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가끔은 탱고를 추고 싶은 때가 있다.
2015.01.29 19:25
나도 춤을 추고 싶다.
좌충우돌 남미 여행기 14
맹인이자 퇴역장교인 프랭크는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기가 지겨워하던 어느 날 멋진 자살여행이나 한번 하고 나서 자신의 인생을 끝낼 계획을 세운다. 그가 얹혀사는 조카네 식구들이 모두 추수감사절 휴가를 떠나고 나자 그 틈을 타서 그도 그 계획에 착수한다.
그런 그가 우연히 찰리라는 한 고둥학생을 만나게 된다. 명문 베어드 고등학교에 다니는 데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고 있지만 크리스마스 방학 때 오레곤에 있는 집에까지 갈 차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는 학생이었다.
프랭크는 찰리에게 그 비용을 대주기로 하고 함께 뉴욕으로 떠난다. 그의 비밀 계획을 실행하자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바로 찰리를 선택한 것이다. 프랭크의 계획이란 비행기 1등석을 타고 뉴욕 최고급 호텔인 월도프 아스토리아에 투숙하고, 최고급 식당인 오크 룸에서 멋진 식사를 즐기는 등, 돈을 맘껏 쓰고 나서 느닷없이 형을 찾아가 놀래게 하고는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차비를 벌 생각으로 프랭크를 따라 나선다.
사실 찰리는 가까운 친구가 교장의 차에 페인트를 붓는 것을 목격했지만 친구를 고자질하기가 싫어서 고민하고 있었다. 교장은 찰리를 목격자로 지목하고 알려주면 하바드 대학에 들어가게 해줄 것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주던 장학금마저 끊어버리겠다고 협박당하는 상황이었다. 리무진을 타고 뉴욕을 돌면서 찰리는 자신의 고민을 프랭크에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프랭크는 몇 가지 중요한 조언을 해준다.
비록 장님이지만 여인의 냄새만으로 그가 어떤 여자인지를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신통력을 지닌 프랭크는 어느 멋진 식당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도나와 얘기를 나누다가 탱고를 추자고 제안한다. 도나는 사실 자신이 탱고를 별로 잘 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겁을 낸다. 그러나 그녀를 격려해서 그야말로 멋진 탱고를 추게 된다.
그리고 다음날 프랭크는 찰리의 도움으로 페라리를 직접 몰고 마음껏 달려본다. 그의 원하던 일이 다 끝나자 프랭크는 찰리에게 시가를 사다달라고 밖으로 내 보낸다. 그러나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찰리가 호텔로 다시 돌아왔을 때 프랭크는 군복을 차려입고 막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있는 찬라였다. 챨리가 다급하게 당신에게는 인생이 있지 않느냐고 말린다. 그러자 프랭크는 “ 인생은 무슨 놈의 인생이냐. 모든게 깜깜한 어둠 뿐인데” 라고 대든다. 나는 살아야 할 아무 이유가 없으니 있다면 하나라도 대보라고 따져든다. 그러자 챨리는 “당신은 탱고를 멋지게 추지 않소. 그리고 페라리를 그렇게 잘 모는 사람을 나는 여지껏 본 적이 없소.“ 라고 대꾸한다. 그러면서 찰리는 그가 얼마나 깊은 절망 속에 살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결국 프랭크는 자살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리무진을 타고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학교로 찰리와 함께 돌아가 챨리를 위해 명연설로 변호를 하게 된다. 멋진 한판승을 거둔 프랭크가 학생들의 박수 갈채를 받으며 찰리의 손을 잡고 교정을 나와 그의 조카들에게 가서 다시 다정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 찰리는 자기 길을 간다.
알 파치노가 장님 퇴역 장교 역을 맡아 1993년 개봉된 영화 <여인의 향기>의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알 카포네는 그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20세기 최고의 명화중의 하나로 꼽는 이 영화의 백미는 바로 눈이 먼 주인공 프랭크가 느닷없이 아름다운 여인 도나와 탱고를 추는 장면이다. 여인이 주저하는 동안 발이 꼬여 당황할 때 프랭크는 이렇게 속삭인다.
“걱정하지 마시오. 탱고에는 인생에서처럼 그런 실수는 없는 법이오. 실수로 스탭이 꼬였더라도 계속하시오. 그게 바로 탱고아니오 실수해도 탱고는 다시 추면 그만이오”
아르헨티나는 땅고(Tango) 즉 탱고의 나라다. 스페인 식민주의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민으로 온 노동자들이 정착한 곳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라 보까라는 항구와 산 텔모 지역이다. .보까가 지금은 오폐수로 가득찬 선창가에 녹슨 철탑만이 우두커니 서있는 폐허화된 항구지만 그 옛날에는 이곳에 아주 번창한 시가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 텔모 거리에는 일요일마다 그 시절의 향수를 물씬 풍기는 골동품들을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늘어놓은 장이 선다. 이 장 구경이 이곳 여행 코스의 일품이다. 골동품상과 기념품, 그리고 카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전통 거리에는 정식으로 규모를 갖춘 공연장이 있는가 하면 카페 안의 좁은 공간에도, 심지어는 손님들이 앉아 있는 탁자 옆에서도 탱고를 춘다. 그야 말로 탱고가 넘치는 곳이다.
처음 이곳의 이주자들 중 한량계급들은 스페인 전통 춤인 플라맹고를 추면서 놀았던가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나 노예들 그런 하층민들은 플라맹고를 추는데 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계발한 서민 춤이 바로 탱고다. 거리에 유곽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가난뱅이 노동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고 육신의 허기만 더할 뿐이었다. 노동의 고달픔, 타향의 외로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 없을 때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먹이듯 통곡하듯, 때로는 쓰러질 듯 그런 강렬한 몸짓으로 밀고 당기고 끌어안고 팽개치다가 다시 끌려가 안기는 그런 몸짓이 바로 탱고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부분 남자들끼리 추는 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 음악성이 깊은 스페인 사람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곡을 만들고 나중에는 가사를 붙여 전통적인 탱고 음악을 만들어 간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서민들이 사는 거리를 걷다 보면 이층 창문 틀 앞에 세 사람의 조각이 놓여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옛날 노동자들이 목재가 모자라 일터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를 주워다 집을 짓고 깡통 바닥에 조금씩 남은 페인트로 벽을 칠하다보니 울긋불긋 가지각색인 그 건물 창가에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 전 대통령 영부인이었던 에바 페론, 그리고 탱고 음악의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의 조각상이 놓여있다. 이 세 사람이 바로 이곳 서민층의 우상이 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카를로스 가르델은 바로 앞서 말한 영화 <여인의 향기> 에서 맹인 장교 프랭크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미녀 도나와 춤출 때 흐르는 불후의 명작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포르 우나 카베사 Por una cabeza 간발의 차이라는 뜻> 의 작곡자이다.
본래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아르헨티나 시민권을 얻었고 가수, 피아노 연주자, 작곡자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 아르헨티나 서민의 노래를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으로 끌어올린 사람이다. 탱거리안(탱고 춤꾼)의 우상인 것이다. 힘들고 외롭고 서럽고 처량한 그들의 몸짓과 노래의 영원한 자부심의 상징이 바로 카를로스 가르델이다.
두 번째로 아르헨티나 국민의 영원한 연인이자 다정한 어머니였던 에바 페론이다. 그는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그의 어머니가 술집 여자였는데 아버지가 그를 입적 시켜 주지 않은 것이다. 빼어난 미모를 가졌지만 타고난 처지가 그랬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어린 나이 때부터 그야 말로 막장 인생을 살아야 했다. 열다섯 살에 그 가난을 떨치기 위해서 가출을 한 후 여러 남자들 품을 전전하며 밑바닥 인생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어린 시절을 살아냈다. 그런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미모와 재주를 인정받아 라디오 방송에서 성우로 또는 배우로 출연하게 되고 드디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을 사람을 만나게 된다. 첫 부인을 잃고 외로움과 실의에 빠져 있던 당시의 실력자 후안 도밍고 패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무뚝뚝하고 강경한 남편과는 달리 빼어난 미모에 누구라도 설득시키는 말솜씨를 가진 그의 노력으로 드디어 남편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된다. 영부인이 된 에바 페론은 노동자들의 복지와 임금에 대한 혁신적인 정책으로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한 때 그녀는 노동자들의 성녀로 까지 추앙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가 국민들과 함께 한창 밀월의 시간을 보내는 중에 안타깝게도 과도한 활동에 지쳤던지 34세라는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에 그의 정책이 아무 실속 없는 포퓰리즘이었다고 비평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지치고 피곤한 민중의 가슴을 달래줄 자상한 누이와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까지도 그는 아르헨티나의 가장 사랑 받는 여성이다.
마지막으로 디에고 마라도나 역시 그들 가난한 서민의 영웅이다.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마라도나가 그토록 자주 온갖 구설수에 휘말리면서도 여전히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는 두 계층 간의 긴장을 여실히 보여 주는 두 개의 축구팀이 있다. 하나는 가난한 서민동네를 대표하는 보까 주니어 팀이고 다른 하나는 중상류층을 대표하는 리버 플라테 팀이다. 마라도나가 바로 이 보까 주니어 팀의 대표선수다. 그가 열 다섯 살에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가 되는데 나중에 열 아홉 살부터 이 팀에 입단해서 일약 세계를 주름잡는 축구스타가 되었다. 자기들의 선수,자기들의 아들이 저 넓은 세계의 마당을 종횡무진 달리면서 통쾌하게 골을 넣을 때마다 그들 가슴의 긍지와 희열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세 사람의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고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표시하는 데는 그들이 걸어온 정치역정에도 이유가 있다.
남미인들 만큼 폭력과 압제에 시달려 온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오래전 잉카나 마야 시대에도 그들은 문자도 없던 그 시절에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태양의 아들이니 신의 아들이니 하고 신격화된 절대 군주 체재 아래서 얼마나 시달렸을 것인가는 보지 않아도 환한 일이다. 왕의 명령 하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 내려야 한다. 그것을 시행하고자 하는 지방 관리들의 횡포는 왕의 그것을 능가는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침략자들이 쳐들어 왔다.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짐승을 타고 날아다니듯 달리며 긴 막대기 끝에서 불을 품어대는 그들을 처음에는 자기들을 구원하러 온 하늘의 구세주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식민통치자들의 악행과 잔인함은 어떤 군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노예로 끌려 다니며 노역에 시달려 죽고 짐승처럼 사냥되고 전염병에 죽어갔다.
그러고 나서 여기에 견디지 못한 민중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독립운동의 물결이 남미를 뒤 휩쓴다. 그들 지도자들은 대개가 식민지하에서 혼혈로 차별대우를 받으며 자란 사람들이었다. 체 게바라, 산마르틴, 카스트로, 볼리바르, 페드로 등, 여기저기서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독립시킨 사람들이 이제는 과격한 군사독재를 시작했다. 그들의 독재에 항거하다가 죽어간 사람은 남미의 어느 나라나 부지기수다. 그 독재자들은 군사 권력을 앞세워 마음껏 사치를 누리고 부정과 부패를 저질렀지만 민중에게는 이를 대항할 힘이 없었다.
한동안 남미에 민주화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뒤에서 지원한 세력이 바로 천주교다. 남미는 해방신학의 본거지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며,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라는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근거로 인권이 유린 되고 민중이 독재자에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대항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쓰던 의식화라는 말이 남미에서 시작되었다. 힘없고 우매한 민중이 자기들의 인권이 처절하게 짓밟히는 데도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지도 대항하지도 못하는 경우 그들에게 대항할 의지와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의식화다.
그런 시절 고단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그들의 영혼을 달래준 것이 바로 탱고였으며 에바 페론의 복지정책이었고 마라도나의 통쾌한 골이었다. 에바 페론도 실제로는 극도의 사치를 누렸고 부정축재를 했다는 것이 드러났지만 그래도 그 시대에 민중에게 그 정도의 관심과 애정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는 데서 지금까지 에바 페론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남미 인들의 그 시절의 그 사람을 사랑할 뿐 그 이후의 일은 쉽게 잊어버린다.
남미에는 현재 세 명의 여성 대통령이 있다.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의 일등국가가 모두 여성 대통령이다. 여러 가지 정치적 술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중의 단순한 생각은 어떤 독재 권력 보다는 그들의 삶에 다가와 위로가 되고 따뜻하게 보살펴 줄 어머니 같은 통치자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이 과감한 경제 개혁이나 사회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몸매 관리나 얼굴 성형, 패션에만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돌고 있지만 독재 권력에 너무나 많이 시달려 온 그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곳의 불만도 이제는 날마다 상승하고 있다는 것도 여성 통치자들로서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사람은 본래 일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지는 않다.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여섯 째 날 끝부분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곧장 삽이나 괭이를 주어 전답으로 몰아내시지 않았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완벽하게 준비된 신혼집이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누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의 사랑의 선물을 엔조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 하면서 이제는 스스로 제 목숨을 구완하기 위해서 땀을 흘리는 수고가 부여되었다. 그럴지라도 사람은 쉬어야 했다. 쉬지 않고 일만하다가 죽을까 보아 하나님은 쉬고 노는 것을 아예 법으로 규정해 주셨다. 예배와 노래와 춤을 주신 것이다.
천지 창조가 마쳤을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욥 38:7)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 민족이 430여년의 애급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고 바다를 가르고 홍해를 무사히 건넜을 때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출 15:20)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을 때 첫 번째로 한 일이 법궤를 옮겨오는 일이었다. 사울의 시대에 개인집에 맡겨뒀던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오는 행사를 치르면서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 6:14)고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춤을 잘 추고 노래 잘하는 다윗을 역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춤추는 다윗을 업신여겼던 그의 딸 미갈은 저주를 받아 여인으로서는 당하기 어려운 운명을 감당해야 했다. (대상 15:29) 다윗이 전쟁에 나가 골리앗을 이기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삼상 18:6)하였다. 그리고는 “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29:5)라고 노래했다.
인간에게 노래와 춤은 좋은 것이고 지극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이 퇴폐적이고 육욕적이고 죄악적인 유혹이 될 때는 저주가 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을 가장 아름답고 고상하게 사용할 줄 아는 민족이었다.
여러해 전에 예루살렘에 간 적이 있다.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그들의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직 밤이 되지 않았으니 찍지 말라는 것이다. 해가 졌는데 그러느냐고 했더니 별 세 개를 찾거든 찍으라고 했다. 별이 뜨고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도 없어서 어딘가로 향해 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따라 갔다. 성벽과는 동 떨어진 예루살렘 광장이었다. 안식일을 막 끝낸 그들이 환하게 밝혀진 광장의 불빛 아래서 춤을 추는 것이었다,
한 쪽에서는 농구나 배구, 테니스를 하는 사람도 있고 그 가운데 가장 큰 광장에는 수백 명이 모여 춤을 춘다. 음악에 맞춰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는 데 거기에는 남녀노소가 모두 함께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젊은 남녀들 모두가 아무 스스럼없이 서로 어울려 음악에 따라 돌면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도대체 이런 춤곡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천여개 쯤 될꺼라고 했다. 왜 이렇게 모두 나와 춤을 추느냐고 했더니 즐거운 안식일을 보냈기 때문에 마음이 즐거워서 춤을 춘다고 했다. 그래도 남녀노소가 공공장소에서 어울려 춤추는 게 동양인이 보기에 좀 이상하다고 했더니 그렇지 않다고 했다. 사람은 즐거울 때 춤을 추면 더 즐겁고 우울할 때 춤을 추면 우울을 털어버릴 수 있는 치료약이라고 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춤을 추지 못하게 하면 그들은 정말 이상한 곳에서 춤을 추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작년 여름에 강의 때문에 중국의 몇 도시를 여행했다. 그 중에 남쪽의 정주와 온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밤에 거리에 나섰더니 곳곳에서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소위 중국식 스포츠 댄스 같은 것이다. 광장에 수 십명 때로는 수 백명이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춘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공원에 갔더니 어젯 밤보다 더하다. 공원 이 구석 저 구석에 여러 무리가 어떤 경우에는 유니폼까지 입고 각자의 음악에 따라 유연한 몸짓으로 춤을 춘다. 가히 열풍이다. 오나가나 춤이다. 물론 그것이 아침저녁 운동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맨손체조만 하는 것 보다야 음악에 맞춰 전문 강사의 지도에 따라 유연한 몸동작을 하는 것은 보기도 좋고 운동도 더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조금 따라하다 내려왔다. 그러나 몸동작이 익숙하지 못한 내게는 여간 어색한 것이 아니다.
여러해 전에 예루살렘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신 계훈 목사님에게 해 드린 적이 있다.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노는 문화가 없으면 그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과 우리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안식일 예배만 끝나면 대다수가 게임 방으로 달려간다는 것을 그 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놀이 문화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말씀을 하셨다. 그 분이 삼육대학교의 총장 시절이었으니까 뭔가를 할 수 있겠다고 하셨다.
삼육대학교의 대 강당 앞을 말끔하게 포장하고 곳곳에 불을 밝혀서 밤이면 청소년들이 와서 당시 한참 유행이던 인라인 스케이트도 타고 마음껏 놀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금 아래 실내 체육관에 볼링, 농구, 탁구, 수영 등, 각종 시설을 만들어 재학생 들 뿐 아니라 일반 청소년들의 놀이터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친구들을 이 놀이터로 데려오면 전도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분의 그런 꿈과는 다르게 광장은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날에도 ,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날에도 우리 광장에는 놀이꾼들이 없다. 그런 정도의 시설로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어쨌던 젊은이들이 재미있어하고 행복해 할수 있는 우리 나름의 문화를 만들지 않고는 점점 휑하게 비어가는 교회의 청소년들의 자리를 채우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사람은 즐겁게 놀아야 사는 맛이 난다.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풍류요 예술이다. 옛 선인들은 그것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을 천하게 여겼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춤은 서툴지만 노래가 있다.
사실 한국의 기독교의 부흥은 찬송가의 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게 사실이다. 다른 교회의 부흥회에 가보면 찬송가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열광이요 카타르시스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손뼉을 치거나 마룻바닥을 쳐가면서 열광적으로 부르는 찬송가에는 거대한 힘이 있고 군중을 하나로 묶어내는 마력이 있다. 찬송도 단순한 예배음악이 아니요, 때로는 오락이라는 것을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길에서 보면 분명해진다. 동요를 부르다가 가곡을 부르다가 유행가를 부르다가 좀 미안하다 생각되면 가차 없이 찬미가를 부른다. 손뼉을 쳐가면서 부르고 잘 부르면 앙코르도 한다. 그야말로 오락인 것이다. 이런 찬송가 문화는 불교나 유교나 간에 다른 종교가 감히 따라 올 수 없는 기독교의 대단한 힘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렇게 광적으로 부르는 찬송에 입을 비쭉 거리면서도 정작 우리 예배에서는 너무 경건하고 조용하게 부르는 나머지 수십 년씩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입도 달싹거리지 않는 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곡은 장송곡처럼 느리고 타령조로 악보에 없는 싱커페이션이 붙는 데는 나도 따라 하기가 어려울 때가 더러 있다.
교회에는 음악이 살아야 예배가 산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합쳐 힘 있게 부르는 찬송에는 감동과 능력이 있다. 영혼의 감동과 각성을 촉구하는 찬미 시간에라도 열심히 목소리를 다해 부르자. 프로그램에 적혀 있는 Song Service 라는 말은 무슨 노래봉사라는 말이 아니다. 음악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이다. 서양에서는 예배를 Worship Service 라고 부른다.
아르헨티나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의 하나는 Tango Porteno 에서 한 시간 반 가까이 진행된 탱고 공연을 본 것이다. 그중에 특히 칠십이 훨씬 넘었을 것 같은 두 노인 남녀가 춘 춤이었다. 아마 부부였을 것이다. 격정적인 젊은이들의 춤과는 다르게 아주 완만하고 안정적인 그 들의 춤이 그날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것이 오래전 추었던 탱고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나도 더러는 춤을 추고 싶은 때가 있다. 탱고는 아니더라도 진도 아리랑이라도 부르며 막춤이면 어떤가! 쓰다듬듯 다독거리듯 그렇게 시린 가슴을 마주 하고 춤을 추다 보면 더러는 함께 부비는 볼에 서로의 눈물이 함께 흘러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씻어내는 강물이 되기도 하리라. 누군들 남미의 이민 노동자들만큼 외로움과 그리움이 없으랴! 우리도 모두 따지고 보면 고향을 잃은 이 땅의 나그네요 이방인인 이민 노동자들인 것을....... . 자살여행의 막바지에서 춘 프랭크의 그 탱고에도 그런 눈물은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다만 알 파치노의 그 서투른 연기력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아아, 내일은 우리 꿈의 여정이 이과수폭포에 가 닿을 것이다. 공연을 보느라고 밤 열두시가 다 되도록 우리를 안내해준 아르헨티나 교회의 조 준호 집사님에게 감사를 전한다.
댓글 7
김경철
2015.01.29 19:45
전 정권
2015.01.29 19:56
그렇군요 밤새 써놓은 원고가 다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기억에 의존해 새로 쓰다보니 그런 착각을 했군요. 상쾌한 제안에 감사합니다. 연습할 시간이 없지만 접수해 두겠습니다. . 수정하지요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오.
김경철
2015.01.29 19:53
"No mistakes in Tango, not like life. It's simple. That's what makes the Tango so great. If you make a mistake, get all tangled up, just Tango on."
김경철
2015.01.29 21:27
여인이 주저하는 동안 발이 꼬여 당황할 때 프랭크는 이렇게 속삭인다.
“걱정하지 마시오. 탱고에는 인생에서처럼 그런 실수는 없는 법이오. 실수로 스탭이 꼬였더라도 계속하시오. 그게 바로 탱고아니오 실수해도 탱고는 다시 추면 그만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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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춤을 출 때는 발이 꼬이지 않았고, 춤 추기 전 Donna가 실수할까 두렵다고 했을 때 한 말입니다. 영어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탱고에서는 실수란 것이 없어요. 인생과는 좀 다르죠. 아주 간단해요. 그게 바로 탱고를 아주 멋지게 하는 것이지요. 만일 실수하여 모든 것이 탱글되어(얽혀) 버리면 그저 탱고를 추면 되거든요."
조재경
2015.01.30 08:17
영향력 있으신 목사님께서 탱고 춤을 추고 싶다고 하신다면
양들이 다 따라서 춤을 추다가 교회가 땐쓰홀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의 춤을 말씀하시지만 다윗의 춤은 방탕한 탱고와는 다르답니다
( 부조 707 )
연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경건한 기쁨으로 춤을 춘 사실을 빙자하여 현대에 유행하는 댄스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오늘날 춤추는 것은 어리석은 짓과 밤중의 주연과 관련되어 있다. 건강과 품행이 향락의 제물이 된다.
무도장에 자주 출입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생각과 존경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며 기도나 찬송은 그들의 회집에서 적합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
신령한 사물에 대한 사랑을 약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경향으로 흐르는 오락을 그리스도인들은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법궤를 옮길 때에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노래와 춤은 현대 댄스의 유흥과는 전혀 닮은 점이 없다. 전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당신의 성호를 높이는 것이었고 후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고 하나님께 욕돌리게 한 사단의 흉계이다
조재경
2015.01.30 11:05
그리고 유대인들의 춤이라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의 춤이지 예배 시간에는 춤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미국에 오시면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에 가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거기는 일체의 흥( 興 )이라는 것
은 없고
증언은 그런 유대인 회당 예배를 본 받으라 하시었고, 오히려 유대인 회당 예배보다 더 경건하게 드
리라고 하셨으며 노래도 흥이 나는 노래는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흥은 자기 내면의 몸의 쾌락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것에 흥은 없습니다
조재경
2015.01.30 11:28
목사님께서는 또 다음과같이 말씀하셧습니다
손뼉을 치거나 마룻바닥을 쳐가면서 열광적으로 부르는 찬송가에는 거대한 힘이 있고 군중을 하나로 묶어내는 마력이 있다. 찬송도 단순한 예배음악이 아니요, 때로는 오락이라는 것을 관광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길에서 보면 분명해진다.동요를 부르다가 가곡을 부르다가 유행가를 부르다가 좀 미안하다 생각되면 가차 없이 찬미가를 부른다. 손뼉을 쳐가면서 부르고 잘 부르면 앙코르도 한다. 그야말로 오락인 것이다. 이런 찬송가 문화는 불교나 유교나 간에 다른 종교가 감히 따라 올 수 없는 기독교의 대단한 힘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렇게 광적으로 부르는 찬송에 입을 비쭉 거리면서도 정작 우리 예배에서는 너무 경건하고 조용하게 부르는 나머지 수십 년씩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입도 달싹거리지 않는 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더구나 곡은 장송곡처럼 느리고 타령조로 악보에 없는 싱커페이션이 붙는 데는 나도 따라 하기가 어려울 때가 더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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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가 오락( 娛樂 )이 되겠습니까?
훌륭하신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대해 실망이 큽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나 증언을 부인한다면 재림교인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나 증언에는 예배 시간에 박수, 손벽을 치는 예배라는 것은 일체 없습니다
성경에 박수 치라는 구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증언도 예수님께서 박수 갈채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고 ( MH 197 )
또 목사님께서 재래 찬송가를 싱코페이션이라 하시는데 싱코페이션은 인간 체질에
안맞는 엇박자를 가리키는 음악 용어더군요 그러나 으막 전문가들은 재래식 3화음
찬미가 가장 아름답고 인체에 맞는 것이라 하며 복음성가나 심지어 락뮤직들은 인체
에 해를 준다고 합니다
증언은 흥이 나는 노래를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 부모교사학생권면 339 )
거기에는 환락이 있었고 비열한 웃음이 있었고 많은 열광이 있었으며 일종의 흥이 있었다
(목사복음교역자 권면83 )
그 곳에는 환희가 있었으며, 조잡한 웃음과 넘쳐나는 열광이 있었고, 일종의 흥이 있었다
알 카포네가 아니고 알 파치노(Al Pacino)
언제 저랑 한번 추실까요?
Al Capone-Mafia B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