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전에 택함이란?

by 하주민 posted Feb 01, 2015 Likes 0 Replies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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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4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요? 창세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택함을 받는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로 구별을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학적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인 예정론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나기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칼빈주의 이중 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알미니안주의와의 끝없는 논쟁의 핵심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현대 기독교의 주된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반발, 거부, 비난,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깊이 따지자면 신학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뤄야 하며 또 자칫 이 홈피의 방문자들 사이에도 쟁론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두 신학이론을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용이한 차원에서 순전히 성경말씀에 따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시간은 피조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 내지 누적인 역사도 지구상의 인간들의 행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주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대적 구분에 따른 해석, 적용, 예측은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필립 얀시가 든 비유를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해가 뜰 때에는 사실상 8분 전에 벌써 떠있는 해를 보게 되며, 지는 해도 이미 8분 전에 진해를 봅니다.

그런데 한 발은 태양에, 다른 한 발은 지구에 걸쳐 놓을 만한 거인이 있다고 치면, 순전히 논리적 가정으로, 그에게 8분의 시차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나 태양을 한 순간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실종되고 없는 셈입니다. 지구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우주 한 쪽 끝에 한 발을, 다른 쪽 끝에 다른 발을 두실만큼 큽니다. 하나님이 그런 가시적 물리적 형체를 갖춘 거인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시간과 연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행성과 항성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과 실제 길이도 각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운행, 통치하시기에 시간 개념이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본다는 것은 시간 밖에 존재하여 시간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에 실려 다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각기 시간에 묶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물체와 존재는 반드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과 완연히 구별된 유일한 분입니다. 시간 밖에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현재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영원하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오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하라는 권면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이 하루만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반면에 천 년간의 인간 역사도 단숨에 허물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주만물을 관리 통치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관자로서 그 시간마저 통치하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 또한 시간에 종속되기에 수정, 변개, 쇠퇴, 소멸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 

대신에 그분에게는 하루나 천 년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역사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해 있다는 초시간성(超時間性)과 초역사성(超歷史性)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 즉, 영원만 있습니다. 또 그래서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언약 또한 전혀 수정 변개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달성되는 법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영생을 유토피아 상태에서 시간적 무한대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 그것은 썩는 것 가운데 뿌려지고 썩지 않는 것 가운데 일으켜지며

수치 가운데 뿌려지고 영광 가운데 일으켜지며 연약함 가운데 뿌려지고 권능 가운데 일으켜지며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지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15;42-54) 

 

“이제는(이 땅에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의 실체 뿐 아니라, 그분의 구속사적 경륜, 또 이 땅에서 가졌던 의문과 오해 등이 씻은 듯이 밝혀집니다. 아니 그 전에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문제 삼을 시도는커녕 용의조차 사그리 없어질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과 이 셋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이 목적하던 바는 천국에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달성된 셈입니다. 신자가 그 둘을 더 이상 소유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사랑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아니 그곳은 아예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자가 그 육신까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갈 소망이나 믿음을 구태여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군인이 매일 달력에 표시하면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예수님이 지구상으로 재림할 때 육신도 부활해 그 분과 동행 귀환할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영원한 현재로 천국 신자에겐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성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혀져 그 분처럼 변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이후 이 땅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하게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의미가 시간적 무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온전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신자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로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완성된 관계의 실체를 가시적 형태로 하나씩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이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8-29)

바로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교리적이 아니라 일대일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생 즉, 구원을 자꾸만 시공간의 차원 안에서 이해하려 들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아니 맛도 보지 못합니다. 수박을 잘라 먹지 않고 그 겉만 핥은 셈입니다. 

 

토기장이가 악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이런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질의하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먼저 "창세 전"에라는 뜻은 하나님의 경우는 시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형체나 존재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성하기 이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실 때입니다. 시공간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한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 계셨던 상태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분,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창세전은 인간이 이해할 때에만 아주 오래 된 과거사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결코 창세  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라도,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죄로 물든 이 땅과 하늘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하늘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이런 진술마저도 인간의 사고로 즉,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차원에서 이해 적용하려 들어선 명료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데도 한국인이 속도와 억양만 조금 다를 뿐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믿고 해석하려 들어선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착할지 악할지, 또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원 줄 자와 안 줄 자를 어떻게 창세전에 독단적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분이 아주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여겨집니다. 언뜻 일리 있는 판단 같지만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판단하는 인간적 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 구원, 택함, 예정은 전부 하나님이 일방적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간섭은커녕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되었고, 신자와 불신자로 나눠져 택해졌고 예정 받았기에, 구원 받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해도 단 한 치의 불공평성, 편애, 자의(恣意: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 불합리성, 불완전성 등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신학적 과제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답게 사고 유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 듭니다. 이는 아주 크고도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본 주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이 나중에 착할지 악할지, 믿을지 안 믿을지 미처 모르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편 가름 했다고만 여기고 치웁니다. 반대로 인간의 하는 짓과 그 처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 구원해주어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예 처음부터 믿을 자와 안 믿을 자로 나눠서 창조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 신분에서 그렇게 나눈 창조와 창조주가 잘못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비유이긴 해도 인간은 물건, 토기에 불과합니다. 본차이나가 아니라 뚝배기로 만들었다고 감히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였으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목적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그런즉 이와 같이 그것은 원하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고 달리는 자에게서 나지도 아니하며 오직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게서 나느니라.(롬9:11.16)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택함의 근거가 인간의 소원이나 달음박질(공적)이 아니고 오직 당신의 긍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에서나 야곱 둘 다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진노 아래에서 지금 당장 몽땅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선언하는 바는 인간에게 아무리 높은 도덕성, 영성이 있어 보여도

창조, 택함,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논의 밖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택함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이미 예정되어 지어진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함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함이 결코 무조건적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또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의 택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택함도 없고 예수가 있기에 택함이 가능하고 또 타당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타락과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 전제가 된 창조라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말은 시간적 전후 순서는 논외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예수님의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의 타락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타락 전(supra) 예정설과 타락 후(infra) 예정설이 옳은지, 또는 예지예정인지 이중예정인지 같은 복잡한 신학논쟁이 대두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측면은 제외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그 선택을 완성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때에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쪽에선 하나님이 볼만하고 기뻐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당신께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로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는 자리까지 한 치의 착오 없이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그러나 주께 사랑받는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히 구별하심과 진리를 믿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이라. 이것을 위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느니라.(살후2;13-14)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지구상의 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만 문제됩니다. 천국에선 그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누차 강조하지만 시간의 무한대 개념이니, 아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뜻임) 뜻 안에 이미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성경 계시대로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져서 꼭 오셔야 할 때가 되면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지구상에 강림하십니다.

 

신자는 확보된 재림의 영광 속에 살기에 그 종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소유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롬5:1-4)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저 “영원한 현재의 사안”일뿐입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요1;1-4)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고 택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그 택함은 완벽한 거룩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신자가 할 바는 이어진 말씀 그대로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심으로써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느니라. 그 은혜 안에서 그분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으니(엡1;5-6)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주 곧 전능자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마침이라, 하시더라.(계1:8)

위에 있는 것들에 너희의 애착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느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분과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나리라.(골3:2-4)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 땅에선 물질적 차원에 머무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천국에선 그분과 맛 대면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예정이란 신비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낙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잠시 남겨 놓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창세전에 택함 받았으니 잠시 있다 없어질 이 땅보다는 영원과 맞대어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위의 모든 말씀들은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일 뿐이고 인간의 어떤 털껏만큼의

말이 개입한 말을 믿는자들은 위의 말씀에서 제외된다,

이 누리에 위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하는 분이 많았으면 합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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