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humanity ( 10 ) - 친구가 없는 사람은 다른 좋은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생명이 없는 것이다.

by 잠 수 posted Jan 25,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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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humanity ( 10 )

친구가 없는 사람은

다른 좋은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생명이 없는 것이다.



친구의 소중함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가 없는 사람은

다른 좋은 것을 다 가졌다 하더라도 생명이 없는 것이다.


친구는 생명같이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즉 친구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스탠포드 대학 의료센터의 데이비드 쉬피겔 박사는

암 치료의 방법으로 인간관계의 결속을 장려합니다.


따뜻한 인간관계의 결속이야말로

암 환자의 생존율을 높이고

치료의 회복을 가장 빠르게 하는 요인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입니다.


면역체계의 약화나 파괴를 미리 막아주는

일종의 예방 접종과 같은 것입니다.


친구 관계의 단절이나 상실은

질병의 부분적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정되고 따뜻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면역기능이 강화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며,

암과 관상동맥 질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낮아지고,

나이에 비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를 물었던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리디아(Lydia) 왕국의 크로이소스(Croesus) 라는 왕이었습니다.


리디아 왕국은 지금의 터어키 지역에 있었던 나라인데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사데 교회의 사데(Sardis)가 그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리디아 왕국은 한때는 세계 4 대 강국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데 지역은 사금이 많이 나와서 사금을 채취해서 엄청난 부를 누렸고,

금과 은을 합금하여

세계 최초로 엘렉트론 화폐를 만들어 사용했던 나라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최강국이요,

수도 사데는 지역적으로 천연적인 요새였기 때문에

이웃나라가 감히 쳐들어 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동전을 만들만큼 문화도 굉장히 발달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때, 그리스의 유명한 법률가요 철학자인 솔론(Solon)이 사데에 와서

한 3 개월 동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크로이소스 왕은 솔론이 하도 유명한 사람이니까

솔론을 그의 화려한 궁전에 초대를 하고 음식을 잘 준비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자기의 부강한 나라를 자랑하기도 하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크로이소스 왕이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솔론,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크로이소스 왕은 당연히 솔론이


‘폐하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고 말할 것을 기대하고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솔론은 이런 대답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生)의 마지막,

죽는 순간에 만족해하며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크로이소스 왕의 기대가 어긋납니다.

자기를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딴 소리하니까

화가 나서 솔론을 쫓아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크로이소스 왕은 막강한 국력을 배경으로 영토를 더 넓혀야겠다고

마음먹고 페르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막강한 경제력으로 말이 이끄는 엄청난 전차부대를 준비했습니다.

그때의 페르시아 왕은 고레스(Cyrus) 왕이었습니다.


리디아 왕국이 전쟁을 걸어오니까 그 막강한 전차부대를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각료회의를 했는데

우리는 맞받아치면 이길 수 없으니까

말이 제일 싫어하는 짐승으로 반격을 하자고 결론이 났습니다.


말이 제일 싫어하는 짐승은 낙타입니다.

낙타의 등에서 나는 냄새를 말이 죽는 것보다도 싫어합니다.


고레스 왕이 낙타부대를 준비해서

전쟁을 걸어오는 리디아 왕과 전쟁을 시작합니다.


크로이소스 왕 전차부대의 말들이 다가오는

낙타부대의 냄새를 맡고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칩니다.


전차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리디아 왕은 패하고 결국 리디아 왕 크로이수스는 고레스 왕 앞에서

죽게 되는데 크로이소스 왕을 나무에 묶고

처형을 하려는 순간에 고레스 왕이 물었습니다.


이제 너는 죽지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 내가 들어 주겠다.

그때 크로이소스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솔론, 솔론, 솔론...”하면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라는 말은 않고 왜 ‘솔론’이라고만 하느냐? 그 뜻이 뭐냐?

리디아 왕이 대답했습니다.


몇 년 전에 내가 그리스의 유면한 철인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숨을 거두면서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 뜻을 모르고

그를 쫓아낸 것이 후회스러워서 솔론을 생각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때 솔론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내 마지막을 늘 준비하면서

살아왔다고 하면 나는 오늘 이렇게 비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 감탄한 고레스 왕은 크로이소스 왕을 풀어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리디아 왕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숨을 거두면서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삭개오라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만나 그의 삶이 변화되고 삶의 진정한 행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의 사람 냄새를 맡고자 합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풍겨오는 진한 인간미를 느껴보려 합니다.


가장 행복한 한 사람 - 그는 삭개오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진실로 비로소 삶의 행복을 얻은 자입니다.

주님을 친구로 삼아 남은 한 평생 행복한 사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숨을 거두면서 웃으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자신의 삶에서 친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아니지요 주님이 삭개오를 친구로 삼으신 것 때문입니다.


누가만이 감동적인 삭개오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히 기술한 유일한 복음서 기자입니다.

유대인들을 위하여 쓴 세리 마태의 마태복음에

이 삭개오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마태와 같은 직업을 가진 자가 삭개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삭개오의 이야기는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진 누가복음의 주된 특징에 매우 잘 어울리며,

틀림없이 누가는 이 이야기를, 복음은 하나님과 멀어진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포함시켰을 것입니다.


벨기에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데테르링 그는 인생을 한권의 책으로 비유합니다.


인간은 한권의 책을 써 내려가는 작가와 같다


그런데 이 인생이라는 책의 특징은

첫째, 한번밖에는 쓸 수 없다는 점입니다.

둘째, 남이 대신 써 줄 수 없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한번 밖에 없는 일생의 책을 알차게

기록해 나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 비결은 삭개오처럼 바로 생명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삶이 180 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변화된 삶의 장면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마 11 :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세리의 친구 - 세리인 삭개오를 친구로 삼으신 주님이십니다.

마태가 세리였듯이 삭개오 역시 세리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삭개오는 어떤 자입니까?


그는 여리고 세관의 세관장입니다(1-2절).

그리고 그 지방에서 소문 난 부자입니다.


당시 여리고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가이사랴, 가버나움과 함께 3 대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여리고는 온갖 종류의 향료의 집산지였습니다.

유대인 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이 와서

향료를 사기 위해서 늘 붐비는 상업도시였습니다.

시내 곳곳에 장미꽃들로 치장된 아름다운 도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그 당시 권세가들 부자들이 사는 곳이라 합니다

이러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으면 굉장한 권력가요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부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부자라고 하면 그것은 보통 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인두세와 토지세와 통행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세금을 징수할 때에 직접 자기들이 하지 아니하고

청부업자들에게 청부를 주었고 그들은 또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세금을 부과해서

로마가 요구하는 일정액을 세금으로 바치고 그 차액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세리를 향한 유대 동족들의 평판은 매국노

죄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7절).

여리고성 세무서의 세리장 삭개오입니다.

신약에서 여기만 나오는 단어가 바로 세리장이라는 말입니다.


삭개오가 동족에게 욕먹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로마를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일제 시대 때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들을

매국노로 생각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초과 징수함으로써 부정 축재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에게 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동네를 통과하신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

아마 마태가 연락을 하였을 수 있겠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대단한 사람인데

원하시기만 하면 못 고치는 질병이 없고 훌륭한 설교자요

그 당시 랍비들보다 훨씬 뛰어난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야라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못 고칠 병이 없다는 소문도 ----

그러나 삭개오에게 더 놀라운 소식은

예수님이 죄인과 창기와 세리들의 친구요 구원자이시요

그들과 함께 어울리어 지내시기를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 번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자 하되” 이 말은 호기심이 아닙니다.

유명 인사를 보고자 하는 군중심리도 아닙니다.


헬라어 문법으로 보면

보고자 하되 - 미완료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오랜 시간 꾸준히 예수님을 그리워했다는 뜻입니다.


비록 세리장으로 부정 축재한 몰염치한 사람이지만

그는 구원을 갈망하고 주님을 보고자하는 갈망이 가득하였습니다.


영적 갈등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을 기도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삭개오의 내면 세계의 기도가 응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삭개오가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래 전부터 삭개오가 보고 싶으셨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삭개오의 내면 세계를 이미 훤히 보신 것입니다.


꽃이 아름답다고 해서 꼭 꿀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벌들은 아름다운 장미보다는 못생긴 아카시아에서 꿀을 구합니다.

벌들은 향기 좋은 백합화보다는 토끼풀꽃 (덤불크로바) 에 더 매료됩니다.


진실이란 외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없습니다.

그 작은 벌의 세계가 찾는 세계와 우리 인간이 찾는 세계와 다르듯,

주님이 찾으시는 세계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 세계에서부터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곧 나의 내면적 자아가 변화되면,

자연스럽게 나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칼을 든 살인자 사울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이면, 곧 내면 심령을 보셨습니다.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할 사자로 보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 2 : 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이리 보신 것입니다.

죄인 삭개오를 친구 삼으시고 하룻밤을 함께 유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거리로 나갔는데 이미 길 좌우에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려면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는 그 길에 장애를 만나게 됩니다.


1 ) 키가 작고 -

내 안에 있는 원인입니다.

삭개오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주저앉지 않습니다.


2 ) 사람이 많아서 -

삭개오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외부적인 장애 요인입니다.

이것 역시 삭개오를 막지 못합니다.

주님을 향한 열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강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저만치 앞에 있는 뽕나무였습니다.

뽕나무는 자신을 감추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습니다.

여기 뽕나무는 한국에서 누에고치를 먹이는 뽕나무가 아닙니다.

돌 무화과 나무를 말합니다.

하늘 높이 뻗어있는 나무 한 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 큰 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하여 나뭇가지에 사람이 앉으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무는 집을 짓는 목재로도 쓰이고

애굽에서는 미라를 보관하는 나무로도 쓰인다고 합니다.


다른 이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예수님을 가장 세밀하게 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4 절).


식개오는 창피함이나 다른 이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보기 위한 열망이 그 모든 것을 삼켰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나무를 이미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바로 그 뽕나무에 접근하셨습니다.


이 커다란 나무위에 키가 작고,

잘 먹어서 얼굴에 기름이 흐르고,

운동량은 모자라 약간 배가 나온 키가 메우 작은 삭개오.

이 마을 한 유명 인사가 버둥대며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삭개오는 창피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의 손가락질을 괘념치 않습니다.


예수님만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수고와 댓가도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삭개오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한 눈 팔지 않고 집중하여

예수님의 모든 동작과 얼굴의 변화에 주목합니다.


저만치서 주님을 옹위한 무리가 다가옵니다.

삭개오는 숨 죽이며 주님의 행렬을 주시합니다.

호흡도 멈추고 침 삼키는 여유도 없이 오로지 주님만을 주목합니다.


벌써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합니다.

온 몸에 땀이,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일이 삭개오의 목전에서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고 자기를 우러러 보시면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이 인간을 우러러 보았다는 기록은 이곳이 처음입니다.


주님께서 삭개오를 우러러 보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 말입니다.


이심전심으로 주님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된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고 계시는구나.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 알고 계시는구나.

예수님께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있는 내 중심을 보고 계시는구나.

예수님께서 내가 새롭게 살고자하는 내 열망과 기대와 꿈을 알고 계시는구나.


그뿐이 아닙니다.

이 마을 사람들, 이 도시 사람들은 나를 멸시하고 조롱했는데

예수님은 나를 알아주시구나.

내 동족, 유대인 모두 나를 벌레처럼 대하지만

예수님은 내 이름도 아시고 나를 부르시는구나.


삭개오의 가슴은 터질듯 흥분됩니다.

어찌 이런 일이 ----- 이해할 수 없는 일임에 틀립없습니다.


삭개오는 금방이라도 나무에서 떨어질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급히 내려옵니다.

어떻게 내려 왔는지 모릅니다.


그는 부자였으나 죄인이었습니다.

'공정한 자', '의로운 자', '순결하다', '순수하다'는

뜻의 좋은 이름을 가졌으나 평판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돈은 가졌으나 존경받지 못했고

권력은 있었으나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지금까지 이름의 뜻 - 순결과는 상관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 다들 속으로는

빈정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리에 나서면 아이까지라도 자기를 향하여 욕하는 소릴 듣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체념 상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금방 자기 이름을 부르실 때는

정말 친한 친구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정감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그 목소리 - 삭개오야 -------------

삭개오는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아셨을까?

그렇다면 나의 모든 과거도 아시겠지!

그렇다면 소문대로 예수님은 우리 동족들이 그토록 기다려왔던 메시야일까?

그래서 나의 미래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일까?

내 이름대로 나를 순결한 자로 회복하시는 분이실까?’


숨어있는 삭개오,

멀리서 구경꾼이 되어있는 삭개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을 때,

예수님이 눈을 들어 보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유대인들은 부보다는 명예를 더 귀히 여깁니다.

나그네가 자기 집에서 하루 묵고 가겠다는 것은 그 집의 큰 명예요 경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의 후한 인심이 소문이 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서 하루를 묵는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친구가 되시겠다고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그 누구도 감히 상상을 못 했습니다.

삭애오의 삶에 삭개오의 가정에 경사가 난 것입니다.

정말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삭개오는 흥분하여 감격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합니다.

머리가 멍하여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생전에 이런 기쁨 이런 행복을 누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간다고 동네 사람들이 수근거렸지만

이제 삭개오는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앞장서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 9 절 )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누구에게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리고에서 가장 소외된 자,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잃어버린 자 한 사람 죄인

그러나 반드시 꼭 찾아야 할 자 관심의 첫 대상자

그가 삭개오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그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최대의 관심을 집중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소외된 자였습니다.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매국노로 낙인이 찍힌 사람입니다.

구제 받을 수 없는 사람,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된 사람

그가 삭개오라고 동네 주위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리십니다.


삭개오의 구원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다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자원하시어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받아들여 아멘하며 영접하면 됩니다


삭개오처럼 말입니다.


요 15:14 - 15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입니다.

3 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의 친구로 함께 사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기를 결코 주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 땅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나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자기의 생명까지 나를 위해 내어주신 최고의 내 친구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삭개오가 가장 듣기 좋은 한 말씀이 있습니다.


눅 19 : 9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삭개오는 당시 죄인입니다.

매국노로 살아가는 외로운 자입니다.

세리와 죄인 ( 창녀 . 이방인 ) 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호적에서 제외됩니다.

천국 호적에서 빨간 줄이 그어진 자입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한 어린아이가 정원에서

맨발로 놀다가 가시에 찔려 발을 다쳤습니다.

깜짝 놀란 아이는 큰 울음을 터트렸고 거실에 있던 아이의 어머니는

울음을 듣고는 곧 정원으로 달려 나왔습니다.


아이는 아직 말을 잘 하지 못했기에 어머니는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아이가 우는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배가 고픈 줄 알고 안으로 데려와 먹을 것을 주었지만

아이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도 가져왔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도 울음이 그치지 않자 어머니는 매우 난처했고

조금 화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의 걸음걸이가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아이의 발바닥을 본 어머니는 마침내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발바닥에 큰 가시가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심스레 가시를 뽑아주자 아이는 곧 울음을 그치고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음식도 장난감도 아닌 상처를 치유하고

꼭 안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삭개오의 발에 박힌 가시를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행복이 찾아온 것입니다.

구원에서 제외된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 사실이 삭개오의 가슴이 한으로 맺힌 응어리입니다

이 한을 주님께서는 단번에 해결하신 것입니다.


가시를 제거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감격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호적에 입적되었다.

가슴이 맺힌 응어리를 한을 단숨에 해결하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 말을 듣자 꿈인지 생시인지 거의 맨붕 상태일 것입니다.

그 증표로 삭개오와 함께 하룻밤을 유숙한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지요

삭개오가 전혀 의심하지 않도록 도장을 찍은 것입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도다 라는 예수님의 죄 용서하심의 선언은

단지 삭개오 자신만 아니라 그의 모든 가족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거주하는 온 집안에 사는 가족에게도 해당되는 복음입니다.


삭개오의 부모님

삭개오의 자녀들

삭개의 주위 평판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였겠습니까 ?


자식이요 남편이요 아버지인 삭개오가 듣는 그 악평은

온 가족에게도 역시 큰 마음의 상처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와 마찬가지로

삭개오의 가족에게도 깊은 배려를 나타내신 것이 분명합니다.


가족이 겪는 아픔까지도 기꺼이 배려하시는 나의 주님은 참 멋지십니다.

우리는 또한 삭개오의 가족을 배려하시는 주님의 인간미를 보게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진하디 진한 주님의 사람냄새를 맡습니다.


삭개오가 여리고성에 사는 동족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였는가입니다

정당한 세금이 아니라 불법으로 착취하는 세금이기에 납세자들은 상처가 클 것입니다

삭개오와 그 가족들이 동족들이 내뿜는 불만으로 상처를 받지만

동족 역시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인간이 기피하는 것이 고통이고,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의무는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무에 충실한 것이 바로 윤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윤리의 주된 관심은 윤리적 행위 주체가

얼마나 착한가, 얼마나 고상한가,

어떻게 하면 착하게 되는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 사회,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는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고 고통을 가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점에 삭개오는 무지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동족들에게 해가되는 해를 끼친 존재였습니다.

삭개오는 동족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목적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자연 질서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습니다.


짐승의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는 약육강식의 법칙 (law of jungle)으로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약자를 도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수천 마리의 얼룩말 무리에서도 가장 약한 놈이 사자의 먹이 감이 되고 말지요.


그 수많은 얼룩말이 힘을 합치면 사자 몇 마리쯤은 능히 이길 수 있는데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는 약한 놈이 잡혀먹는 것을 전혀 막지 않습니다.

이것이 짐승 세계의 질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이런 약육강식을

막을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질서라 할 수 있습니다.


호브스 (Thomas Hobbes)가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 (Homo homini lupus)가 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약육강식을 막기 위하여 비록 괴물(Leviathan)같지만

국가가 필요하다는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것도 같은 논리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 당시 로마제국 ) 괴물을

이용한 악랄한 사람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의 질서에 충실한 사람이 바로 삭개오입니다.

이렇게 이기적 본능에만 충실하게 살아온 삭개오이지만

그가 주님께로 마음을 향할 때 주님은 모든 것을 다 잊으시고

삭개오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납하시고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감동하여 그의 부를 환원하겠다고 약속을 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상처를 안겨준 동족에게 배상을 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으로 인해 상처 받은 자에게 용서를 받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이러한 행위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Clementine Homilies 는 삭개오가 나중에 사도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어

가이사랴 지방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꿈만 같았던 하루해가 지고 여리고에 어둠이 깊어지자

삭개오와 예수님의 친구로서 이어지는 정다운 만남이 이어집니다.


그 날 밤 주님께서 주무신 요 이불 베게 등등

마셨던 찻잔들 - 이것들은 모두 다 토색하고 민족의 피로 채운 것들입니다.

주님이 드신 모든 음식들 또한 부정한 재물로 얻은 것들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구입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용납하시고 받아들이시고

삭개오의 마음에 평안과 행복과 구원을 선물하셨습니다.

삭개오와 함께 하룻밤 주무신 우리 주님

삭개오와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하시며 주무신 우리 주님

삭개오와 함께 차를 나누어 마시며 담소하신 우리 주님


얼마나 인간미가 넘치시는지요.

얼마나 사람 냄새가 진동하는지요.


동족에게 버림 받은 죄인을 친구로 삼으신 나의 주님을 사랑합니다.

키 작고 외로운 나날의 삶을 살아온 삭개오를 끌어 안으시고 용서하신

나의 주님을 사랑합니다.


삭개오를 배려하신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를 이토록 배려하시고 나를 영접하신 주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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