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김 원일교수님이 퍼올리며 얼마만큼 동의하느냐고 물었던
글의 내용에는 반쯤 졸음에 빠져있던 내 의식의 문 하나를 열고
들어오는 기막힌 표현이 하나 거기 있었다.
필요하면 그 글 전체를 다시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만
여기에 한 소절을 다시 올린다.
없는 미래를 만들어내려니 비유가 필수적이다.
코젤렉은 흥미로운 실화를 전한다.
“저
지평에 이미 공산주의가 보입니다.” 흐루쇼프가 연설했다.
청중 한 사람이 질문했다. “동무, 지평이 뭡니까?”
“사전을
찾아보시오.” 흐루쇼프가 대답했다.
학구열이 강했던 그 청중은 사전을 직접 찾아보았다.
“지평, 하늘과 땅을 가르는 가상의 선.
사람이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396쪽)
그 가상의 존재하는 지평을 향해서 서 있거나 전진하는
우리의 신앙적 삶에 흐르고 있는 이 요단강은 지평이다.
시간적 지평이요 동시에 공간적 지평이다.
시간적 지평이라 함은 "내가 다시 오리라" 는 약속안에서
기다리는 기다림이고 또 동시에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하리라" 는 현재의 진행이기도 한것이다.
공간적 지평이라 함도 요단강의 주인이 "여기에도
있지 않고 저기에도 있지 않으며 내 마음속에 있다" 고
하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서
요단강은 흐른다는 의미가 중요한 것이며
거기에 있다는 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란 말이다.
거기에 흐르기 보담 오히려 우리 마음속에 지금 흘러야 하는 강이다.
용서 일 수 있고
은혜일 수 있고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일 수도 있고
영적빛일 수도 있다
지평의 끝이 있는 어느 순간에 지평을 기다린
사람들을 모아 양쪽으로 갈라 놓을때
과거의 삶에서 흐른자 (강을 건너는 자)들은
오른쪽에
그리고 흐르지 못한 자 (강을 건너지 아니한자)들은
왼쪽에 모아놓고 판단을 하는 싯점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종합된 지평적 결정이다.
지금도 양쪽으로 갈라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때 실제로 가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지금도 오시고 내일도 오시고
또 2030년에도 오실 것이다.
감기 이후에 오는 후유증이 사뭇 심각해서
벌벌 기어다니며 밤을 지새다 시피 했는데
일단 기대수명에는 들어가 있는 2030년 까지도
안전할 지가 의문이다.
지금 내속에 재림이 없다면 그때 만나서 무얼 할려고?
하는 생각이 크게들고
잡을 수도 없는 시간
그리고 잡히지도 않는 시간을 잡으려 하기 보다는
내 속에 피어오르는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능력
십자가의 흐름을
반추하는 시간이 오히려 더 유익하다는 생각에 요즘
양심있고 깊이 있는 개신교 목사의 강해 설교 하나
듣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깨어나 보니 그가 말한 몇개의 내용이 생각이 난다.
설교의 내용은 갈릴리에 세번째로 나타난 주님과 제자들의
조우에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제자들이 실망을 해서 자신들의 고향이요
생활의 근거지인 갈릴리로 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래의
성경절을 보면 이미 주님이 전에 말씀하신 것이며 그들이
잊어버렸다 해도 하나님의 시간표에 흐르는 섭리의 현상이라는
그의 강해가 아름다웠다.
지평에서 보는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지형적 이름이 아니고
갈릴리는 이방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쓰여진 것이며
그래서 이방에 빛이 비추인다는 비유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되며
그럴때 오늘도 나와 여러분도 거기 베드로와 함께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그분의 질문에
나도 무언가 대답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마 26장 31, 32잘
-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마 28:9,10절
-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갈릴리에서 나타나심은 먼저 나타난것이 아니라
세번째 인데 그것을 비유로 보지 않고 문자로 읽으면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이다. 강해에 의하면 그 세번의
나타나심이 갈릴에서 하고자 하는 사역의 지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실 새해라는 특별한 선긋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날마다 죽는다거나 날마다 새롭다"는 바울의 절규가 더 아름답다.
우리 몸도 앞으로 다시 주실 그 몸의 비유라는것 모르고 몸에만 집착하면
또 다른 낭패를 볼 수 있다.
요단강에 선 자여
요단강을 건너가는 자여
흐르는 물을 이해하는 자여
보지 못하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자여
우리의 모든것이 비유라는 사실 잊지 말자
속히
곧
임박
2030
사람이 다가가면 언제나
뒤로 물러나는 연대
이 비유속에서 잘 살아 남기를 바라며...
아버지 가방에 들어 가신다
아님
아버지가 방에 들어 가신다의 말놀이 같이
하늘의 것을 비유로 성전을 지으라 했더니
그 성전의 모형이 오셨어도 비유는 여전히 유효한 우리의 신학이
안스럽다.
요한이 마지막으로 하늘엔 성전이 없으며 어린양이 그 성전이라
했음에도...
모형이 1844년에 비유속으로 들어가시는 사건을 놓고
나는 참 말문이 막힌다.
어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는 날!!!
눈에 보이는 것이 그림자요
오히려 보이지 않는것이 실제라는 말
여러군데에 하셨는데 우린
왜 그럴까?
나만 하는
잡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