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의 충돌 (복음서의 증언과 할머니의 증언 사이에)

by fallbaram posted Feb 02, 2015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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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마가 누가는 (공관복음) 변화산에서 벌어진 사건을

기록하면서 어떤 여백을 남긴다.

그 여백을 충분히 이해한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이번에는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할 예수님의 침례를 기록한다.

메시야는 두 증인에 의해서 증명이 되어야 한다.

구약은 선지자와 율법으로 쓰여진 책이다.그 책의 끝에 그 책이 묘사하고 가리키는

인물이 오는데 그가 왕중의 왕이고 그가 참 선지자 이며

동시에 그가 참 제사장이 되는것이다.


이런 깊은 신학을 그분의 세 애제자들 (세사람)에게 선생은 보여주고 그 의미를

가르치고 싶어셨다. 

갑자기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는 그들 앞에서 예수와 서로 말을 주고 받는 광경이

벌어진다.

그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수준은 아직 아마도 재림교회의

신학적 수준하고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의 소견에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

"여기 초막 셋을 짓고 하나는 모세, 또 하나는 엘리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선생을 위해 짓겠다는 제안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와 함께 일을 할 수 없는

인간들이다. 그들의 기능은 단지 예수를 가리키는 것일 뿐 예수가 온 다음에는

사라져야 하는 (폐하는) 기능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라지므로 예수의 얼굴에는

광채가 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하늘의 음성도 듣게 된다.

복음서는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나눈 이야기의 내용이 십자가라는 언질을 하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십자가를 가리킬 지언정 십자가를 질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내용이 요한복음에는 산이 아니라 요단강에서 일어난다.


마태복음 11장에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라고 듯이 침례 요한은

비록 신약의 인물이지만 구약의 선지자와 율법을 한몸으로 대표하는

인물이며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도 요한을 말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그가 하는말도 변화산의 풍경하고 다르지 않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니" 엘리야와 모세가 에수님의 십자가를

말하였듯이 요한도 요단강의 침례속에서 죽고 다시 살아나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표현했다.


오직 예수 그리고 그 예수의 십자가의 기능을 가리키고 사라지는 율법과 선지자의

기능을 복음서도 편지서도 주구장창 주장하지만 우리 재림교회의 신학속에는

울법과 선지자와 예수가 교묘히 초막셋을 짓고 산위에서 (시골생활, 야곱의 환란대비 등등)

살고있는 특별한 신학이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난 변화산의 여백을 할머니는 하나 (모세)는 죽은자의 부활을 의미하고

또 하나 (엘리야)는 살아서 구원받을 자의 표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복음서 저자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우리가 이토록 목을 메는 할머니의 증언 사이에

충돌이 있다. 신약의 주인되신 예수님은 죽은자와 살아있는 자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누가복음 9장 6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 전파하라"

예수의 눈에는 숨쉬는 자나 숨을 쉬지 않는자나 어차피 다 죽은 자들이다.

요한복음에서 에수님은 눈을 뜨고 자나 눈을 감어난자나 다 한가지로

어날 때 부터 소경이라고 말하신다.


다시말해서 예수를 보는자가 소경이 아닐 수 있으며

예수와 함께 하는자가 죽은자가 아니고 산자라는 말이다.


우리가 믿는 28개의 교리속에는 모세도 있고 엘리야도 있고 예수도 있다.

초막이 셋 있다는 말이다.

민초에도 아빕과 예언과 십자가의 복음이 짬뽕이 되어 흐르듯이...


간간히 하는말이 더 기막힌다.

"오직 예수"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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