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humanity ( 11 )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무리들 사이로 가시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오셨다.

by 잠 수 posted Jan 29,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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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humanity ( 11 )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무리들 사이로 가시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오셨다.


W H 그리피스 토마스(Griffith Thomas)가 쓴

기독교는 그리스도이다』라는 책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그 모든 것의 핵심이라는 내용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고 본질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가르침의 저자요, 교리의 대상이요, 구원의 근원이요,

소망의 성취요, 능력의 근원이요, 교회의 설립자이시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모든 것이다.


기독교에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아닌 그 모든 것은 다 가짜이다.

누가 무어라 하여도 아니다.


교리나 관습이나 제도, 규정 - 그리스도가 마땅히 그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20 장 31 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이렇게 성경 기록의 목적을 간략하게 기술한다.


신앙의 중심인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것은 모든 신앙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주님은 나에게 과연 어떤 분으로 이해되는 분이신가 ?


주님과 나 - 개인적으로 이해되는 주님

따뜻한 주님을 만나는 이 여행을 계속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찬양 가사가 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온 교회의 머리와 만국인의 구주시며 모든 왕의 왕이요

심판하실 주님되고 우리 영광 되시네.


마 8 : 16 - 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으로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의 연약한 것들을 친히 담당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약함을 다 그래도 짊어지신 주님이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에토스는 명성, 신뢰감, 호감 등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인 측면으로,

설득 과정에 60 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파토스는 친밀감을 형성하거나 유머나 연민 등 감정을 자극해

마음을 움직이는 측면으로,

설득에 30 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로고스는 논리적인 근거나 실증적인 자료 등의 근거를 제공하는 측면으로,

설득에 10 퍼센트 정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성공적인 설득을 하려면

먼저 상대방으로부터 호감을 사고 (에토스),

감정에 호소한 다음 (파토스),

필요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여야 한다. (로고스).


예수님은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나를 대하는 듯 사람들을 대하라고 말씀하신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소자는 약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말한다.


오늘은 눅 8 : 43 - 48 에 등장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할려고 한다.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을 고치신 내용이다.


이 말씀에서

한 여인의 오랜 지병을 고치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인간미와 주님의 사람 냄새를 다시 맡고자 한다.


약자를 향하신 주님의 그 다함이 없는 사랑을 체험하고자 한다.


이 사건에 대해 화잇은 이렇게 기록한다


시대의 소망 36 장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에 12 년 동안 질병을 앓아 온

괴로운 생애를 해온 불쌍한 여인을 군중 가운데서 만나셨다.


그 여자는 모든 재산을 의사에게 치료비와 약값으로 다 바쳤으나

불치의 병이라는 선언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병자를 고치신 사실들을 알게 되자

그 여자의 소망은 다시 소생되었다.


그는 예수께로 나갈 수만 있다면 고침을 받으리라고 확신하였다.

그 여자는 허약하고 괴로운 중에도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해변에 나와서

군중을 뚫고 들어가려고 노력하였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 여자는 다시 레위 마태의 집에서 예수를 따랐으나

여전히 예수께 가까이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거의 절망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무리들 사이로 가시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가까이 오셨다.


주님깨서 이 여인이 있는 곳으로 발 걸음을 옮기신 것이다.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나무 아래로 다가서신 주님과 같은 경우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주님께서 하신 것이다.

힘이 없어 군중들의 틈새로 비집고 갈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주님께서 친히 그 여인이 있는 곳으로 옮기시어 그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잡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약자에 대한 주님의 배려심이야말로 주님의 인간미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주님께서 대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이 말씀의 핵심 사항이다.


누가복음 8 장에는 많은 사건들과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여러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을 고치신 이야기 (8:1-3) 부터 시작해서,

그 유명한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씨 뿌리는 비유 (8:4-8)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 (8:9-15)이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등불은 등경 위에 켜서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교훈 (8:16-19) 과,

누가 진정 예수님의 가족인가를 말씀하신 내용 (8:19-21),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한 놀라운 이야기 (8:22-25),

유명한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의 이야기(8:26-39) 등이다.


후반부 (8:40-42, 49-56) 에는

죽은 자를 살리신 엄청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다.


자,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

그리고 천지를 잔잔케 하신 이야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은 자를 살리신 놀라운 이야기들이 진행되고 있는

누가복음 8 장의 말씀 속에,

한 작디 작은 이야기가 생뚱맞게 끼어있다.


그 이야기는 열두 해를 혈루 증을 앓고 있는 이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물론 그녀의 이야기는 본문의 중심에 서 있지도 않고,

그리고 긴 이야기도 아니다.


누가복음 8 장의 이야기에서

이 여인의 이야기는 겨우 본문에 끼어들어온 것 같다.


그녀의 이야기는 보다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죽은 자가 살아난 이야기의 중간에 겨우 끼어들고 있다.


이렇게 끼어든 그녀의 이야기 뒷부분에서 회당장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고,

그 놀라운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을 본다 (49-56절).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사람의 짧은 이야기가 대단하고 중요한

이야기의 틈바구니 속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있는 것이다.


왜 그녀의 이야기가 대단한 이야기,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있는가?


도대체 이 초라한 여인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렇게 대단한 이야기의 맥을 끊고 들어와 있는가?


복음서의 기자는 왜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를 단숨에 끝내지 않고,

초라하고 무기력한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 속에 삽입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이 여인에게 우리의 관심을 한번 기울여 보자.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


한 마디로 이 여인은 비참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 축에도 낄 수 없는”그런 존재이다.


우리가 이 여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는

이 여인은 크나큰 중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병으로 인하여 심한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녀는 지난 12 년 동안 계속해서 혈루증을 앓아 왔다(43절).

혈루증은 지속적으로 하혈을 하는 증세를 보이는 부인병의 일종이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생명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혈루증은 율법 (레위기 15:25-37) 에 의하면 부정한 병으로 정죄되었고,

그 병을 앓는 사람과 접촉을 한 사람까지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마도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을 것이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환자는 누구에게나 환영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기 위해 싸매고 있어야 했고,

역겨운 냄새를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여인은

“많은 의원들로부터 치료를 받으면서 많이 견디어야”(막 5:26) 했다.

그녀는 병을 고치려고 모든 노력을 다 쏟았다.


그러나 아무런 효험도 얻지 못하고

여러 병원에 수많은 치료비들만 갖다 바쳐야 했다.


주님의 약한 자에 대한 깊은 배려가 돋보이는 사건이다.


화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 중에 이 여인을 만나시어

그의 병을 고쳐 주신 것이다.


주님의 자비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그냥 지나치시지 않는 주님의 배려

주님의 그 사랑이 돋보이는 이야기이다.


그녀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그녀가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마침내 일어났다.


그녀는 만졌고,

그 즉시로 피가 멈추고 그녀는 고침을 받았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누가는

“즉시” “즉각적으로” “일순간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크레마”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정말로 즉시로 피가 멈추었고, 그녀는 일순간에 고침을 받았다.

그녀가 주님을 만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녀를 만지기에 수월하도록 배려하신 결과이다.

그 여인의 곁으로 주님께서 다가서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신다.

“딸아”

예수님은 지금 그녀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딸아”(뒤가테르) 라는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특별한 표현이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과의 관계를 묘사하며 사용했던

“딸”이라는 단어를 예수님께서도 지금 이 여인을 향하여 사용하셨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그런데 여기서 “옷가”라고 하는 단어는 “크라스페두 투 히마티우”이다.

“크라스페두”는 ‘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달린 부속물’,

즉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술”을 말하는 것이며,

“히마티우”는 ‘외투’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 말을 “fringe of His Cloak”이라고 번역한다.

우리 말 성경 새 번역도

이 여자가 뒤에서 다가와서는 예수의 옷 술에 손을 대니 (눅 8:44).

즉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 끝에 달려 있는 술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이 겉옷에 달린 술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술 달린 옷은 그 당시 제사장 같은 권위와 위엄이 있는 이들이 입었다.

그러므로 이 술은 아무나 만질 수가 없다.


그리고 옷에 달린 술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만지도록 허락을 받았거나,

혹은 오직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면을 생각해 보자.

그녀는 지금, 도저히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을 만졌다.


더군다나 그녀의 몸은 부정한 몸이다.

율법에 의하면 누구든지 이 여인과 접촉이라도 하게 되면,

그도 부정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예수님의 옷 술을 만졌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권위를 상징하며,

가족들만이 만질 수 있는 옷 가의 술을 만졌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없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엄청난 책망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고 두려워 떨고 있는 그녀에게

예수님은 “딸아”라고 부르신다.


야이로가 죽어가는 외동 딸을 향해서 한없는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부르고 있는 “딸”(뒤가테르) 이라는 그 단어,

그 딸을 잃는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요,

아픔이기에 회당장 체면도 다 팽개치고,

한 시골의 젊은 청년 랍비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바로

그 심정으로 부르는 “딸”(뒤가테르)이라는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부정했던 여인을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배려의 극치이다.

이것이 주님 인간미의 극치이다.

이것이 주님 사람냄새의 극치이다.


이 단어는 그냥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 이름을 모르니까 일반적으로 부르는 딸이라는 말도 아니다.


이 말은 실제로 아버지가 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부녀지간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예수님의 이 첫 마디에서 벌써 예수님은

그녀의 불손한 행동을 용서하시고, 아니 인정하신 것이다.


네가 나를 만질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약자를 향한 주님 사랑의 복음이다.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너를 이미 나를 언제라도 만질 수 있는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한 마디, “딸아”라는 이 한 마디 속에서

소외된 여인을 향한 소외된 사람을 향한 무한한 배려가 담겨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계속해서 칭찬하신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은 평안히 가라는 축복의 음성과 함께 그녀를 보내셨다.


이 이야기는 보잘것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사실은 대단한 이야기들 사이에 끼어든 것도 아니다.


주님의 마음을 알았던 누가는 죽은 자를 살리는 엄청난 이야기를 하다가,

이 여인의 이야기로 큰 이야기의 맥을 과감하게 끊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옹위하고 함께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 -

여기서 “옹위했다”는 헬라어 단어는 직역하면

“무리들이 그를 질식시키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무리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몰려들어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이 주님께 가까이 나온다는 사실이

그토록 힘들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약한 병든 여인이 이 군중을 밀치고 주님 곁으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병들고 문제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는 자가 어찌 이 여인뿐이었겠는가 ?


아마도 그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그 군중 가운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주님의 옷을 스치며,

주님의 몸과 부딪히며 갔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이 여인만이 고침을 받았다.

그녀만이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졌기 때문이다.


이 여인의 간절함이 기적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간절함을 아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약자를 향하신 주님의 그 배려심이 너무나 아름답다.

아침 햇살처럼 찬란히 빛난다.


오늘도 주님 곁으로 아니 주님이 내 곁으로 다가오신다.

수 많은 인파를 밀치고 내 곁으로 오신다.


내가 아파할 때

내가 괴로워 할 때

내가 주님을 간절히 필요로 할 그 순간에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내 삶에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감사합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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