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14장에는 죄와 죄인을 상징하는 나병환자를 정결케하는
예식을 소개하고 있다.
정결한 새 두마리를 가져다가 한마리는 흐르는 물위의 질그릇에서
잡고 그 새의 피와 흐르는 물을 찍어 일곱번 뿌리는 예식이다.
훗날 나아만이 나병을 치료 받을 때 사용된 비슷한 방법이다.
흐른다 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는 요르드 이다.
요르드 단 (단이 흐른다) 이 요단강의 어원이다.
단이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기간에 단이라는 곳을 방문한 일이 있다.
내 생전에 그런 현상을 한번도 본일이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펑펑 솟아 나오는 샘이 거기 있었다. 갈릴리 동북쪽에
위치했다고 기억이 된다.
솟아 나는 샘물과 그것이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믿음의 노독과 이스라엘이
건너야 들어가는 필수적인 예식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다.
흐르는 물을 건넌후에 발이 닿는 땅도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상징하고 있다. 이것을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광야의 삶은 율법을 중심으로 모세와 함께 사십년 (평생)을
돌고 도는 고인물에 잠긴 삶이요 고인땅에 내리던 딱 하루분의
양식을 먹고 살아간 삶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다시 여호수아와 함께 건너는 강과 땅은
언제나 흐르는 물이요 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5 장에는 이같은 상징을 한번 더 설명하고 있다.
양문곁에 베데스다라는 고인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다.
다섯이라는 숫자의 주인인 모세의 율법을 암시하고 그 행각 (율법)
아래 삼십팔년 (사십년에 가까운)된 환자 (움직이지 못하는-흐르지 못하는)
가 누워있다. 그 고인물이 일년에 딱 한번 동하는 시간에 젤 먼저 들어가는 이가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 전설같은 이야기.
예수님이 거기 오셔서 움직일 수 없는 자를 움직이게 하시는
고침을 받는다고 하는 전설같은 이야기.
예수님이 거기 오셔서 움직일 수 없는 자를 움직이게 하시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그분이 동하는 샘이요 흐르는 물이다.
그분이 동하는 샘이요 흐르는 물이다.
흐르는 강
흐르는 땅의 주인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기능이요 능력이다.
에스겔 47장에는
성전의 문지방에서 스며나온 물이 점점 더 많이 더 세게 흐르다가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이되고 그 물이 강이 되어 각종 나무가 강가에
자라다가 다시 그물이 흘러 아라바를 거쳐서 사해로 들어가니
죽어있던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바다의 고기가 심히 많더라고
기술하고 있다.
고인물이 흐르는 물을 마시면 죽어있던 모든것이 살게되는
이 물은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생의 물이요 십자가에서 스며나온
오늘도 흐르는 은혜와 용서의 물이다.거기에 죽어있던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바다의 고기가 심히 많더라고 한다.
바다의 고기가 심히 많더라고 한다.
이 물을 마시던지
건너 가던지
그 물에 씻던지 하면
죽은자가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자는 다시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그 물처럼 흐를 것이다.
이웃을 향하여 또는 원수를 향하여...
님아! 이 강을 꼭 건너가야 한다.
고인 물 (율법)에 빠져 있으면 안된다
흐르는 물 (은혜)을 건너야 구원이 완성이 된다.
고인 물 (율법)에 빠져 있으면 안된다
흐르는 물 (은혜)을 건너야 구원이 완성이 된다.
불교의 반야 심경의 마지막 단계도 이와 같이
건너가는 것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라. 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태양빛 보다도 밝은곳,..
믿는맘 가지고 보겠네.
우리 들
있을곳 위하여
우리 주
예비해 주셨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강을 건넌 후에 만남
상상만 해도
감격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