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humanity ( 7 )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by 잠 수 posted Jan 14,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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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humanity ( 7 )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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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하여 반추하여 보려고 한다.


왜 나는 예수님의 인간미와

왜 나는 예수님의 사람 냄새를 사모하고 추구할까 ?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

나는 왜 이럴까 ?


박제화 되어가는 종교 현상에서 출애굽 하고 싶은 강한 욕망일까 ?

생명을 잃어버리고 외형만을 고집하는 신앙에 환멸을 느껴서일까 ?


십자가 형태는 있는데 진정 십자가 없는 내 교회 때문일까 ?

성경은 있는데 말씀의 생명은 사라진 내 교회 때문일까 ?

예배 행위는 존재하는데 그리스도가 빠진 내 예배 때문일까 ?

나처럼 설교는 하는데 하늘을 가르는 공허함 때문일까 ?

속은 비어있고 껍데기만 요란한 내 모습 때문일까 ?

물질만능 시대에 타들어가는 내 영혼의 가뭄 때문일까 ?


나 자신에게 애타게 물어본다. 왜 ? 왜 ?


저 밑에서 자그마하게 들려온다.

모기 숨소리만큼 작은 기척이 들려온다.


오로지 살고 싶을 뿐이라고

오로지 살고 싶을 뿐이라고

주님 품 안에서 쉼을 누리고 싶을 뿐이라고

그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오로지 쉬고 싶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리도 주님의 냄새를 찾아다녔다고

이 세상 모든 괴롬 잊고

그저 주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싶을 뿐이라고


그래서 성경을 다시 펼쳐서 그 느낌을 적어보는 것이라고

그 사이 사이 훈풍처럼 밀려오는 따스함에 감동을 받았노라고


때로는 고마움에

때로는 감격스러움에

때로는 새로운 발견에 흥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눈물로 회개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기도하고


그리 은혜를 받았노라고


오늘은 왠지 이 시가 스쳐 지나간다


너에게 묻는다. / 안 도현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죽어도 여기서 찬란한 끝장을 한번 보고 싶은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거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눈에 빨갛게 불을 켜고

구들장 속이 얼마나 침침하니 손을 뻗고 보고 싶은 것이다


나로하여 푸근한 잠 자는 처녀의 등허리를

밤새도록 슬금슬금 만져도 보고 싶은 것이다.


-------------------------------------------------


이 시를 다시 음미하면서

이 시에 나오는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뜨거운 밑불위에

지금은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 갈라진 내 몸을 얹고

아랫쪽부터 불이 건너와 옮겨 붙기를

시간의 바통을 내거 넘겨받는 순간이 오기를

그리하여 서서히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를


나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보고 싶은 것이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아래쪽부터 건너와 나에게 옮겨 붙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로마의 압제에서 신음하는 동족을 위하여

유대교의 박제화된 종교의 멍에를 벗기시려고

형식과 관념, 기득권의 사유물로 전락한 종교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죽은 신앙을 살려 살아있는 신앙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지 말라는 규제와 압박에 시달리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주님은 몸으로 맞서 싸우셨다.


기득권 세력과 저항하시다가

결국은 피 흘리며 그의 목숨까지 바치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성전에서 채찍을 드시고

화석화 되어 굳어버린 안식일에 생명을 불어넣어 부활시키시고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도 못하는 경기장 벽을 허무시고

모두를 무료 입장 시키신 주님이시다.


차가운 방 구들에 불타는 연탄을 밀어 넣어

그 뜨거움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예수님은 반역자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난동자요 행패를 부리는 불량자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는 자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신성 모독을 일삼는 중죄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에는 주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든 것이다.


얼마 전에 허주님이 쓰신 글에서 감동을 받았다.

하늘 성소를 증축을 하여야 한다고 ---------

읽고서 깊이 동감하였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의 전유물을 좌지우지 하는 모습에 화가 난다.

재림의 시기를 못 박고 그 날에 반드시 재림 하셔야 한다고 우긴다.


하나님께서 꽤나 골치가 아프시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 저 사람 어이 그 말들을 다 들어야 하실지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부리는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부리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부리는 신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그 자체가 성소이신데 하늘이 성소이신데

인간은 하늘에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신을 거침없이 가두어 놓는다


인간이 가둔 그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그 신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만든 신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신을 숭배한다.

그 신은 신이 아니라 오로지 우상숭배의 대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례하게도 신이 언제까지 어느 공간에 머무르시고

언제부터는 그 공간에서 이동하여야 한다고 못 박는다.


신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스케줄에 구도에 맞추어야 한다.

일정까지 공간까지 구획 정리를 한다.


인간이 신의 활동 영역 시간과 공간을 제한하여 버렸다.

그들은 그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 신의 말씀 성경을 이용한다.

신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리 하여야 한다는 당위론을 언급한다.


여기에 이의를 달거나 다른 소리를 하면 저주를 퍼 붓는다.


지금은 인간 해방이 아니라 신의 해방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지금은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신의 자유로움이 더 필요한지 모르겠다.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어머니의 젖가슴을 지니신 따뜻하신 그 하나님을

사랑으로 눈물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전지전능의 하나님을 인간은 시간과 공간속에 가두어 놓았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인간은 시공의 지배를 받는 신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재림의 시기를 정하고 꼭 그 날에 오시라는 인간의 재촉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을 지니시고

사랑과 긍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교리와 특별한 규제의 틀에 가두어 놓으니

그 사랑은 식어식어 차가운 구들장이 된지 오래다.


주님이 먼저여야 하는 것이 교회다.

교리가 주님보다 먼저가 되면

교회는 그 즉시 화석이 되고 박제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지나간 기독교 역사가 밝히 증명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은

바로 단번에 하늘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셨다

어디를 경유하거나 거치시거나 머물지 않으셨다.

성경에 명백하게 서술된 기록이다.


인간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을 성소라는 공간에 가두어 버린다.

지성소 성소라는 구획된 구별된 공간을 만들어서 말이다.

주님이 계시는 그곳이 바로 성소요 지성소임을 잊어버린 것이다.


주님이 계시는 곳에서 성소의 역할을 지성소의 역할을 하시는 분이시다.

약 1800 년 동안 주님은 꼼짝없이 그리 계셔야 하였다.

인간의 신호에 따라 지성소라는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하셔야 하였다.


허주님의 글을 빌리자면 더 거룩한 처소로 옮겼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 아니다.

스스로 만유 위에 계시고 인간의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으신다.


이제는 이제는 연탄불 같으신 주님의 그 뜨거움을 느끼고 싶다.

내 안에 내 속에 계시는 뜨거운 주님을

땀 냄새 흩날리며 사람 냄새 진동하는

인자이신 인간 예수님을 만나고 싶을 뿐이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다.


하늘에도 계시지만 내 안에 내 속에 거주하시는 주님이시다.

구태여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논할 필요가 없다


바울 편지서의 도도한 흐름은 오로지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시다.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과의 교제

주님의 냄새를 맡아보고 주님과 대화하며 살아가고플 뿐이다.


바울은 이 사상을 그의 모든 편지 서에 막 쏟아 붓고 있다.


주님은 엄격하시거나 냉정한 심판자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모습으로 형님의 모습으로

사람냄새 풀풀 풍기시면서 우리 곁에서 살고 싶으신 분이시다.


우리 곁에 오셔서 그리 살아가신 그 흔적을 살펴보고플 뿐이다.


재림교회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일까 ?

재림 기별

안식일 기별

성소기별

재림 교회의 정체성은 재림도 안식일도 성소기별도 아니다.


재림 교회의 정체성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재림 교회보다 먼저 교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교회와 다름이 정체성의 이치가 아니다

다름은 정체성과는 아무런 상관 관계가 없다.

다름이 거룩이고 다름이 성화가 아니다

다름은 다름일 뿐이다.


그 다름을 구별하여 선포한다고 다름이 특별한 정체성이 아닌 것이다.

다름은 다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여야만

진정한 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진 그 다름이 선과 악의 구분점이 될 때

그 어떤 종교라도 타락하게 됨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 때 그 다름은 교만이고 자만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다름으로 인하여 복음은 식어지고 작아지게 될 것이다.


그 다름만을 껴안고 있으면

그 다름은 자신을 더욱 격리시켜

복음의 진수를 복음의 그 뜨거움을 맛보지 못하게 만든다.


재림 교회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다워야 한다.

이것이 진정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인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체성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그 이외의 것은 전부 다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주객이 바뀐 모습은 절대로 교회다운 모습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빠진 재림 기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그리스도의 복음이 빠진 안식일 기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그리스도의 복음이 빠진 성소기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아무 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니다.

속이 빈 강정일 뿐이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은 복음이 빠진 안식일을 준수하였다.

생명이 다 빠져버린 안식일을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만 지켰다.

그래서 그들은 해가 지는 시간을 매우 중요시 한 것이다.

성문의 깃발이 내려지는 그 순간이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 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이 무엇일까 ?

안식일이 사람보다 상위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당시 안식일은 항상 사위 개념이었다.

이것은 당시 혁명적인 선포였다.

돌에 맞아 죽을 만큼 엄청난 기별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런 잔재가 남아있지 않는지

오전 9 시 30 분 정각 출석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면 패스 지각하면 ------------


때로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편히 안식일을 안식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되는 것일까 ?


몸이 힘들어도 가기 싫은 교회 억지로 가야 하는 것일까 ?

누굴 위한 안식일인가 ?


그 상위 개념이 안식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안식일 지키는 것이 성도의 어떤 의무인가 ?


시간과 공간의 안식일 개념에서 어느 것이 더 상위인가 ?

시간 개념인가 ?

공간 개념인가 ?


오늘날 재림교회

안식일 - 일요일 지키는 자와 비교하여 월등한가 ?

그래서 안식일이 종말 심판의 기준이라도 되는 것인가 ?

십계명 중에서 빛이 난다는 안식일 계명이 과연 그러한가 ?

다른 교회와 다름의 상징이 안식일이어야 하는가 ?

다른 교회와 다름이 성소 기별이어야 하는가 ?

다른 교회와 다름이 과연 조사심판의 기별이어야 하는가 ?

( 지금은 재림 전 심판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지만 )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라오다디게아 교회의 맹점은 바로 이것이다.

다 있는데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와 계실 처소가 없다는 사실이다.

초림의 때와 같은 형편이다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없었다.

계실 곳은 구유이고 짐승의 우리였다.


일요일 휴업령이 복음인가 ?

종말론 기별 사상이 복음인가 ?

야곱의 환란이 복음인가 ?

조사심판의 기별이 복음인가 ?

이것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별외에 다른 것을 외치면 개신교회를 따라 하는 것인가 ?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것만 외쳐야 한단 말인가 ?


다름만을 외치지 않으면 타락한 바벨론이라도 되었다는 말인가 ?


그리스도의 인간미에 관하여 화두를 던진 김 기대 님에게 감사한다.

이 분으로 인해 새롭게 주님의 마음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연탄을 다시 불 피우고 따뜻한 구들목에 이불을 깔기 시작하였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임마누엘의 그리스도를 다시 새롭게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하면 장로교회라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재림교회는 날이면 날마다 고착된 기별만을 외쳐야 한다는 말인가 ?

재림교회도 교회이다.

먼저 교회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다음에 재림 교회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교회는 처음부터 믿음의 의를 믿은 집단이 아니다.

얼마 후에 진통과 고통 끝에 얻은 것이 믿음의 의의 기별이다.

그 잔재가 아직도 여러 곳에 남아있다.

믿음과 행위를 대별하는 습관이 그것이다.


율법에서 졸업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것이 그것이다.

품성의 완전 - 목숨을 걸고 덤비는 것이 그것이다.

목숨을 걸 일이 아니다.


주님의 젖가슴을 만지며 그 젖을 빨며

그 품에서 노니는 젖먹이 마냥 - 그리 살고 싶다.

엄마와 같으신 주님이 좋다


아버지의 부정으로 자식을 끌어안으시는 탕자의 아버지 주님이 좋다.


화잇은 정로의 계단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서술한다.


- 정로의 계단 9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과 땅에 있는

무수한 증거로써 당신에게 붙들어 매셨다.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이 그 마음으로 체험해 알 수 있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結緣)을 통하여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고 하셨다.

( 그윽하고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이 무엇이겠는가 ? )


그러나 이러한 것도 그의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충분치 못하였다.

이러한 모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善)의 대적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게 되고 또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성이 없는 이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 주요 특성이 엄혹하게 처단하시는 자 -

엄격한 법관이나 각박하고 인색한 고리 대금업자 - 와 같이 생각하게 한다.

또한 사단은 조물주는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찾아내어

저들에게 벌을 주려고 질투적 눈으로써 항상 주목하는 자처럼 보여준다.


예수께서 인류 가운데 사시려고 오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이러한 몽매한 오해를 없이 하시기 위함이었다.


화잇은 계속하여 주님의 인간미와 그의 사명을 기술한다.


- 정로의 계단 10 -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행하실 당신의 사명을 말씀하시기를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하심이라”

(눅 4:18)고 하혔나니 이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그는 두루 다니시며 선을 행하시고

사단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쳐 주셨다.


병자의 신음 소리가 아무 집에서도 들리지 않는 촌락들도 있었나니

이는 예수께서 그 가운데로 지나시며 그들이 병을 고쳐주신 까닭이었다.


그의 사업은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증거가 되었다.

사랑, 자비, 긍휼은 그의 생애의 온갖 행동에 나타났나니

그의 마음은 인류에게 부드러운 동정을 나타냈다.

그는 사람의 소원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


아무리 가련하고 비천한 자라도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작은 아이들이라도 그를 잘 따랐다.


저들은 그의 무릎 위에 올라 앉아서 인자하시고 사려(思慮)깊으신

그 얼굴을 쳐다보기를 좋아하셨다.


주님의 삶의 흔적을 살펴보고

주님의 삶의 족적을 따라가며 남기신 그 사람 냄새를 맡는 것은

아래 화잇의 글에 그 이유가 잘 묘사되어 있다.


- 정로의 계단 14 -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심으로 인생을 고상하게 하셨다.

타락한 인류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으로 과연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분을 가지기에 합당한 처지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랑은 무엇으로든지 비할 수 없다.


하늘나라 왕의 자녀! 귀한 허락!

이는 가장 깊이 명상할 제목이다.


당신을 사랑치 않는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케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을 십자가에 비추어서 연구할수록

그의 자비와 온유과 공평과 의로 섞인 사유(赦宥)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또한 그의 무한하신 사랑의 무수한 증거와

자기의 불순종하는 자녀에 대한 자모의 애정보다도 뛰어난,

인정 깊은 자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주님의 인간미에서 화잇은 어머니의 모성애를 느끼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애정보다 뛰어나다고 말한다.


주님의 이러한 무수한 증거를 살피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리라.

다시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는 것이리라.


화잇은 그의 글에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묵상하는 목적을 이리 말한다


- 정로의 계단 19 -


하나님의 마음은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으로써

이 세상의 당신의 자녀들을 극진히 사모하신다.

그는 당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온 하늘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


구세주의 생애와 사망과 중보, 천사들의 봉사, 성신의 탄원,

만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늘 아버지, 하늘 주민들의 끊임없는 흥미,

이 모든 것이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동원(動員)되었다.


아아!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드리신 그 놀라운 희생을 묵상하여 보자!

온 하늘이 잃어버린 자를 도로 찾아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소비하고 있는 노력과 정력의 진가(眞價)를 생각하여 보자.


이보다 더 강한 동기를 가지고 이보다 더

강력한 동력(動力)을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옳은 행위에 대한 과분한 상급,

하늘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천사들과의 교제,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교통하며 사랑하는 것,


영원한 시대를 통한 우리의 모든 기능의 향상과 발달,

이 모든 것들이 과연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창조자와

구속주에게 충심으로 사랑의 봉사를 하게 하는

큰 자극과 장려가 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반면에 죄에 대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형벌,

회피할 수 없는 보응, 우리 품성의 타락,

최후의 멸망들은 사단을 섬기지 말라고 경계하는 경고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무심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 이상 무엇을 더 하실 수 있었을 것인가!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 자와의 관계를 바로 잡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변화되어서 부리심을 받는 천사들과 사귀며

하늘 아버지와 아들과 융화되어 교통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여 두신 방법을 잘 이용하자.


요즈음 자주 부르는 찬미가 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이라는 찬미이다


자주자주 부른다

아침 저녁으로 운전하면서도 부른다


잠자리에서도 부른다.

등산하면서도 부른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God is so good to me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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