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는 한 교우의 요청에
브런치 전문점에 가서 식사를 하는 동안
그분이 키우고 있는 열세살짜리 외아들의 공부방식이
화제에 올랐다.
요즘 학교에선
아이들에게 어떤 주제를 던지고 토론을 하거나
어떤 글을 내어 주고는 그 글의
내용과
의미하는 것과
목적하는 것이 무엇인지
샅샅이 뒤지고 파고들어 가는
독해력 향상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 올랐다고 하고 그러기 위해서 다독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도 우린 서로 합의 하기도 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선생과 제자로 지내다가
어떤 싯점에 이르러 이별이 불가피 할때에 그어지는
요단강의 이별 방식은 매우 단호하고 명확하고
때론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느낌을 독자들이 읽어야 함에도
우리는 왕왕 그 큰 기별을 놓치고 건너지 말아야 할
옛것을 건너게 하는 실수 속에서 옛것과 새것이
서로 상존하게 만들고 그 상존속에서 비 성서적인 교리나 해석을
주저없이 끄집어내어 우리의 고유한 무엇인양 붙들게 된다.
기다리지 못한 인간의 생각으로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율법)이 약속의 아들 이삭 (복음)을 핍박하는것을 보고
이스마엘과 낳아준 어미를 동시에 아삭의 집에서 쫓아 낼때에
그 어미 하갈이 겪는 고통의 기도를 우리는 유심히 관찰 하고
그런 하갈에게 달래기는 하시지만 끝내 함께 살게 하지 않고 내어보내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던 냉정함과
전 생애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갈구했던 종
모세에게 한발짝도 요단강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고
잠재우신 그 의미와
오로지 자신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태어난 침례요한에게서 달랑 침례만을 받은후에
그가 감옥에 가던지 목이 잘리던지 상관하지 않던그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히려 잘리기를 원했던 것처럼 읽혀지는 성경.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한술 더 떠서
이 복음 (믿음) 외에 다른복음 (율법)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부르짖는 그 의미를 한번 진지하게 공부해야 할 일이다.
변화산에 나타난 율법과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 와 초막셋을 지어
살자하는 베드로의 간절한 그 바램을 산산조각 내시는 선생의 확연한 의지에
깔려있는 메쎄지를 받아야 한다.
누가 말하듯이 죽어서 구원받는자 (모세)와 살아서 구원받는자 (엘리야)로 무심코
말해버리면 성경은 원래의 뜻과 의미를 잃게된다.
이 성전을 헐라
그리하면 내가 세우겠다는 말씀처럼
하나는 헐리고 그런다음 다시 하나는 거기에 세워져야 한다.
민초의 사람들아
결코 요단강을 건너게 하지 않는 율법의 기능과 율법의 운명을
우리는 깊이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요단강은 무엇이며 또 율법은 무잇인지를 이미 가르쳐 주었어도
우리는 그 율법을 다시 찾아서 억지로 요단강을 건너게 하고
믿음과 함께 살도록 허용했다.
다음엔 그 요단강을 무슨수로던지 건너온 뱀의 후예들과
믿음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사사건건 충돌하는 이야기 하겠다.
근하신년
바람님의 글 기다리며 나오는즉시 읽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