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물의 기능중에
고이는 물과
흐르는 물의 기능이 다르다.
고이는 물을 바다라 하고
흐르는 물을 강이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번은 고이는 물을 지나가고
또 한번은 흐르는 물을 지나가게 된다.
출애급이라는 대 천로여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바로 열리면 우리는 이 두 물의 기능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들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홍해의 경험을 먼저 이야기 하자.
신앙인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실수 하는것이 있다.
애급의 바로와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출애급 당시의 이스라엘의 임금은 바로였다.
그 바로에게 종노릇하는 관계가 바로와 이스라엘의 관계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원하는 바 사흘길을 광야로 가서 희생을
드리려 하던지 아니면 바로와의 종살이에서 놓여나기 위함이든지 간에
꼭 건너야 할 물이 바로 홍해였다. 홍해를 건너면 이스라엘이
원하는 두가지 목적을 취하게 된다.
이 사건을 마치 사단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승리한
선악의 대쟁투로만 보는것이 성경을 바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는 점이다.
헤르만 헷쎄의 지성과 사랑이란 소설에서 수도승인 나르찌스와 방탕한 소년
골드문트가 한사람 안에 다 들어있는 두개의 방향이라고 말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삶속에서 지금껏 맺어온 관계 (바로의 종살이)
하나를 청산하고 다시 그들이 몰랐던 또 다른 두려운 존재인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 개입되는 홍해의 사건은 우선적으로 선과 악의 승리라고
보기보다는 이스라엘이 끊어야 할 생활속의 주인이 바뀌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보는것이 우선이다.
그 사건을 그렇게 보았던 사도바울이 구름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며 침례의 경험을 했다고 하는데서 우린 물에 장사지내는 옛것의 청산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도 이 세상 임금의 종살이 같은 지배가 있는것이며
침례란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다시 다른 대상에게 속하기 위하여 옛것을 수장하거나
장사지내는 매우 상징적인 의식이듯이 이스라엘도 그것을 홍해에서 국가적으로 겪는 경험이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광야에서 그들은 율법을 받고 또 다시 율법에 종살이 하는 사십년의
방황이 시내광야의 경험이다. 그들은 이미 통과한 홍해의 건너편에서 앞으로 들어가야할
가나안을 앞에두고 옛것과 새것의 충돌을 경험하는 것이다. 종살이의 대상은 이미 수장이
되었지만 종살이의 패턴은 버리지 못해서 새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다시 순종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종살이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광야란 말이다.
고인물의 저주와 심판은 노아 홍수에서 이미 보여준 사건이다.
홍해는 고이는 물이다. 그 물에 잠겨서 옛것 (바로와 바로의 군대)은 장사지내고
새것 (하나님을 섬기는) 으로 나오는 경험을 말한다.
에스겔 47장 17절에는 성소에서 비롯된 물줄기가 점점 불어나서 흐르고 있을때 같이 흐르지
않고 고이는 물 즉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 나지 못하고 소금땅이 될 것이며" 라고 하듯이
고인물의 기능은 악한것의 심판임과 동시에 당신의 백성에게는 다시 다른것으로 일어서게 하는
의식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 3장에서 모세가 그 저주의 직분을 담당했다는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고인물의 저주는 율법이 요구하는 "필경 죽으리라" 는 선고의 집행이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다시 흐르는 물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다.
성경은 애급에서 나온자들 중에 모세도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오직 두사람만 건넜다는 것으로
홍해의 저주에서 결국 살아남지 못한 이스라엘의 경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 될것인지를 물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다.
고인물의 장사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다시 흐르는 물을 건너는 경험이 남아있다.
다음엔 흐르는 물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