다. 관중뿐 아니라 그를 시기하던 팀 동료들까지도 웃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명유격수 피 위 리스가 그에게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더니 자신의 팔로 재키 로빈슨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운동장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재키 로빈슨은 나중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실수를 했을 때 내 어깨에 팔을 올려준 피 위 리스, 그의 팔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미처 몰랐지요. 힘겨움으로 움츠러든 사람의 어깨 위에 팔을 올려주는 일,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하는 지를….”

흑인 재키 로빈슨에게 ‘인간미’ 넘치는 배려를 해준 피 위 리스(Pee Wee Reese)야말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인간미’란 배려와 그로 인한 감동에 대한 다른 이름인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재능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지만, 당신의 배려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겨진다. 가슴으로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모두 다 당신 편이다. 그 사람은 이미 성공한 사람이다.”


[인간미와 상식의 관계]

성경에서 인간미를 따져봅시다. 다음에 든 예에서 누가 인간미 넘치나요? 안식일 율법 들이대면서 이삭 훑어먹은 제자들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인가요, 그들을 옹호하는 예수님인가요?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종일토록 일한 자기들과 똑같은 임금을 준다고 성질부리는 사람들과 써주는 사람 없어서 종일토록 장터에서 서성거려야 했던 가장의 비애를 공감하면서 일감을 주고 똑같은 임금을 준 주인인가요?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살기등등하게 서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인가요,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며 초라하게 떨고 있는 여인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인가요?

두말 하면 잔소리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보면 우리는 왜 인간미를 느끼는 것일까요? 저는 얼마 전 ‘상식과 신앙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지만 상식이하나 몰상식은 아니라는 취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은 인간미를 상식과 관계시켜 살펴보겠습니다.

그야말로 상식이겠습니다만, 우리는 상식 이하의 사람에게서는 결코 인간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인간미는커녕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되겠지요. ‘사람으로서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하고 속으로 욕하면서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대접 못 받는 까닭을 아시겠지요?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욕심꾸러기여서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식 이하인 경우와 몰상식한 경우가 너무 많은 까닭입니다.

그러면 상식에 충실하면 인간미가 풍길까요? 글쎄요. 경험을 잘 살펴보세요. 좀 답답하지 않던가요?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의 상식이었던 율법에 충실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들! 좀 갑갑하지 않은가요? 언제나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언제나 옳은 말씀을 하시는 그들에게서 감동이라든가 ‘인간미’ 같은 게 느껴지나요?

물론 상식이 없으면 조직도, 공동체도, 사회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식에만 의존할 때 삶에는 재미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인간미가 없습니다. 인간관계에는 흥미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상식은 지키기도 해야하지만 때로는 벗어나기도 해야 하는, 그래야 숨통이 트이고 살맛이 나는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좀 철학적인 용어입니다만, 이때 쓰는 말이 ‘포월(包越)’이라는 말입니다. 포함하면서도 초월해야 하는 어떤 것, 그것이 상식이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미’는 상식을 초월할 때 느끼게 됩니다. 야유를 받는 흑인 선수의 어깨를 감싼 백인 선수에게서 인간미를 느끼는 것은 그가 당시의 흑인에 대한 상식을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인간미’를 느끼게 되는 것은 궁지에 몰린 연약한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당시의 통념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나눔콘서트]

나눔콘서트, 지난 목요일에 있었습니다. 잘 끝났습니다. 모든 샘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최선을 다해 감당했습니다.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고, 즐겁게 일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습니다. 나눔콘서트를 통해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까닭은 상식을 초월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관절 때문에 걷기도 힘드신데 평촌 먼 곳에서 지하철 타고 오셔서 수고하는 사람들 격려하신 김태희 장로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안 오셔도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그 상식이 파괴되니까 잔잔한 감동이 있는 것입니다. 해돋음 공부방 허준수 할아버지께서 하신 인사말도 뭉클했습니다. “저하고 같이 온 아이가 해돋음 공부방에 대한 절반이야기를 읽다가 ‘눈물이 나서 더 읽지 못하겠네요’ 하네요.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버려졌던 아이들의 상처난 감수성이 많이 회복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덕규 씨도 감동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헬렌켈러의 집 영민이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헬렌켈러의 집엔 시각장애 아동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시각 장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중복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영민이도 그런데 부축해줘야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지체장애가 심합니다. 그런데 하덕규씨 공연이 다 끝나고 앵콜까지 끝났을 때 영민이가 하모니카 연주를 한 것입니다.

부축해서 무대로 가면서 귓속말로 물었습니다. 앉아서 해야지? 그런데 굳이 서서 하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넘어질 듯 구부정하게 선채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하덕규 씨의 가장 대표곡인 ‘가시나무’였습니다. 화려하고 세련된 연주는 아니었지만 하모니카 소리에 실려 가사가 들려왔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연주가 끝나고 영민이를 부축해서 자리로 돌아오는데, 뒤에 앉아 있던 하덕규 씨의 얼굴을 봤습니다. 울고 있었습니다. 어기적거리며 자리를 더듬어 앉은 영민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무 잘했어. 영민아 너무 잘했어.”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데 영민이의 연주에는 상식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인간미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발견한 결론은 이겁니다. ‘상식 이하일 때 결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인간미가 아니라 혐오감을 준다, 상식적일 때 현상유지는 할 수 있고, 도덕적 인간과 모범시민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웬지 답답하다.’

그렇습니다. 인간미는 상식을 초월할 때 풍깁니다. 상식을 초월하되 배려하기 위해 초월할 때, 그때 우리는 감동을 느끼며, 그런 사람에게서 우리는 인간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

오늘의 성경 본문에서 우리는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상식과 통념의 벽을 무너뜨리시는 예수님을 또 한 번 만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인간적 아름다움에 또 한 번 압도당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모든 감정이 배제된 지극히 평범한 서술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읽으면 긴장감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마리아는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순수 유대혈통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피가 섞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성경은 “상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었음에도 산악길이나 해안길로 우회를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불순과 불경의 땅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들어간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예수님은 사마리아인과 얘기까지 하십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여자와, 여자 중에서도 남편을 다섯 번 갈아치운 전력을 갖고 있는 질 안 좋은 여자와 말입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매일 바치는 유대인의 상식으로 보면 뒤집어질 일입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 이방인이, 그것도 유대인이, 유대인 중에서도 남자가, 남자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남자가, 자기 같이 보잘 것 없고, 비천하고, 내세울 것 없는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물을 달라합니다. 처음 받아보는 사람대접에 아찔했을 것이고 황홀했을 겁니다. 자연히 이런 말이 터져나왔을 것입니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런 예수님의 인간적 아름다움에 어찌 압도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기적인 축복에 집착하고, 기적을 찾아 이 골짜기 저 골짜기 전전하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 아닌가요? 타종교는 여전히 마귀요, 정치적 신념이 다른 사람은 보수꼴통이거나 빨갱이로 치부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아름다움 아닌가요?

요즘 우리는 ‘재복음화’를 줄기차게 말하고 있습니다. 재복음화란 뭘까요?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아름다움, 사람다움의 멋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인간미 회복운동’인 것이지요. 이기적인 축복과 기적에 눈먼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고, 교리와 율법으로 옳으신 말씀만 늘어놓는 갑갑한 상식인이 아니고, 그래야 할 때 상식의 틀을 과감하게 벗어던짐으로써 감동을 주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자는 말입니다.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현상유지는 할 수 있지만 감동은 줄 수 없습니다. 감동 없이 복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찌하여 나에게?”라는 물을 때까지 배려를 위한 상식파괴가 빈번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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