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humanity ( 9 )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게 손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저희 집에서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막 12 : 42
그 때 한 가난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으니라.
두 렙돈을 바친 과부와
주님의 따뜻한 배려의 이야기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작은 동전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의 배려심 깊은 그 사랑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다른 이들이 무시하는 가난한 과부의 그 심정을 이해하시고
가난하고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을 위로하시고
그에게 따뜻한 주님의 따뜻한 인간미를 부어주시므로
그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시고자 함일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에서 오늘도
주님의 인간미와 주님의 사람 냄새를 더욱 진하게 맡고자 하는 것이리라.
하루는 예수님께서 그의 공적인 가르침을 행하시던 이방인의 뜰로부터
여인의 뜰로 들어가셨다.
예루살렘 성전의 여인의 뜰은 약 1 만 5 천명의 예배자들이 모일 수 있는
매우 넓은 광장이다.
그 뜰에는 13 개의 소바롯이라 부르는 헌금 통이 놓여 있는데,
( 소바롯이란 나팔처럼 생긴 헌금 통을 말한다. )
사람들은 그 성전 뜰을 지나가면서 그 통에 예물을 넣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는 말은
이방인의 뜰에서 이 소바롯을 약간 멀리서 보시면서
소바롯을 정면으로 하여 앉아 계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헌금하는 장면을 유심히 바라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이
어떻게 성전 금고에 그들의 돈을 넣는가를 살피고 계셨다.
돈 많은 부자들은 소바롯 ( 헌금함 ) 에 큰 액수의 돈을 넣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으로 자랑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헌금에 주님은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셨다.
그 때 한 불쌍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주님께서는 이 과부의 헌금에 동전을 넣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신 것이다.
그 작디 작은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막 12 : 42
가난한 ( 헬 ) - 프토코스 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거지 신세로 전락한,
구걸하는,
거지처럼 가난한
천한 - 의미이다.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려운 처지
상대적 빈곤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의 처지
그러나 이 형용사는 거지 (beggar) 를 뜻하는 명사로 더 많이 사용된다.
프토코스는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이 아니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난한 이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로 본다면
이 여인은 속절없는 거지라는 말이다.
더구나 홀로 외로이 살아가야 하는 과부이다.
이런 형편으로 살아가는 여인이
그의 전 재산을 다 바친 그 헌신을 귀하게 보신 것이다.
아니 거들먹거리며 돈 많음을 자랑하는 당시 기득권들에게 말하는 것이리라.
또한 이 여인을 멸시하는 그들과 대비하여 이 여인을 귀히 보시는
주님의 배려하심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보실새” 라는 헬라어는 미완료 시제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의 깊게 계속 헌금함을 보시고 계시면서
헌금을 드리는 자들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한 렙돈은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가장 작은 유대인의 청동 동전이다.
( 중량 1.7g, 한 앗사리온의 8 분의 1의 가치 )
한 렙돈은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었던 로마 데나리온의 1 / 128 정도라고 한다.
노동자 하루 품삯을 10 만원 이라고 하면
한 렙돈은 약 800 원의 가치이다 두 렙돈은 1,600 원이다
이 돈이 이 과부의 전 재산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전 재산 이 돈 전부를 헌금궤에 넣은 것이다.
이것을 주님께서 목격하시고 동전 떨어지는 그 소리를 바로 들으신 것이다.
당시 그곳은 매우 소란스러웠을 것이다.
많은 인파가 붐비고 밀리는 지경일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면 많은 사람이 따르기 때문이다.
주위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아무리 많은 인파가 몰려도
아무리 어수선하여도
주님은 그 동전 떨어지는 작은 소리도 귀담아 들으신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연약한 자가 드리는 기도라도 주님은 결코 멸시치 않으신다.
연약한 자에 대한 주님의 세심한 배려가 소망의 기초이다.
마가는 로마인 독자들을 위하여 다시 로마 화폐 단위로 그 가치를 말했다
( 고드란트로 설명한다. )
렙돈은 히브리 동전의 명칭이다.
이 돈은 로마 화폐 한 고드란트에 해당된다.
고드란트는 로마 화폐 중 가장 낮은 단위의 화폐이다.
당시 헌금함은 놋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동전이 떨어지면 소리가 땡그랑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동전의 크기와 무게가 클수록 소리가 클 것이다.
돈의 가치에 따라 동전의 소리가 다르다는 말이다.
렙돈이라는 동전은 우리나라의 십 원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그 소리를 그 작은 소리를 주님께서 귀담아 들으신 것이다.
과부가 드리는 가장 작은 헌금 소리를 무시하시지 않으시고
귀담아 들으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는 주님 !
이것이 주님의 배려심이고
이것이 주님의 인간미이고
이것이 주님의 인간 냄새라고 믿는다.
당시 과부는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가난함의 대명사이고 동정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잘 돌보는 것이라고 한 것이리라.
( 약 1 : 27 참조 )
참새 한 마리의 운명까지도 챙기시고 보살피시는 주님이시다.
인간이 스쳐 지나치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주님은 멸시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보다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진정성에 대한 것이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하고 기도를 자주 한다고 해도
신앙에 진정성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미없는 가식이다.
과부의 두 렙돈의 이야기가 신앙의 진정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그 앞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앞에 나오는 기사는 예수님이 서기관들을 비판하는 대목이다.
그들은 당시 기득권 세력인 종교 지도자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의 이목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경건한 척 긴 옷을 입었고,
사람들에게 인사 받기를 좋아 했으며 거룩한 척 했다.
잔치의 윗자리를 차지했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오래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헌금도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보란 듯이 했다.
이런 서기관들의 모습이 한마디로 가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부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적은 돈이었으므로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다.
이 과부 이야기는 성전에 기도하러 간 세리와 바리세인의 이야기와 비교된다.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올라갔다.
누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는가.
오래 기도한 바리세인인가,
그저 죄인이라고 짧게 고백한 세리인가.
당연히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였다.
헌금 이야기는 늘 불편하게 들린다.
액수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면 대접 받고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교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많은 헌금을 해야 한다.
십일조를 못 내면 제대로 얼굴을 들 수 없는 곳이 교회다.
이렇다보니 사람을 의식해서 헌금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가식이다.
헌금을 포함한 모든 신앙 행위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먼저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곧 진실된 신앙 고백이다.
헌금은 자신의 형편에 따라 드리면 된다.
많은 헌금을 했다고 우쭐대거나 적게 했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과부가 드린 두 렙돈에서 그 교훈을 심어 주신 것이다.
진정성이 있는 과부의 헌금 그리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신앙의 핵심 요소를 말씀하신 것이다.
“많이 넣었더라”
여기서 부자들은 사회의 특권층으로서 바리새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부자들로서 헌금함 소바롯에 많이 넣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이’는 질적으로 많이 넣은 것이 아니라
양적으로 많이 넣었다는 뜻이다.
즉, Much 가 아니라 Many 이다.
다시 말해서, 부자들은 많은 동전을 연보궤에 넣은 것이다.
큰 돈이 아니라, 많은 돈을 넣은 것이다.
현대말로 하면 백 만원 짜리 수표를 조용히 넣은 것이 아니라,
5 백원 짜리 동전을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와르르 쏟으며
한참 동안 많이 넣은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부자가 많이 헌금을 했다는 말은
사람들이 보기에 많이많이 끝도 없이 돈을 연보궤에 부었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부를 자랑하며
헌금을 많이 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소바롯 앞에서 외식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교인이 많은 어떤 교회에서 어떤 사람이 어느 날 100 만원을 헌금한다고 하자.
그리고 주보에는 헌금 금액은 실리지 않고 헌금 내역은 실린다고 하자.
그랬더니 이 사람이 봉투 10 개를 가져와서
선교헌금, 감사헌금, 투자헌금 건축헌금 월정헌금 등으로
많이많이 헌금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당시 바리새인들의 헌금 생활, 모습이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위선된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
이러한 신앙 생활에 대해 주께서 지적하시며
그런 신앙 생활을 정죄하신 것이다.
바리새인 부자들이 헌금을 many many 한 후에,
초라하고 꼬질꼬질하고 가난한 한 과부가 와서 소바롯에 헌금을 넣었다.
주님이 보시니 그 헌금 액은 두 렙돈, 즉 한 고드란트였다.
이 당시 한 고드란트는 참새 5 마리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서
한 사람이 이틀을 먹을 수 있는 음식 비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 있어서는 이 두렙 돈이 그녀의 모든 생활비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다.
이 생활비를 내고 나면 그 과부는 그날 저녁부터 굶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지극히 가난한 여인!
비참과 빈곤에 처한 여인!
거지로 살아야 하는 이 여인
두 렙돈이 그녀의 총 재산인 여인!
그녀는 저축한 것도 없으며,
그녀가 마지막으로 소유한 것은 두 동전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돈에 그 여인의 생사가 달려 있었다.
주님께서는 위선자의 가식을 나무라시고
이 여인의 헌신과 믿음을 주님께서는 가장 귀하게 보신 것이다.
추운 겨울 밤이었다.
불을 지피지 못해 냉기가 도는 방안에서
한 어린 소년이 홀로 사시는 어머니로부터 성경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때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까마귀들을 시켜
엘리야를 먹여 살리셨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아이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는
우리도 방문을 열어 놓아
하나님의 까마귀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자고 엄마를 졸라댔다.
"엄마, 틀림없이 우리 집으로 까마귀들이 날아올 거예요."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는 그 간곡한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근처를 지나가던 시장이 한겨울에 방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상하게 여겨 집안으로 들어왔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시장이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하나님의 까마귀가 되겠습니다."
그날 이후로 시장은 그 과부와 어린 아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공급해 주었다.
[데겔]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성경 다니엘서 5장 27절에 나오는 것인데
“왕을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쓰시는 저울은 세상 저울과는 아주 다르다.
세상의 저울은 겉으로 나타나는 숫자와 크기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저울은 내면의 동기와 헌신에 더 큰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다.
옛날 유럽의 한 왕이 크고 화려한 성전을 짓고 그 앞에다
‘아무개 왕이 세웠다’는 이름을 적어
세상에 알리기를 원해 성대한 준공식을 거행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왕은 이상한 꿈을 꾸게 되는데
자기 이름이 지워지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이었다.
수소문 끝에 그 이름의 주인공을 찾았는데
그는 행색으로 볼 때 너무나도 불쌍한 과부였다.
더구나 그는 왕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왕이여!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성전을 위해 돌과 나무를 실어 나르는 말에게
짚 한 단을 썰어 먹인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저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저울과는 너무나 다르다.
잘난 체하며 많은 돈을 기부하려는 사람보다 자신의 전부를 드리고도
몸 둘 바를 모르는 과부의 두 렙돈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냄새이고 마음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이따금
가난한 백성들의 집을 예고 없이 방문하곤 했다.
하루는 어느 과부의 집을 찾아가 담소를 나누던 중,
여왕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의 집을 방문한 분 중 가장 명예로운 분은 누구였습니까?”
과부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예, 바로 여왕님 이십니다.”
신앙생활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여왕은
내심 과부의 대답에 실망한 눈치를 보였다.
“혹시 당신의 집을 방문했던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예수님이 아닌가요?”
그러자 과부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게 손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항상 저와 함께 저희 집에서 살고 계시는 분입니다.”
생활종교라는 말이 있다.
내 삶 속에 종교적 가치가 스며있다는 말이다.
진정성이 있다는 말이다.
과부의 동전 소리를 들으시는 나의 주님
나의 신음 소리도 귀담아 들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가난하여 드릴 것이 없지만
이 몸 바쳐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 곁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