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리 시절에 가깝게 지내던 구약학 박사학위를 공부하던 한 목사님이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삼육대학에서 신학과 학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딸이 시카고에 살고 있어서 사모가 일년에 한번쯤은 시카고에 들른다.
그때마다 그 사모가 남편에게서 특별한 사명을 받고 오는데 그것은
남편이 앤드루스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내 서재에서 여백이 본문만큼 크게 남겨있는
여백 성경을 보았는데 그것을 얻어오면 좋겠다는 것이다.
몇번을 뒤져도 나오지 않던 그것을 지난해엔 드디어 찾아서 무슨
보물단지 싸듯이 감싸안고 돌아갔다. 여백이 충분히 남겨있는 한국어 성경을 한국성서공회가
다시는 발간하지 않아서 그 분은 여백에 자신이 연구하고 읽은 것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늘 필요로 했던 여백성경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 라고 시작하는 글에는
그 태초의 시제와 싯점이 어디인지
하나님의 존재, 단수냐 복수냐의 개념적 이해
그리고 천지의 경계는 어디인가 라는 여백이 남게 된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여백에서 우리가 알고싶은 핵심적 (?) 질문들에는 별로 대답하지 않고
일곱이라는 날자에 쪼개서 창조를 기록하고 여백을 채워가는듯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니
기록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여백도 계속되고 친구가 원하던 그 여백의 성경처럼
기록과 함께 여백도 흘러 가게 된다.
그 여백하나를 선택해서 학문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도록 채워 간 논문 한편으로 박사가 되기도 하고
매주일 그 여백 하나씩을 뽑아서 청중들의 또 다른 여백을 채우는 감동을 잘 엮어내는 목사들은
교회의 텅빈 여백을 채울 수 있는 성공적인 목회자의 반열에 서게 되고
특별히 계시록에서 열어놓은 여백을 미래의 것이지만 성경적으로던지 역사적으로던지 아니면
계시를 받았다던지 어떤 방식이던지 확신이 갈 만한 것으로 채울 수 있는 주장을 하는 자들은
거짓이든 참이든 선지자의 반열에 있다고 할 것이다.
사람과 유사한 원숭이의 창조 그리고 그 여백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진화론으로 채우게 된것처럼
성경의 여백 때문에 수많은 종파가 파생이 되고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출현하고 그 여백 때문에
먹고 사는 비즈니스도 계속되고 있다.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것이 있다.
그 여백들이란 본문의 기록 때문에 생긴것이므로 그 여백을 채우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언제나
기록된 범주안에서 주어진 빛에 의해서 깨달은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여백을 다루는 성경적인 방법을 이렇게 이해한다.
성경은 기록의 시간이 1400년에 걸쳐서 그리고 저자들이 사십명이 넘는 인원에 의해서
기록되었지만 성경의 기록은 과거의 기록이 남긴 의문의 여백을 채우고 동시에 그것 때문에 열려 있는
미래의 더 큰 의문의 여백을 향하여 계속 흐른다는 것이다.
구약의 기록이 끝나는 싯점에 구약의 기록들이 남긴 여백을 채우고 설명하는 또 다른 기록이 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로 오신 또 다른 기록 말이다.
"너희 가 전에 쓰여진 기록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그 기록들을 상고하지만 그 기록들이
나에 대하여 (나의 여백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 이라고 하시면서 과거에 어느누구도 채우지 못한
여백을 그분이 채우시고 기록의 중심이던 모세와 함께 걸었던 출애급이라는 육신의 여정이 여백으로
암시한 천로여정 (탈육신)의 주인이 되셔서 더 큰 여백으로 열려 있는 새 예루살렘의 문을 여신것이다.
글을 쓰다보니 글이 자칫 어려워 질 수 있겠다는 염려가 생긴다.
나는 오늘 성경의 여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있다.
성경의 여백은 두가지로 분류된다.
기록 (옛언약) 때문에 생긴 여백과
육신이 되어 오신 또 다른 기록 (새언약-십자가)으로 인해서 생긴 여백이다.
요한복음에는 옛 기록의 여백을 설명하는 것은
예수의 출생과 삶과 죽음이며 (십자가)
다시 예수의 출생과 삶과 죽음 때문에 생긴 여백을 설명하는 이가 성령이라고
소개한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것을 말하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다시 말해서 기록된 성경은 장차 육신으로 오실 분을 위하여 충분히 설명이 되었고
육신으로 오신분은 그것을 증명했으며 그분의 생애와 죽음은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내려오신
성령으로 인해서 중분히 설명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사복음은 그분에 의해서 그렇게 기록이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령이라도 나의 것 (예수의 삶과 죽음)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약의 그 태초와 창조의 주체이신 하나님(들)이라는 여백앞에서 의아해 하던 우리들이
이제는 다시 "내가 속히 오리라" 는 또 다른 여백인 "속히" 앞에서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앞으로 남아있는 어떤 여백도 과거의 기록과 육신으로 오셨던 분의 충분한 삶과 죽음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채우는 일 외에
성경이 여백으로 남긴 모든것을 심지어
장면 하나하나를 채우고 한줄기의 또 다른 빛과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
여인에게로 가서
또 다시 물어야 하는 일 그리고
우리의 순수한 믿음을 빼앗기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무도 그 날을 알지 못한다는 그 확고한 여백을 채워보려고 가족도 버리는 일을 불사하는 또 하나의
선지자 때문에 우리는 무심결에 상당히 시달리고 있다.
한주일의 휴가에서 돌아와 보니 민초는 두 선지자 (?)의 열심이 극심한 글들로 황폐하여 가고 많은 독자들이 자리를
들고 일어서는 것처럼 느껴진다.
잡초는 언제나 그 자생력이 그리도 강한 것인가?
누군가 제초제 몇번 뿌린것 같은데 잡초는 더 강하게 뻗어가고 있다.
오늘의 결론이다.
요한복음 하나로도 나는 이미 흔들리지 않는 예수의 약속에 머무르고 있다.
앞으로 요한이 하고 싶은 여백의 이야기도 이 무성한 잡초 사이에서 할 수 있으려나?
잡초로(가라지) 취급받는제가 한말씀 또 적게 되었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할때도 어린양의 희생으로 출애굽 했고 가나안에 도착한것도 역시 유월절을 지킨후에 가나안 음식을 먹게 되었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형벌이 집행되지 않고 유예된 상태에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것도 역시 14일 금요일에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심을 받고 15일 토요일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죠.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시작은 창조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제 2의 삶 역시 구속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잡초로 취급 받는것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드려 봅니다.
왜 성경을 주셨는가?
왜 이스라엘은 430년간 노예로 지내야 했는가?
왜 이스라엘은 아빕월 14일에 양을 잡아 문설주에 발라야 했는가?
왜 이스라엘은 아빕월 10일에 대속물인 양을 준비해야 했는가? 14일 당일에 준비하기가 어려웠던걸까?
과연 이런 하나님의 명령들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 역사와 무관한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무관한게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입니다.
범죄함이 없었다면 유월절도 필요 없습니다.
이사야 8장 16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린 성경을 읽으면서 지식을 얻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깨달아야 할 부분이 있기에 주님은 여백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다시 드려 봅니다. 왜 주님은 아빕월 14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는가?
객관식이니 맞추어 보십시요.
(1) 출애굽할때 아빕월 14일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았기 때문에
(2) 아담과 하와가 주님으로 부터 구속의 계획을 듣고 양을 잡아 가죽옷을 입게 된 날이기 때문에
(3) 유월절이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는 때이므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관심을 집중 시키기 위해
문제를 만들려니 힘들군요.
정답은 이 세가지 중에 하나 입니다.
계 13:8에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란 표현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걸까요? 왜 출애굽때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하지 않으셨을까요?
지식적인 부분은 성경에 문자로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여백은 마음으로 깨달아 채워야 합니다. 이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채워 주십니다.
1335일의 마지막 날이 2030년 4월 18일이라고 알려 드려도 관심을 갖고 다니엘 12장을 살펴 보는 분들이 별로 안계신것 같아 답답 하군요. 일단 실마리를 제공했으면 한번 살펴 보고 싶은게 인간의 기본 욕구 아닌가요?
다니엘 12장은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 비밀을 풀고자 애쓰고 애써왔던 연구분야 입니다. 한번 살펴 보시죠.
과연 주님이 우리에게 경건의 비밀을 공개해 주시는것일지 누가 압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