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humanity ( 6 ) - 그대가 사람이라면, 그 개를 개 xx 라고 욕하지 말라. 그리움을 잊어버리고 목석처럼 사느니 차라리 개처럼 사는 게 낫지.

by 잠 수 posted Jan 11,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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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humanity ( 6 ) -


아 !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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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광고를 써 붙였다.


"강아지 세일"


강아지를 보러 온 사람들 중에 어린 소년이 있었다.


"저, 아저씨, 강아지가 너무 비싸지 않으면 저도 한 마리 사고 싶은데요"

라고 어린 소년은 말했다.


"글쎄다, 이 강아지들은 한 마리에 10,000 원씩인데."그


 소년은 울상을 지으며


"저는 겨우 1,600 원 밖에 없는데요. 구경만 좀 해도 될까요?"


"아 그럼. 얼마든지 보렴."


그 아이는 다섯 마리의 복술 강아지들을 죽 살펴 보더니

그 중에 다리를 저는 절뚝발이 강아지를 발견하였다.


“아저씨 저기 다리를 저는 강아지 제가 사면 안될까요. ”


"그래, 그렇지만 그 녀석은 평생 다리를 절텐데."


"예 그게 제가 꼭 사고 싶은 강아지예요.

제가 그 강아지 값을 몇 달 동안 갚아 나가면 안 될까요?"


"그렇지만 항상 다리를 절텐데."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싱긋 웃으며 바지 한 쪽을 걷어 올리더니

그곳에 부착되어 있는 인공 다리를 보여 주었다.


"저도 잘 걷지 못해요" 라고 말한 다음

그 강아지를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저 강아지는 많은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 할 것 같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절뚝발이로 평생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래. 가지고 가라. 그래 너라면 이 강아지를 잘 보살필 수 있을거다.

돈은 내지 않아도 된다."


주인은 그 강아지를 선뜻 공짜로 내주었다.

그 소년은 자신이 절음발이였기 때문에

그 강아지를 그렇게 불쌍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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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로 이 땅에 오신 구세주

절뚝발이 강아지를 사랑하신 구세주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 하나님.


구유를 요람으로 삼으시고 가장 천한 자의 경배를 받으신 메시야

인간으로 인자로 불리기를 서슴치 않으셨던 창조주 하나님

자신을 먼저 인자로 칭하신 그리스도


그 분은 오늘도 내일도 변합없이

약한 자의 구주이시고

곤고한 자의 도움이시고

실패한 자의 승리이시고

병든 자의 의원이 되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미생들의 구주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영원토록 약한 자의 구주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사랑에 녹아진 또 한 여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려고 합니다.

( 주제 말씀 - 마 15 : 21 - 28 )


개로 취급 받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 사역의 핵심 기별입니다


우리 주님 삶의 이 원리에 의하여

가나안 여인을 대하신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여인을 통하여 주님의 한없는 자비로우신 인간미

주님의 섬세한 그 손길

주님의 그 따뜻한 마음을

우리 주님의 그 진하디 진한 사람 냄새를 오늘도 맡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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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그가 어머니 손을 잡고 과일가게에 갔다.

가만히 서서 뚫어져라 딸기를 쳐다보자.

주인 할아버지가 한 웅큼 집어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카네기는 계속 쳐다만 보았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자기 손으로 딸기를 한 웅큼 덥석 집어서 주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조용히 물었다.


얘야, 할아버지가 집어 먹으로 할 때 왜 안 집어 먹었니 라고 말하자


엄마, 내 손은 작고 그 할아버지 손은 크잖아요.


카네기처럼

주님의 큰 손으로 집어 주시는 딸기를 먹은 한 여인이 바로 주인공이고.

주님께 기도하며 기다리는 그 믿음이 주님께 칭찬받고

그의 딸도 나음을 입는 이중적 축복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 사람은 당시 편협된 유대 사회에서

개나 돼지 취급을 받으면서 살던 가나안의 이방 여자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더 심한 멸시를 받으며 살던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이방 여자입니다.


가나안을 베니게라고도 하는데

그 여자는 수리아 지방의 베니게 족속인 수리아 베니게

즉 수로보니게 족속에 속한 가나안의 이방 여자입니다.


클레멘트 서한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이 밝혀져 있는데

쥬스타 라고 하는 여인이고,

이 여인의 딸의 이름은 비어니스라고 합니다.


역사가 요세프스는 이 여인의 딸이 뵈니게 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나안의 개를 아브라함의 딸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까지 해 주셨습니다.

( 보통 큼이 아니라 슈퍼 다이나마이트 메가톤 급 )


구분지어진 거룩함

다름으로 이어지는 성별됨의 그릇된 사고

독선과 아집으로 뭉쳐진 당시의 기득권 - 종교 지도자

선민 사상으로 이방인을 대하는 유대인들의 교만

이분법적 논리로 무장된 그들과 싸우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들과 싸우시고 계십니다.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고

스스로 규범과 교리를 만들어서 아무도 넘어올 수 없는 지경으로

철웅성을 만든 그들이기에 주님은 언제나 그들의 대적이었습니다


선과 악의 논리로 상대를 점치는 그들이기에

이방인을 짐승처럼 대하고 멀리하는 그들이기에

오늘의 주님 행적은 가히 기행적이고 놀라울 뿐입니다.


어머니의 기도 응답으로 귀신 들렸던 그의 딸을 고쳐 주신

오늘의 사건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살 떨리는 치욕적인 뉴스였습니다.


이것은 모순되는 사랑이었고 또한 역설적인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의 상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사랑입니다.


첫째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신 사실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상관이 없는 베니게에 속한 이방이었고

신약 시대에도 유대나 사마리아나 갈릴리와 상관이 없는 베니게에 속한 이방 땅입니다.

구약 성경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 겔 28 : 21 . 23 )


역사적으로 보면 두로와 시돈은 앗수르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바벨론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페루시아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희랍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고

로마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그들이 범한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은 오로지 저주의 땅입니다.


요세프스의 전해오는 글에 의하면

두로지방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가장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더구나 시돈은 아합 왕 때 바알 신을 끌고 와 나라의 신으로 섬기게 한

악녀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유대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은 “거기서 나가사” 라고 기록했고

마가복음은 “거기를 떠나” 라고 기록합니다.


전에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가신 일이 있지만,

이렇게 멀고 먼 변방인 두로와 시돈을 가신 일은 없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이 대부분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서

행해졌지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행해진 일은 이번 밖에 없습니다.


이 사건은 참 기이한 일이기도 합니다.

두로와 시돈은 복음 사역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버림 받은 땅이었고 저주 받은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저주의 땅 바로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아니 작심하시고 가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한 여인을 위한 의도된 여행이기에 귀한 사건입니다.

( 예 ) - 삭개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리고 성으로 들어가신 주님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에 숨어 있는 테러리스트를 색출하려고 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포악한 이교도들에게 심판을 선언하려고 가신 것도 아닙니다.

그곳에서 저주와 멸시와 절망과 불행 가운데서 살아가는

가나안의 개 한 마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가나안 여자는

인종적 차별과 멸시,

문화적 차별과 멸시,

종교적 차별과 멸시를 당했을 뿐 아니라

가정적인 불행과 비극과 슬픔을 당하며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미친 생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미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


아픈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을 다 같을 것입니다.

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부모는 그 어떠한 일도 할 것입니다.


옛날 사울 왕의 손자 므비보셋이 자기를 가리켜

“죽은 개”라고 불렀는데(삼하9:8)

가나안 여자도 자기를 가리켜 개라고 불렀고

예수님도 그를 가리켜 개라고 불렀습니다.

( 물론 그 의미는 다르지만 )


호머의 시에 보면

"수치를 모르는 남녀를 개" 에다 비유했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욕을 할 때 가끔 개를 등장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는 개만도 못하다." “ 너는 개 XX 이다.”

이런 욕을 들으면 인격과 자존심이 그냥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저주 받은 개 한 마리를 살리려고

일부러 두로와 시돈 땅으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귀하고 귀한 복음입니다.


아 !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이 찬미가 절로 밤 하늘의 공기를 힘차게 가르게 됩니다.

이 찬미가 이 여인의 고백이고

이 여인이 평생 불러야 할 찬미일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가나안 여자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좀 지나치게 가나안 여자를 무시한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무례한 말씀을 하신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가나안 여자에게 하신 주님의 세 마디 말씀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가나안 여자를 무시한 듯 보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가나안 여자를 인종 차별하며 무시한 듯 보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가나안 여자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아니하며 완전히 무시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숨은 비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숨은 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숨은 미소와 웃음과 해학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인간미와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람 냄새를 진하게 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개] 를 말하는 세 가지 낱말이 있습니다.


1 ) 케레브

전투견, 짖다, 공격하다, 뻔뻔한 남자, 매춘부라는 뜻입니다.


2 ) 퀴온

큰개, 사냥개를 뜻합니다.


3 ) 퀴나리온

강아지, 애완용 작은 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여인에게 사용하신 단어는 퀴나리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여자를 전투견이나 더럽고 사나운 큰 개로 보지 않고

애완용 개라는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르시는 사랑스런 애완용 개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방 족속을 개라고 할 때는 케레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퀴나리온이라고 부르시는 그 말씀을 알아듣고는

즉시 반응을 보이며 주여 옳소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기르시는 애완용 개라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향하여 케레브 라고 부르지만

주님은 자신을 퀴나리온 이라고 부르십니다


너무나 다정하게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감격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인간미의 절정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풍기는 진정한 사람 냄새입니다.


여기에 퀴나리온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주님의 말씀이 반전입니다.


단순한 더러운 개가 아니라 사랑스런 애완용 개입니다.

주님께서 돌보시는 애완용 개입니다.

주님께서 먹이를 주시고 기르시는 사랑스런 개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랑스런 애완용 개입니다.

주님의 소유인 주님의 애완용 개입니다.


이 말에 이 여인은 용기를 얻습니다.

이 말에 여인은 감격의 눈물을 주르르 흘립니다.


이 분이 바로 구세주 주님이시구나 라고 고백합니다.

드디어 내 딸이 드디어 고침을 받는구나 라고 확신합니다.

이 순간 여인은 그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음을 직감합니다.


두 뺨에는 감사의 눈물이 감격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이 가나안 여자는 주님의 손에서 여지없이

자신을 낮추고 부인하고 죽이는 경지에 까지 이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 합니다.

주님 나는 주님의 애완용 개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애완용 개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밥상 밑에 쭈그린 애완용 개입니다


주님 맞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저는 주님의 가조고가 같은 애완용 개이니 기적의 부스러기를 주옵소서.


이 말에 이 여인은 한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깊은 배려와 사랑에 감격 또 감격합니다.


평생을 통하여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쌓습니다.


그는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이방인 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법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기도 같지도 않은 가나안 여자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가나안 여자는 그저 소리를 지른 것뿐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가로되”


그 여자가 한 것은 주님께 나와서 소리를 지른 것뿐입니다.


복음서나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로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집에 들어 누어서는 소리를 지를 수는 없습니다.


그 여자가 부르짖은 세 마디는 단순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소리를 예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개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믿음이 크도다

크다는 것은 메가톤급의 믿음을 말합니다 ( 크다의 헬라어 의미 )

이 여인의 믿음을 메가톤급 믿음이라고 칭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와 이 여인은 닮은 모습입니다.

그 아들 어거스틴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를 신봉하고,

세상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누리며 사는 것을 볼 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로서는 아들 어거스틴이 그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기 위하여 얼마나 애쓰며 눈물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10 년이 넘게 하나님께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 어거스틴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낙심했습니다.

한 번은 너무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서 가지 교구의

암브로스 감독을 찾아가서 아들의 심령을 위해 호소하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신부님, 제 아들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버리신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제 아들의 심령을 위해 기도드렸지만

하나님은 제 기도에 아무런 응답이 없으십니다.

제 아들이 돌아오기를 10 년이 넘게 애타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더해 가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면서 신부 앞에서 울음을 그치지 못합니다.


이 때 눈물을 흘리며 애타는 심정으로 호소하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암브로스 감독은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합니다.


자매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낙심하지 마세요.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아들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기도하세요.


암브로스 감독의 격려의 말에 힘을 얻은 모니카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 결과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눈물로 기도한 이 여인의 끈질긴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어머니의 눈물 기도를 결단코 무시하시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힘들고 지친 인간에 대한 주님의 배려

약자에 대한 주님의 그 깊은 동정심

버림 받은 자에 대한 주님의 그 무한한 이해심

개라고 일컫는 천대와 멸시의 대상에게

이방인에게도 자비의 손 길을 베푸시는 주님

애정과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서시는 나의 주님을 사랑합니다.


단 한 영혼의 소중함을 아시기에 그 멀리까지

가시어 기어이 그를 만나시고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해학과 유머에 탁월하신 주님

인간에 대한 더 없는 이해심으로 모든 인간들을 용납하시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퀴나리온으로 인정하시고

복음의 부스러기를 먹게 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적은 믿음을 메카톤급 믿음이라고 칭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주님의 넓으신 그 사랑에 오늘도 감격합니다.

주님의 그 싶으신 사랑에 오늘도 눈물을 흘립니다.

오늘 다시 주님 냄새를 맡게되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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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 문 일석


우리 집 애완견은 말티즈, 이름은 코코.

식구가 아무도 없을 땐 혼자 외롭게 집을 지킨다.


코코와 놀아주어 제일 좋아하는 막내가 외출할 때면 옹알댄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막내 침대를 오락가락한다.

출입문을 응시하며 시간을 죽이는 게 일상이다.


개는 자기가 좋아하는 주인을 기다릴 줄 안다.

집에 들어오면 환영할 줄도 안다.

만져달라고 손을 핥으며 끙끙대기도 한다.


내 귀엔 들리지 않은 발자국 소리를 먼저 듣고

작은 체구로 우주가 무너진 듯 컹컹거리며 짖어대고

온몸을 요동치고, 꼬리를 흔들고

만남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날뛰듯 집안을 왔다갔다 하며

기뻐서 어찌할 줄 모르며 오줌을 질질 싸기도 한다.


그대가 사람이라면, 그 개를 개 xx 라고 욕하지 말라.

그리움을 잊어버리고 목석처럼 사느니

차라리 개처럼 사는 게 낫지.


하루 종일 주인 기다림에 목을 빼는

개처럼 살고 싶지는 않지만,


개가 아닌 사람이 그리움에 목말라하며 개처럼 사는 게 어때

누군가를 향해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개가 아닌 사람으로.



개 밥그릇 / 정 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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