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부칠 수 없는 연하장 두개

by fallbaram posted Jan 16, 2015 Likes 0 Replies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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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잘 어울리지 않는 나는 지금도

연하장을 편지처럼 써서 보내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내가 출석하는 교회 교우님 전체를

향해서 연하장을 보냈다. 


도종환님의 들길을 서두에 올리고는 각자의 얼굴을 생각하며

후렴을 달았다. 모두 참으로 좋아하셨다.


연말이 되면 선물하나 보내고 감사하다는 표현을 대신하던

우리 고유의 문화를 따라서 선물은 하지 못한다 해도 감사의 마음은

전달하고 싶은 이유때문이다.


그 중에 딱 두분은 연하장을 부치고 싶으나 부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해마다 연말이 오면 가슴이 시리는 속앓이를 하게 된다.

이산가족 찾기는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은 잊지만 이런 오해로

굳어져 버린 침묵의 관계는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고 하나는 삼십년

가까이 넘게 냉각의 관계가 풀어지지 않고 흘러 가고 있다.


한분은 회계사이셨는데 내 젊은시절 장인 장모님의 택스보고는 물론

여러가지 어려운일을 도와주시는 분이셨다.

장인 장모님이랑 함께 살던 내가 그 일로 그분을 옆에서 보아오면서

그것 뿐 아니라 상당히 남성적이고 의리있고 또 지도력도 있어 보여서

개인적으로 은근히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세월이 한참을 흘러 세미나리를 마치고 내 동창 한분이 그분이 계시는

교회로 부름을 받게 되었고 나는 떠나는 그에게 노잣돈 조금 건네면서

그분의 좋은점과 또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의 부분도 함께 이야기 하고

보냈다.


그가 그분하고 관계가 악화되면서 급한김에 나를 걸고 넘어지게 된다.

아무개 (나)도 장노님 (화계사)을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고 자기가 하고 싶은

부분만 부각시켰는데 그분이 평소에 믿었던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듣는

순간에 얼마나 배신감이 생겼을까?


그분이 매우 힘들어 했다는 후문을 듣고는 지금껐 어떤 표현도 하지 못하는

관계로 살고 있다. 마음으로는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지우지 않고 살아 가지만...


또 한분은 달라스에 있을 때 일이다.

그분은 의사이셨는데 한국에서 부터 그분의 지도력이나

성공담이 크게 소문이 나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셨다.

텍사스의 뙈약볕 아래서 그가 이민을 와서 이룬 업적도

남다른 성공을 거둔 그런분이셨다.


그가 어느날 외롭던 교회에 청년들이 들이 닥치고 교회가

출렁이는 물결로 부흥을 체험하고 있을 때 그 부흥의 파도속에

함께하고 있었던 나를 보면서 특별한 관심과 대우를

유독 나에게만 쏟아주셨고 언제나 의대 공부를 하라고 격려해

주시는 분이셨다.


교회건물을 구입했지만 교회가 그분의 집에서 가까웠지

한인들이 살아가는 중심지 하고는 거리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비록 그분이 나를 아들처럼 대해주시고 나도 그분을 아버지 처럼

대하며 살았지만 그 문제 때문에 나는 그분의 편에 설수는 없었고

댱연히 팔아서 한인들의 중심지로 옮겨가야 한다는 주장을 나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입장을 약간 다르게 각색해서 누군가 내가 마치

그분을 증오하는것처럼 말을 옮겼다.


그리고는 그분이 다시는 내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고

지금껏 만나면 날 무슨 동네 닭쳐다 보듯 하신다.


이미 그분들이 시작한 의심의 마음에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더

의심의 구름이 일어날 것이 뻔하며 나 또한 구차한 변명을 잘 하지

않는 성격탓에 비극의 분단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내가 정초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말을 전할 때

앞뒤를 잘 구분하고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신사적인 행동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중심이 안식일이라고 주구장창 떠들어 댈지라도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 하지 말라" 는 명령도 동시에 중요하다는 생각을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보아야하는 한분은 이제 눈도 좋지가 않고 거동도 불편해 하시는데

다가가서 따습게 손한번 잡아드릴 수 없는 이땅의 비극 한토막이

정초에도 나의 목을 누른다.


생각없이 전달한 오해의 씨앗속에서 자라는 이런 비극의 스토리가 꼭

내게만 있을 것인가?


침례시에

수건으로 틀어막고 물한방울 적시지도 않았던 입때문에 오는

부작용인가?

그렇다면 자동차도 recall 해서 고치는데 안식교인 전체를 recall 해서

접시에 물부어놓고 입만이라도 다시 물속에 집어넣어야

진짜 온몸을 잠그는 침례가 되지 않을까?


우찌 생각들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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