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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4)

문명충돌? 아니, 원초적 살인의 추억!


1.

<분노의 포도>와 <에덴의 동쪽>을 쓴 존 스타인벡은 이런 말을 했다 한다. “이 열여섯 절[창세기 4:1-16]은 시대, 문화, 인종과 상관없는 모든 인류의 역사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이 종족 분화 이전의 얘기임을 그가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글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이다. 아담과 하와 얘기가 그렇듯이 가인과 아벨 얘기 역시 개인 간에 벌어진 사건 얘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관한 얘기니 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읽다 보면 이 점을 깜빡 잊고 이 얘길 개인들의 얘기로 읽는 경우는 있지만 말이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가끔 그래왔다. 그럴 때마다 ‘아차, 이건 개인 간의 얘기가 아니라 일종의 원형적 이야기(an archetypal story)지…’를 되뇌며 정신을 차리곤 했다.


이 얘긴 무척 압축돼 있다. 그만큼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빈 공간을 메워 나가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그만큼 이 얘기엔 빈 공간이 많고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널려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물 바쳐야 하는 걸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을까? 아담과 하와는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 왜 야훼는 아벨의 제물은 반겼고 가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겼음을 아벨이 알았단 얘기는 없다. 거긴 관심 없다는 듯이. 그런데 가인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벨의 제물은 야훼가 먹어서 제단에서 사라졌고 가인의 제물은 먹지 않아서 제단에 그대로 있었나? 세상에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가인은 누군가가 자길 죽일까봐 두려워했을까? 그리고 가인의 아내는 어디서 나타난 걸까? 언제부터 살인이 나쁜 일로 여겨졌을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주어지기도 전인데 말이다. 어떤 짓은 계명과 상관없이 원초적으로 나쁜 짓으로 인식됐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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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출처: AK Rockefeller(http://www.flickr.com/photos/akrockefeller))


이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가인과 아벨 얘기가 아무 대답도 내놓지 않기에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얘기가 본래는 복잡한 플롯과 디테일을 갖춘 독립된 얘기였는데 구약성서에 들어왔을 때 지금 모양으로 축소, 축약됐다고 추측해왔다. 그렇게 추측할 근거는 충분치 않지만 관습적으로 그래왔다. 일종의 관행이 돼버렸다고 할까. 이 얘기뿐 아니라 전후 연결이 부자연스럽거나 설명 없는 빈 공간이 많은 얘기에게도 같은 추측이 적용됐다. 그런데 이 추측대로 얘기가 ‘다듬어졌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가 쉬워져야 하는 게 아닐까. 연결도 자연스럽지 않고 읽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겠나 말이다. 그러니 달리 생각할 수는 없을까 싶다. 이 얘긴 본래부터 연결이 잘 안 됐고 빈 공간이 많게 ‘의도’됐다고. 그래서 읽는 사람이 상상력을 발휘해서 연결 안 되는 부분을 연결하고 빈 공간을 메워가면서 읽게 하려고 저자가 본래부터 의도했다고 말이다. 요즘은 이런 글이 흔하다. 이게 지나치면 안 되지만 정도껏 하면 읽는 재미가 있다. 요즘 저자들도 그런데 옛날 저자라고 그렇게 하지 말란 법 있나. 그런 의도로 글 쓰지 말란 법 있나 말이다. 물론 이 역시 입증할 방법은 없다.


2.

스타인벡의 말이 아니더라도 가인과 아벨 얘기는 꼼꼼히 읽어볼만하다. 그 동안은 짧아서 그런지, 결과가 참혹해서 그런지 거기 도달하는 과정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경향이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장황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문장의 뜻만 따져가면서 한 번 읽어보자.


1절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전반부엔 문제가 없다. 우리말로나 영어로나 히브리 원어로나 뜻이 명백하다. 하지만 후반부는 그렇지 않다. 하와는 “야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고 했다. 영어로도 “I have gotten a man with the help of YHWH.”로 되어 있어서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정작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야훼와 더불어(with YHWH) 남자(a man)를 낳았다.”가 돼야 한다. 영어와 우리말 번역본은 하와와 야훼가 성관계를 갖는 걸 상상할 수 없어서 ‘도우심으로’라는 말을 첨가했지만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 흠, 시작부터 곤혹스럽네…. 전반부에선 분명 아담이 하와와 동침했다고 했다. ‘동침하다’를 표현할 때 구약성서는 ‘알다 to know’라는 동사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이젠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후반부에선 ‘아담과 더불어’가 아니라 ‘야훼와 더불어’일까? 자식은 부모의 결합을 통해 생겨나지만 궁극적으론 야훼의 창조물임을 강조하려는 뜻일까?


2절은 이렇다.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텍스트는 누구와 동침해서 아벨을 낳았고 적시하지 않는다. 시간상으론 아벨이 가인의 아우임이 당연한데 굳이 아벨을 ‘가인의 아우’라고 불렀다.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려 했을까? 그 다음에 둘의 직업을 밝힌다. 여기서 이 얘길 유목문화와 농경문화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생겼다. 일종의 문화인류학적 해석인데 과연 이게 둘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갈등의 기원을 따지려는 얘길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있다면 그건 텍스트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절은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야훼께 제물로 바치고”라고 했다. ‘세월이 지난 뒤에’를 영어성서는 ‘in the course of time’이라고 번역했는데 애매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다는 말도 없고 무엇을 하는 중간인지도 밝히지 않으니 말이다.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 at the end of days’라고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농사의 한 사이클이 끝나는 시점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게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농경문화에서 시간은 순환적(cyclic)이니 말이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소출을 거둘 때가 있고 우기와 건기가 반복되는 것처럼.


4절과 5절이 문제다.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빛이 달라졌다.” 이 구절에는 많은 이슈들이 있다. 왜 사람은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을까? 그걸 어디서 배웠을까? 야훼가 그렇게 명했나,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랬나? 부모에게 배웠다는 말도 없다. 양 치는 목자가 양 떼 가운데 맏배의 기름기를 바친 건 당연하다. 밭가는 농부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제물로 바친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안 그런가? 그런데 왜 야훼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지 않았을까? 그냥 이유 없이 야훼 맘대로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야훼가 그랬다면 그런 줄 알면 되나? 이래서야 어디 무서워서 야훼에게 제물 바치겠나…. 왜 그냥 ‘가인이 바친 제물’, ‘아벨이 바친 제물’이라 하지 않고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 썼을까? 야훼가 제물을 ‘반겼다’는 말과 ‘반기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흔히 반겼다는 말은 야훼가 제물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데 그럼 왜 ‘받았다’고 하지 않고 ‘반겼다’고 했을까? 제물을 ‘받다’는 말이 구약성서에 흔한데 말이다. 느낌만으로도 전체의 의미가 이 구절에 달려 있다 싶다. 안 그런가? 하지만 이 구절은 얘기 전체에서 가장 구멍이 많은 부분, 따라서 가장 활발하게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6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가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로 번역한 말을 영어성서는 ‘why has your countenance fallen?’라고 번역했는데 이는 히브리 원어의 직역이다. 우리말 직역은 ‘왜 얼굴을 떨어뜨렸느냐?’가 되겠다. 곧 야훼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가인이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거다. 고개를 숙였다는 얘긴데 이 말이 뭘 상징하는지는 정확하게 추측하기 어렵다. 분노의 표현일 수도 있고 실망이나 좌절의 표현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네가 올바른 일을 했으면”과 7절에 나오는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면”(인용한 새번역성서에는 조건절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이란 조건절도 문제다. ‘올바른 일’이나 ‘올바르지 못한 일’이 뭘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일반적인 윤리 문제인지 아니면 제물 바치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인지가 분명치 않다. 마지막 부분의 “어찌하여 얼굴빛이 달라지느냐?”는 지나친 의역이다. 히브리 원문에는 ‘올리기’ 또는 ‘치켜 올리기’란 뜻을 가진 부정사 한 단어다. 영어성서도 RSV는 “will you not be accepted?”라고 모호하게 번역했고 JPS는 “there is uplift”라고 거의 직역했다. 분명한 건 이게 ‘조건절’이란 사실이다. 올바른 일이 뭐든 만일 네가 그걸 했다면 고개를 들라는, 또는 들 것이란 얘기다.


7절은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첫 문장은 조건문이므로 “만일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다면”이 정확한 번역이다. 만일 그렇다면 “죄가 너의 문에…”라는 거다. 성서에서 ‘죄’란 말이 여기에 처음 나온다. 여기서 ‘문’이 대문이나 성문을 가리키는 게 아님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럼 어떤 문일까? 마음의 문? 영혼의 문? 어디가 됐든 문에 ‘도사리고’(또는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말은 그게 ‘외부’에서 누군가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겠다. 이에 대해 마틴 부버는 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바깥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거다.”라는 말을 했는데 의미가 알쏭달쏭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말이 아닌가 싶다. 죄가 마음(또는 영혼)의 문 밖에서 성난 개처럼 웅크리고 앉아 물어뜯으려고 노리고 있다. 하지만 가인은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그런 뜻에서 RSV는 “you must master it”라고 번역했는데 JPS는 “you can be its master”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이와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다스려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니 말이다.


8절은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라고 말한다. 여기도 메워야 할 구멍이 있다. 히브리 원문에는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이 없다. 가인이 말은 했지만 내용이 빠진 채 바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로 이어진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 뭔가 빠진 게 틀림없다. 그래서 아람어 번역인 타르굼은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고 다른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갔다. 타르굼이 잘 한 걸까? 그래 보인다. 말을 했는데 내용이 없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그런데 혹시 여기에 저자의 의도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결론짓기 전에 꼼꼼히 따져 봐도 늦지 않을 거다. 왜 가인은 아벨을 하필 ‘들’(field)로 데리고 갔을까? 그가 아벨을 왜 쳐 죽였는지도 궁금하고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야훼인데 왜 아벨을 죽였는지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아벨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9절은 “야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읽는다. 여기가 얘기 전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부분이란 느낌이 확 오지 않는가. 앞 장에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야훼는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는다. 정말 몰라서 물었을까? 그런 거 같다. 아는데 짐짓 모른 척 묻진 않은 거 같다. 그런데 가인은 알면서도 모른다고 했다. 그것도 짐짓 불쾌하다는 듯이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말이다. 이 구절은 심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많은 이슈를 갖고 있다. 그것들을 따지기 전에 ‘거 참 나쁜 놈이네…’하는 생각이 즉시 들지만 말이다. 그 얘긴 나중에 해보자.


10절은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는 물음을 성서에 나오는 ‘기념비적인 문장들 중 하나’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불의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죽은 자, 특히 (억울하게) 살해된 자의 피가 하느님 들으라고 땅에서 울부짖는다는 얘기는 민간신앙에서도 흔하다. 민수기 35:33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너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가 땅에 떨어지면, 땅이 더러워진다. 피가 떨어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그 살해자의 피가 아니고서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얘기 전체를 통해서 아벨은 한 마디도 말을 안 한다. 설화자는 그에게 목소리를 주지 않는다. 그는 죽어서 비로소 말한다. 정확히는 땅에 쏟아진 그의 ‘피’가 목소리 높여 하느님께 울부짖는다. 자기 얘길 들어 달라고 말이다.


11절은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이다. 첫 문장의 뜻이 모호하다. RSV는 우리말 성서처럼 “you are cursed from the ground”라고 번역했는데 JPS는 “you shall be more cursed than the ground”라고 번역했다. 둘의 뜻은 적지 않게 다른데 히브리 원어는 둘 다 가능하다. 전치사 ‘민 min’에는 비교급 ‘~보다 than’와 ‘~으로부터 from’ 두 가지 뜻이 다 있다. JPS는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한 짓 때문에 땅이 저주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가인이 그때 저주받은 땅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12절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이다. 이젠 가인이 땅을 갈아봐야 헛심만 쓰게 될 뿐이다. 그 결과 그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자가 될 거다. 유목민은 본래 떠도는 사람이지만 농사짓던 자가 떠돌이가 된다니 이런 저주가 어디 있겠나.


13절은 “가인이 야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로 읽는다. 사람을, 그것도 자기 동생을 죽여 놓고 떠돌아다니는 게 너무 무거운 짐이란다. 남의 고통은 작아 보이고 자기 고통은 커 보이는 게 사람이긴 하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수장해놓고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사람들도 많은 세상이니 가인을 ‘철면피’라고 부르는 건 지나칠 수 있다. 그래도 그가 뻔뻔한 건 부인할 수 없다.


14절은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느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는 둘 다 ‘이 땅’이라고 번역했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전자는 ‘먼지의 표면으로부터 from the face of the dust’이고 후자는 ‘땅 위에서 on the earth’이다. 전자는 ‘먼지’, ‘티끌’을 의미하는 ‘아다마’이고 후자는 ‘땅’이란 뜻의 ‘에레쯔’다. 왜 둘을 구별했을까? J 기자에 따르면 사람은 ‘아다마’에서 와서 ‘아다마’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인데 거기서 추방당했다는 말인가? 누가 가인을 죽이려 한다는 걸까? 글자 그대로 읽으면 세상엔 아담(언제부턴가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와, 그리고 가인 밖에 없지 않나! 부모가 자길 죽일 리는 없고 대체 누가 자길 죽일 거라고 이토록 두려워하는가 말이다. 자기는 동생도 죽였으므로 부모도 자길 죽일 수 있다고 두려웠던 걸까? 설마…. 또한 그는 왜 가인을 죽이려는 걸까? 보복? 대관절 누가? 보복은 인척이든 친분이든 피살자와 관계있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닌가.


15절은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 야훼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적었다. 이건 ‘눈에는 눈으로 이(齒)에는 이로!’를 훨씬 뛰어넘는다. 가인을 죽인 자는 일곱 갑절로 벌 받을 거라니, 일곱 명을 죽이겠단 얘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가인을 이처럼 아낄 거면 왜 야훼는 그와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을까? 야훼는 애지중지하는(?) 가인에게 표를 찍어주어 그를 보호했단다. 구약학자들은 이 ‘표’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두고 머리 싸매고 고민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지만 속 시원한 답은 ‘아직’이다.


16절은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이다. 이 구절 덕분에 스타인벡이 소설을 썼고 엘리아 카잔이 영화를 만들었으며 제임스 딘이 스타가 됐다. 그러니까 가인은 에덴의 동쪽, 야훼가 없는 곳(“야훼 앞을 떠나서”)인 놋에서 야훼 없이 살았단 얘기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무소부재하다는 교리는 어디론가 실종이다.


3.

자, 이젠 각 절이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이 잡혔을 터이니 이슈들을 살펴보자. 앞에서 이 얘긴 원형적 이야기(archetypal story)라고 했다. 곧 인간세상의 중요한 사건이나 현상의 근원적, 근본적 의미를 다루는 얘기란 뜻이다. 이 얘기에는 농경과 목축, 제사, 살인, 죄, 추방, 하느님을 떠난 삶 등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것들이 갖고 있는 원초적 의미가 뭔지 생각해볼 차례다.


창세기 2, 3장에서처럼 여기서도 하느님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대화를 나눌 정도로 가깝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듯이 여기서도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라고 묻는다. 하느님은 살인자 가인에게 벌도 내리지만 두려워 떠는 그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그를 죽이는 자에겐 일곱 갑절로 보복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가인의 몸에 ‘표’를 찍어줘서 그를 죽이지 못하게 조치한다. 참으로 자애로운 하느님 아닌가! 살인자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보호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가인에겐 이처럼 자애로운 하나님이 가인의 잠재적 가해자에겐 지나치게 가혹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인 ‘갑질’을 여기서도 하는가? 여기서도 “나는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부어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긍휼을 부어준다.”(출애굽기 19:33)는 유일신의 절대주권이 통하는가?


나는 다신교가 절대대세인 세상에서 특이하게 유일신교를 믿었던 이스라엘이 느꼈을 당혹감에 공감한다. 참 곤란했을 거다. 이해되지 않는 점들도 많았을 거다. 다신교를 믿었다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유일신교를 믿어서 곤혹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을 거다. 모든 게 하느님 맘대로 ‘갑질’하는 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고 인과관계를 따져보려고 애썼던 그들의 신앙적, 신학적 고뇌에 적지 않게 공감한다.


왜 야훼가 아벨과 그의 제사를 반겼고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반기지 않았는지 그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가인과 아벨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 제사가 뭔가? 왜 사람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가? 그게 그들 삶에서 무슨 역할을 했을까? 그걸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려 했을까? 이에 대해선 무수한 이론이 있지만 결국 제사란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행위 가운데 하나다. 또한 결과적으론 그걸 통해 신이 누굴 선호하는지가 드러나는 게 제사다. 여기엔 신의 마음을 얻으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한 신의 평가와 판단이 관련되어 있고 결과적으로 구별과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그 판단의 기준이 뭔지는 전적으로 신에게 달려 있다. 사람은 그게 뭔지 추측할 뿐이다.


가인과 아벨이 야훼에게 제물을 바쳤다. 각각 자기가 거둔 것으로 말이다. 제물의 종류에서 신의 선호와 비선호의 이유를 찾는 것은 옳지 않다. 구약성서에서는 둘 다 적법한 제물이니 말이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로 보는 것도 안 맞는다. 이스라엘은 둘 중 하나에 속한 게 아니라 둘 다 경험했다. 그들은 정착생활하기 전엔 반(半)유목, 반(半)농경생활을 했다. 텍스트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이라고 표현한 데 지나치게 무게두는 것도 옳지 않다. 제사의 정당성이 궁극적으로 제물의 재료에 달려 있지 않고 그걸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음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신이 제물이 뭔지에 좌우될 정도로 어리석다고 여길 멍청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따라서 야훼가 가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던 건 그를 아벨과 비교, 평가, 판단해서 아벨과 구별한 행위였음에 분명하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반기기엔 부족한’ 인물 됨됨이 및 제물로 평가됐는 거다. 그런데 이 판단이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것이었다면 설화자가 다음 얘길 이어갈 이유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설화자는 얘길 거기서 끝내지 않고 살인사건과 그 이후의 얘기로 이어갔다. 이것은 제사 수납 여부가 전체의 클라이맥스가 아니란 뜻이다. 정작 하려는 얘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거다. 할 얘기가 더 있다는 말이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다는 게 곧 그를 최종적으로 싫어하거나 미워한 건 아닐 수 있다. 막말로 가인이 ‘어, 내가 뭘 잘못한 모양이네. 그럼 다시 하지 뭐….’ 할 수도 있었지 않았냐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얘길 더 이어갈 이유가 없지 않나 말이다. 안 그런가?.


야훼가 자기와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자 가인은 화가 나서 얼굴을 떨구었다. 이런 그에게 야훼가 묻는다. 왜 화를 내냐고, 왜 얼굴을 떨구냐고. 그 다음에 야훼는 조건문 형식의 두 마디 말을 한다. 만일 네가 올바른 일을 한다면(미완료형) 고개를 들어라! 만일 네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가 네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다스리려 하는데 너는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또는 다스릴 수 있다)! ‘올바른 일’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일반적인 윤리일 수도 있고 제사를 제대로 드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야훼가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게 그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짓진 않았다는 얘기다. 여전히 그에게 미완료 조건절을 적용하는 걸 보면 아직 그에겐 상황을 바꿀 기회가 있다. 올바로 행한 후에 고개를 들면 된다. 아직 끝이 아니다. 물론 그가 올바르지 않은 일을 한다면 죄라는 사나운 개에 물어뜯길 수 있다. 죄는 마음(영혼) 문에 웅크리고 앉아서 널 물어뜯으려 하니 고개를 들고 그 머리통을 밟아라!


여기에 성서에서 처음으로 ‘죄’란 말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구약학자들이 얼마나 많은 주장을 내놓았겠나. 그것들을 모두 살피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고 몇 가지만 얘기하련다. 우선 ‘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의 어원이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르침’을 뜻하는 ‘토라’가 ‘과녁을 향하다’란 뜻이므로 둘은 대조되는 뜻을 갖는다. 과녁을 향하는 게 토라인데 그걸 빗나가는 게 죄란다. 어원은 그렇고, ‘죄’가 문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미 행해진 게 아니라 행해질 가능성이 있는 뭔가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게 맞겠다. 영어로 ‘culpability’란 말이 여기 딱 맞는다. 그러니까 가인은 제사를 잘못 드려서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죄지을 가능성에 노출된 거다.


4.

가인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우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설화자는 8절에서 가인이 아벨에게 말했다고 하곤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이를 아쉬워한 타르굼이 “이리 오라, 우리 들로 나가자.”라는 말을 집어넣었다고 했다. 논리적으론 타르굼이 옳다. 얘기의 흐름 상 그래야 했다. 하지만 설화자가 의도적으로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빼버렸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없으니 우린 그의 생각을 알 도리가 없지만 얘기 처음부터 끝까지 가인과 아벨이 한 마디도 대화하지 않는 게 정녕 우연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무대에 등장하는 하느님, 아담, 하와, 가인, 아벨 중 가장 존재감 없는 인물은 아담이고 그 다음이 아벨이다. 둘의 공통점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는 거다. 정말 그럴까? 아담의 경우는 그런데 아벨은 아니다! 그는 말을 했다! 죽은 다음이긴 하지만 말이다. 살아 있을 때 가인과 소통하지 않았기에 죽어서 하느님에게 울부짖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설화자는 이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둘 사이에 있어야 할 대화를 의도적으로 뺀 게 아닐까?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가?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은 아벨의 위치뿐 아니라 그의 상황, 둘 사이의 관계까지를 묻는 물음이다. 가인은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잡아떼면 하느님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담과 하와는 숨긴 했지만 거짓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살해한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하느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느님을 그렇게 ‘헐렁한’ 존재로 봤나?


가인은 왜 아벨을 살해했을까? 그에게 무슨 죄가 있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반기지 않은 건 아벨 아닌 야훼였다. 그런데 그의 분노는 아벨을 향했다. 왜? 감히 하느님에게 화낼 수 없어서 아벨을 속죄양으로 삼은 걸까? 분노를 쏟을 데를 찾지 못하다가 만만한 아벨에게 퍼부었나? 프로이드는 때론 죄에 대한 인식이 범죄행위를 앞선다고 말했다. 죄의식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인은 하느님에 대해 신뢰와 증오라는 두 개의 감정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하느님을 믿었지만 자기 제물을 반기지 않아서 그를 미워하게 된 거다. 그래서 그는 증오를 마땅히 하느님에게 쏟아야 했지만 그러기엔 하느님은 너무 강하다. 그래서 하느님을 대체할 존재를 찾아야 했는데 그게 아벨이었다는 거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건 대상을 잘못 찾은 증오심(displaced hatred) 때문이다. 이유 없이 남을 미워할 수 있는데 이때 증오의 대상은 단지 그 증오가 퍼부어질 대상이 있어야 하기에 그에게 퍼부어졌을 수 있다.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을 때 가인은 아우에 대해서 심리적인 장벽을 쌓았다. 이제 아벨은 아우가 아니라 하느님 대신 분노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됐다.


그의 무도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퉁명스럽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다. 둘 사이가 이렇게 멀었나? 언제 이렇게 멀어졌을까? 둘은 서로에게 극도로 무관심했나?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관계의 단절 선언이 아닌가. 본래부터 둘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이는 모순이다. 아벨을 ‘아우’라고 부르면서 관계없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우’가 뭔가? 그건 ‘관계’ 아닌가. 우리식으로 2촌 관계가 형제관계다. 부모자식 다음으로 가까운 게 형제인데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니! 네가 아니면 누가 지키는데?


이렇게 가인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나는 너를 지키는 자여야 하고 너는 나를 지키는 자여야 한다. 그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인데 가인은 그걸 부정했다. 굳이 프로이드에 따르지 않더라도 아벨은 가인의 다른 모습임이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리고 신은 둘이 함께 투영된 형상(image)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그는 형제를 죽였고(fratricide), 자신을 죽였으며(suicide), 동시에 하느님을 죽였다(deicide). 구약학자들은 가인과 아벨의 관계를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이나, 농부 사울(사무엘상 11:5)과 목동 다윗(사무엘상 16:11)의 갈등 등으로 처음부터 갈라놓고 봐왔다. 이 역시 옳지 않다. 텍스트는 둘(또는 하느님과 더불어 셋)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줄곧 강조한다. 둘(셋)은 본래부터 남이 아니다. 둘(셋)이 본래부터 대립적이었다고 보는 건 옳지 않다. 둘(셋)은 이 사건으로 인해 갈라졌고 관계가 깨졌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다. 제사가 주된 원인이 아니다. 그게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했지만 제사보다는 살인과 그 후의 책임회피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 거다. 이 상황에서 땅에서 울부짖는 아벨의 피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건 올바른 관계의 회복을 호소하는 모든 억울한 죽음의 울부짖음이 아닐까?


그 다음엔 시선이 온전히 ‘땅’으로 향한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야훼에게 울부짖고, 가인이 ‘땅’보다 더 저주를 받을 것인데 그 까닭은 ‘땅’이 그 입을 벌려서 아벨의 피를 가인의 손에서 받아 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그에게 효력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고 그는 ‘땅’ 위에서 쉬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란다. 이에 가인이 엄살을 부리며 자기를 ‘땅’에서 쫓아내니 이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라고 호소한다. 그렇게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죽이려 할 거란다. 이에 야훼는 그에게 일곱 갑절로 복수할 것이고 가인에게 표를 찍어 주어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에 가인은 야훼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는 걸로 얘기가 끝난다.


땅, 땅, 땅…. 부동산 투기 얘기도 아닌데 땅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 아니냐고 불평할 만하다. 땅 투기했다 손해 본 사람은 지겨워서 안 읽고 지나갈 만도 하다. 하지만 땅 투기 얘긴 아니니 염려 마시라.


가인은 아담이 저지른 짓으로 인해 땅이 당한 저주보다 더 큰 저주를 받아야 했다. 아벨의 피가 흐르는 땅은 그에게 소출을 내주지 않을 거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 땅 어딘가에 묻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벨은 어디나 존재하게 됐다. 참 대단한 역설 아닌가! 가인은 아벨을 죽여 무존재로 만들려 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아벨은 온 땅이 울부짖음으로 현존하게 된 거다. 이 때문에 농부 가인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했다. 어딜 가도 아벨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는 쫓겨나서 하느님 얼굴을 못 보게 됐지만 아벨의 울부짖음은 어디서도 들렸다. 아벨은 울부짖음으로 부활한 거다. 그는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다. 그래서 사랑받던 자의 울부짖음 때문에 하느님을 졸지도 잠자지도 못한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영원히 되새겨 주는 게 이 울부짖음이다. 시편 94편의 시인도 이와 비슷한 맘이었지 싶다.


야훼님, 야훼님은 복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복수하시는 하느님, 빛으로 나타나십시오…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악인을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들을 대항할까?

야훼님께서 나를 돕지 아니하셨다면

내 목숨은 벌써 적막한 곳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1, 16-17절).


가인은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강박증 환자가 된 거다. 아우를 가차 없이 실해한 그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공포에 시달리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인가. 가인의 방랑은 혼돈(chaos)을 상징한다. ‘계명’은 삼라만상을 창조한 하느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다리(bridge)다. 세상의 질서는 계명을 지킴으로써 유지된다. 계명이 지켜지지 않으면 세상은 태초의 혼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담과 하와 때문에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란 얘기(창세기 3:18)와 가인의 방랑이 이걸 상징한다.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합(창세기 6:2)이 낳은 혼돈과 바벨탑으로 인한 언어의 혼란 역시 계명을 어긴 결과 초래된 혼돈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만일 네(가인)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이라는 조건절이 갖는 무게는 무겁기만 하다. 올바른 일을 하면 이런 혼돈은 벌어지지 않는다.


5.

구약성서 종교는 유일신 종교다.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신이 모든 걸 갖고 있고 모든 걸 주관한다고 믿는다. 그에게 권력을 나눠 받을 다른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절대권력자다. 하지만 동시에 유일신 야훼는 사람 없이는 의미가 없는 신이다. 야훼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구약성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는 철저하게 ‘나와 너 I and Thou’의 관계(마르틴 부버)다. 성서는 이런 하느님과 사람의 상호성(reciprocity)을 질리게 반복해서 말한다. 사람인 ‘너’ 없인 하느님인 ‘나’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둘 다 철저하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격이므로 둘의 관계는 ‘나와 그것 I and It’의 관계가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인 거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것도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선택하기로 선택했고 그들은 선택되기로 선택한 것이다(they chose to be chosen)!


하느님의 권위와 힘은 강제력과 구별해야 한다. 하느님의 힘은 사람이 올바르게 행하는지 여부와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다(7절). 이럴 때 ‘의존’이란 말은 적절하지 않아 보이지만 내용상으론 그렇다. 세상질서는 사람들이 계명을 준수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서 “만일 네가 올바르게 행한다면…”이란 문장이 매우 중요하다. 세상질서가 여기에 기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올바르게 행하도록 가인을 강요하진 않았다. 하느님은 그의 도덕적 결단을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않았다. 가인조차 하느님의 정당한 파트너로 존중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omnipotence)은 사람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하느님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절과 통제를 포기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무능(impotence)은 전능(omnipotence)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가인은 아우를 죽이고 추방당해 하느님 없는 땅을 방황했다. 마지막 절은 그가 에덴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방랑인가! ‘놋’ 땅에 정착했다면서! 그런데 ‘놋’이란 말이 히브리어 ‘방랑하다’의 언어유희라면 어떤가? 그가 정착해서 방황했고 방황하며 정착했다는 뜻으로 읽어야 할까. 이 얘긴 끝까지 멋을 잃지 않는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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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주영 2015.01.27 02:11

    안식일교회에서 줄기차게 가르쳐지는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 이야기의 핵심 포인트는 바른제사와 잘못된제사 - 순종과 불순종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피를 바쳐야 하는데 (메시야의 대속을 예표하기 위해 그걸 언젠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셨을거라고 기정사실화하고) 불순종하여 농작물을 드린 것
    그것이 가인의 죄였으니 가인처럼 되지 말아라.
    그로부터 시작하여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건 가인의 제물이고 토요일에 예배드리는게 아벨의 제물이다 까지로 발전했지요.
    마음, 동기,정성, 순수,절실, 제물의 질... 그 어떤것도 충분하지 않다. '바른' 제물이 있다.
    이게 우리의 줄기찬 멧세지였습니다. 율법적이죠 :)

    곽목사님이 잠깐언급한대로 양이나 농작물이다 모두 적법한 제물이었습니다.
    레위기에도 번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제와 전제도 있었지요.

    아벨은 한 번 입도 뻥긋 안하는, 이 이야기의 단역입니다.
    주인공은 가인과 야훼.
    가인은 살인자요 뻔뻔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 있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영혼이 살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제물이 반겨지지 않아서 못견뎌한 것
    야훼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못견딜 형벌로 이해한 것...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반기지 않았지만 그를 포기하지 았았더라. 살려 주셨더라.  보호까지 해 주셨더라. 


    아벨이 입도 뻥긋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
    우리 대부분은 아마 가인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최초의 살인 기록의 복음이 아닐까...


    하나님의 세계는 무죄한 아벨의 피를 허지로 돌리지 않고 '불려서' 계산하지만
    동시에 살인자 가인도 하나님과 대화하더라.  He minds the criminal. 

     이것이 복음이 아닐까...

  • ?
    Rilke 2015.01.27 11:35

    흠 (Hmm !)

    대표적인 "곽빠"로 자칭했는데, 이런 좋은글이 있는줄 몰랐네요.

    "아기자기"님에게 "곽빠 대표" 자진 반납 (?) 합니다.

    그리고 테크놀로지에 그렇게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는데, 이역시 "아기자기"님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겠습니다. 마지막 줄에 소스를 알려주어서 "꽃자리"를 찾아 갔는데, 카피가 않되게 되어 있던데, 어떻게 카피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곽목사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Many more blessing to you and your family!"

    목사님 홈페이지에 있는 "구약산책 - 창세기 편"을 일전에 읽은적이 있어서, 위에 있는 글도 그곳에 있던 글인줄 알고 대충 읽다가 "깜짝 놀라서" 자세히 읽었습니다.

    그곳에 있지 않은글이고 새롭게 쓴 글이네요.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길고 자세한 글" 스타일로 (저와 제 아내는 여전히 목사님 설교와 설교문이 너무 짧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좋은글이네요.

    깊이가 있어서 좋고,

    연구가 있어서 좋고,

    무었보다도, 뛰어난 인사이트 (Insights, 통찰, 영감, 새로움 ?)가 있어서 더더욱 좋습니다.


    작년엔가 제작년에 아내가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에 대해서 물어보아서, 평소 궁금했던차에 연구(?)를 했었습니다. 김원일교수님이 추천한 Westermann 의 주석을 많이 참고 했고, 창세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하는 Gerhard Von Rad 의 책도 보았더랬습니다. 아내에게 나름대로 설명을 한후에 청소년들과는 나중에 창세기 공부할때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덮었는데,

    시간도 없었고 인사이트가 약해서 가인의 살인과 그 후의 이야기는 자세히 공부를 안했는데, 답은 거기에 있었네요.

    역시,

    떰즈 업!


    3년 군대 마치고 1년 선교사 갔다 와서, 큰누나 집에 들렸었는데, 그날 저녁에 티브에서 "모래시계" 마지막편 마지막 장면 (두 남녀 주인공이 지리산? 꼭대기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봤었습니다.

    물론, 막 선교지에서 돌아온 (영이 충만한?) 저에게는 티브 드라마가 눈에 들어오지 않은것은 당연한 것이었 겠지요.

    몇년이 흘러 미국에 와서 (영이 고갈된?), 우연히 모래시계를 처음부터 보았었습니다.

    마지막 두 친구가 옥중에서 대화하던 장면이 자주 떠오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장면후에에 마지막 장면 "나, 떨고 있니?"가 더 유명하겠지만.

    유치장에 있는 태수를 방문한 우석이, 왜 자기가 태수에게 형을 내릴수 없는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광주"일 때문이라고,

    거기서, 태수는 시민군 그리고 우석은 계엄군

    우석은 광주에서의 경험때문에 어려서 부터 꿈꾸어 오던 고시의 길을 포기 했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때문에 다시 왔지만).

    계엄군으로 시민군에게 총을 쏘았던 자기가 어떻게 너 (태수)를 판단 (형을 내리는)을 할수 있겠냐고,

    제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대사는, 이후에 이어지는 태수의 말입니다.


    "그 후가 중요해".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랬동안 "죄에 대하여, 죄짓는것에 대해서" 주로 생각하고, 연구하고, 설교해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가장 중요한 "그 후" 를 놓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쩌면 성경은, 특히 창세기는 "그 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창세기 자체가 "그 후"에 기록되었기에,

    복음은 "그 후"에 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오후에 해 봅니다.



    여러가지 많은것을 얻을수 있지만, 저에게는 두가지가 아주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 후"

    그리고

    "대화 (하나님과 가인)"


    학자다운 논리를 잃지 않으려 하면서, 목사다운 영감을 드러내려 하는 아주 좋은 글 (설교)입니다 (글에 대한 평이 아니라, 그냥 제 마음입니다).


    thanks,

    ps; 좋은글 올려주신 "아기자기"님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김주영님의 답글도 감사합니다.

  • ?
    아기자기 2015.01.27 20:31

    중요한 것은 유일신 종교의 '방향성'이겠습니다.

    "우선 ‘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의 어원이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뜻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가르침’을 뜻하는 ‘토라’가 ‘과녁을 향하다’란 뜻이므로 둘은 대조되는 뜻을 갖는다.
    과녁을 향하는 게 토라인데 그걸 빗나가는 게 죄란다."

    방향성의 잘못(이탈)이 죄이고
    죄, 그 후의 방향성이 가인(불만,방랑,혼돈)과 다윗(회개,회복,구원)의 차이겠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희생자(아벨)도 잊지 않으시고 품으시지만
    죄인(가인)도 잊지 않으시고 품으신다.

    사랑은 서로를 지키는(살리는) 것이며
    죄(=살인)는 fratricide, suicide, deicide, 형제와 자신과 하나님을 죽이는 것!

    살아도 죽은 자는 가인이고
    죽어도 산자는 아벨이다.

    억울한 아벨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음으로 부활했다면
    원통한 세월호 희생자들의 피가 바다에서 울부짖음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땅의 울부짖음에 혼돈과 방황이 있었듯이
    세월호 사건 책임자들의 후예들도 바다의 울부짖음에 혼돈과 방황이 있을 겁니다.

    세상의 질서가 유일신의 계명을 지켜야 유지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성인 선하심과 공의를 지켜야 된다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선과 공의가 인간이 지켜야할 유일한 계명이란 의미아닐까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정의에 기반을 둔 선함이며, 선함에 기반을 둔 정의이여야 하며
    이것은 또한 자비와 사랑이겠습니다.

    놋(방랑), 아벨(허무)... 등의 단어의 의미는 추후규정성이 있었을 겁니다.

    읽으면서 써놓은 메모입니다.
    원글에 누가 될까 염려되지만^^

    Rilke님, 한 번 '곽빠 회장'이면 영원한 회장입니다^^

    "꽃자리", 카피의 길은 마음이 좋은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가져오려고 만하면 길이 안 보입니다
    남겨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comment를 클릭하시고 댓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홍해가 열리는 기적을 볼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감사합니다!

    곽목사님, 감사합니다!


    추)"할 수 있는 모든 조절과 통제를 포기하는" "무능(impotence)은 전능(omnipotence)의 한 부분"

    인상적인 깨우침이며, 하나님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한 교훈 같습니다!


  • ?
    곽건용 2015.01.28 05:13
    세 분이 저로 하여금 댓글을 안 쓸 수 없도록 만드시는군요. ^^ 요리사는 먹는 사람이 맛나게 먹는 걸 보면서 요리한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허접한 글이나마 쓴 사람은 세 분처럼 글의 내용 이상으로 읽어주시는 분 때문에 보람을 느낍니다. 가인, 아벨 얘기는 적어도 세 가지 시각으로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성경에 나오니까 당연히 신학적 관점이 있겠고 그 다음으로 문화인류학적 관점으로도 읽을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심리학적 관점도 가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프로이드로 이 얘기에 주목했겠지요.

    구약산책은 오래 전에 쓰다 중단했는데 거기엔 가인, 아벨 얘기를 쓰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요즘 그 글들을 오랜만에 읽어봤는데 너무 주저리주저리 너절하게 썼더군요. 거의 '만담'처럼 말입니다. 그때로부터 저도 적지 않게 변한 모양입니다. 글을 쓰는 스따일도 달라졌구요. ^^

    지금은 노아 홍수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구약산책과는 전적으로 다른 글이 되겠습니다. 작년에 나온 애로노프스키의 영화 <노아> 얘길 좀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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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오케이, 오늘부터 (2014년 12월 1일) 달라지는 이 누리. 29 김원일 2014.11.30 11983
공지 게시물 올리실 때 유의사항 admin 2013.04.06 38318
공지 스팸 글과 스팸 회원 등록 차단 admin 2013.04.06 55214
공지 필명에 관한 안내 admin 2010.12.05 87121
4815 뚝따 뗀뚝 모모 김균 2015.01.25 502
4814 천국 간다고? 짬뽕들 2 김균 2015.01.25 530
4813 글은 이 정도 써야 한다 걱정원 2015.01.25 496
4812 [단독]네이버 밴드 했다는 이유로 ‘독방 대기발령’ 받은 우체국 노조원 2015.01.25 492
4811 용이란 미국이 아닌 위대한 미국 우리 대통령과는 생각이 다르다 걱정원 2015.01.25 394
4810 너무 늦은 사과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2 아침이슬 2015.01.25 527
4809 나는 안식교에서 그리스도인을 만나본 일이 없다 4 아담 2015.01.25 580
4808 세월호 인양 ‘거짓말’, 가족들 또다시 거리로 ... 세월호 피해가족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19박 20일 도보행진… "유가족과 희생자 분리 시도 반대" 6 국가 2015.01.25 401
4807 <성소정결>에 대해 새롭게 해석해봤으니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세요 21 예언 2015.01.26 555
4806 의사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교인보다 영적흑암 속으로 더 깊이 빠져갈 위험이 있습니다 예언 2015.01.26 342
4805 < 충격속보 >일본의 경제평론가가 본 한국의 경제구조 빛좋은개살구 2015.01.26 374
4804 생각해야될 교리와 신조들 1(버려야 할 교리 레11장) 1 참개혁 2015.01.26 398
4803 @@ [내 조 의 여 왕] @@ 1 밤하늘 2015.01.26 374
4802 이런 사람에게 의사가 되라고 권해서는 안됩니다 4 예언 2015.01.26 372
4801 숫자3과 황제 성실 2015.01.26 345
4800 부서진 것들의 가치 1 성숙 2015.01.26 377
4799 신은미 토크콘서트 조직한 이재봉 원광대 교수 “종북 아닌 친북주의자 되어달라” 친북 2015.01.26 409
» 원초적 살인의 추억 - 짭쪼름(4) 4 아기자기 2015.01.26 541
4797 어떤 귀로 2 야생화 2015.01.26 472
4796 사진 2 file 슈퍼맨 2015.01.26 417
4795 그날의 슬픈 약속 잉글랜드 2015.01.27 383
4794 최 근 보 도 2 최근 보도 2015.01.27 5746
4793 <성소정결>에 대한 질문이 다시 와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4 예언 2015.01.27 423
4792 난 예신 골백번 읽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으니 어찌된일인가? 10 알쏭이 2015.01.27 533
4791 "세월호 참사 통해 생명과 공동체 가치에 새롭게 눈 떠" 단계 2015.01.27 351
4790 우리나라 청소년 행복지수가 높아졌다고?… 그런데 왜 이리 찜찜하지? 크낙새 2015.01.27 347
4789 [속보] 서울 한복판에서 중학생 10명과 30대 남성 5명이 집단 난투극.txt 2 서울뉴스 2015.01.28 520
4788 이 시대에 의사가 되는 것은 위험합니다 1 예언 2015.01.28 316
4787 외계인, 세월호를 구하다! 2 마음 2015.01.28 367
4786 신이 죽었다. 나의 신이. Tears 2015.01.28 431
4785 재무제표도 모르는 우리가 왜 책임져야 하는가?.....카스다 박성술. 4 평신도의질문 2015.01.28 661
4784 각하의 옷장에는 아직 수백벌의 옷이 남아 있습니다. 1 수첩 2015.01.28 432
4783 프리메이슨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해 말하다- "제가 종교학을 전공했는데 동기 중 하나가 메이슨 이었어요" 3 산울림 2015.01.28 507
4782 김운혁님이 교파 하나 세우면 거기 갈란다 11 김균 2015.01.28 638
4781 의사에게 똥칠하기 김균 2015.01.28 486
4780 즐거운 소통 영원한행복 2015.01.28 306
4779 제가 아는 분이 <2300주야, 성소정결>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해와서,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2 예언 2015.01.28 402
4778 성당의 은밀하고 깊은 곳에서 벌어질 일 예언 2015.01.28 321
4777 미국 이후의 세계 2 file 김주영 2015.01.29 544
4776 돌아오지못한 돈도 사정이있겠지요 file ... 2015.01.29 300
4775 아버지 형 어머니 1 file 태태양이 2015.01.29 338
4774 버려야 할 교리들 2. 예신의 성경적 근거 없다 12 안교리 2015.01.29 505
4773 예수님의 humanity ( 11 )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무리들 사이로 가시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오셨다. 잠 수 2015.01.29 328
4772 미국이라는 나라 2 세계질서 2015.01.29 428
4771 제1부 38평화 (제13회) : "미군정시대(美軍政時代)"(김영미 집사 신촌영어학원교회)/ 제2부 평화의 연찬 (제151회) : "하나님께서 오늘의 작은 모세인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 - 신명기 1~4장까지의 말씀을 오늘의 기별로 바꾸어 이해하기” (최창규 장로 (사)평화교류협의회 상생공동대표) file (사)평화교류협의회[CPC] 2015.01.29 362
4770 국회의원들이 <일요일법을 제정하라는 요구>에 굴복하는 이유 예언 2015.01.29 287
4769 s보건대 사태 왜 쉬쉬할까? 아도나이 2015.01.30 527
4768 운혁씨에게 18 우수 2015.01.30 443
4767 나도 가끔은 탱고를 추고 싶은 때가 있다. - 전정권 (kasda.com) 1 2015.01.30 1280
4766 훌륭하신 ㅈ목사님께서 탱고를 추신다면 교인들이 다 따를테니 교회가 댄스홀이 되지 않겠습니까? - 조재경 (kasda.com) 2015.01.30 447
4765 7살 소녀가 경찰서를 찾아간 이유.jpg 2 ... 2015.01.30 373
4764 지구 창조사건으로 토요일 안식일이 폐해졌는가? 6 김운혁 2015.01.30 322
4763 건강이라는 질병 3 김원일 2015.01.30 467
4762 <하늘>안에 <하늘성소>가 있는가?...아니면 <하늘>과 <하늘성소>가 같은가? 4 예언 2015.01.30 447
4761 교단을 만드는 것이 옳다 10 김균 2015.01.30 492
4760 성 안과 성 밖 7 김균 2015.01.30 507
4759 미국인이 만든 세월호 영상 ... 2015.01.31 341
4758 시들지 않을 꽃들... 2 ... 2015.01.31 381
4757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2015년 1월 26일 월요일> 세돌이 2015.01.31 301
4756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2015년 1월 27일 화요일> 세돌이 2015.01.31 303
4755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2015년 1월 28일 수요일> 세돌이 2015.01.31 385
4754 친일파 후손의 역습. 1 역습 2015.01.31 378
4753 진실은.... 1 진실 2015.01.31 301
4752 인간관계 성공 조건- 인성 리더십: 박완순 박사의 창원시민 아카데미 자루 2015.01.31 388
4751 기독교 이단 사이비 종교 명단입니다 참고하십시요 2 어버이연합 2015.01.31 1979
4750 조선 최대에 노름꾼 4 야생화 2015.01.31 392
4749 안식교는 장사하는 집인지 하나님의 교회인지 구분이 어렵다. 2 엘에이 2015.01.31 558
4748 장사하는 집으로 실패한 안식교 - 두유 산업이나 라면 사업등의 식품 산업도 영어학원 병원 등 5 엘에이 2015.01.31 576
4747 [성명서] 대한민국 헌법 부정하는 민주주의 파괴세력 대한민국 떠나라! 어버이연합 2015.01.31 290
4746 북 아태 지회 회보지에 기고할 원고 예언 2015.01.31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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