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다에 연재하던 우리 건강기별 역사 시리즈
제 6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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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엘렌 화잇과 우리 교회의 건강기별 이전에 우리식의 뉴스타트를 가르친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건강개혁에 관한 한 화잇과 안식일 교회는 단연 후발주자다. 화잇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말하게 될 모든 것을 더 크게, 널리, 유창하게, 전문적으로 말한 사람들이 많았다. 화잇이 그들에게 배웠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나? 오늘날 안식일교회만큼 건강개혁의 선구자라고 여겨지는 그룹이 없다. 어쩌다가 가장 늦게 시작한 후발 주자, 미약했던 선지자와 이 교회만 남고 다른 "전문가" 들의 영향과 유산은 그 그림자도 찾아보기도 힘들게 되었나? -------- 정육업자들과 (흰빵) 제빵업자들의 폭동을 야기시키까지 했던 실베스터 그래함 (Sylvester Graham 1795-1851) 은 아직도 그의 이름이 붙어 나오는 "그램 크래커" 외에는 남긴게 없다. 108권의 저서를 써 냈고, 초기 미국 채식협회 회장을 지낸 윌리암 알콧 (William Alcott 1798-1859) 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밀러 운동에도 가담했고, 생전에 26판이나 발행된 건강 개혁 책을 써 냈던 (화잇이 "절제" 에서 많이 인용한) 라킨 콜스 (Larkin B. Coles 1803-1856) 는 알콧보다 더 잊혀졌다. 수치료 대학을 운영하고 초기 재림교회 건강잡지에 자주 기고했던 러셀 트랄 (Russell Trall 1812-1877) 의 학교는 없어졌고, 그 이름도 잊혀졌다. 뉴스타트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설파하고 그 당시에 벌써 대형 건강 요양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화잇의 눈을 번쩍 띄운 제임스 잭슨 ( James Caleb Jackson 1811-1895) 의 요양원은 없어졌고 그의 책들은 골동품 가게에서도 찾을 수 없다. ------ 오직 엘렌 화잇과 재림교회만 150년이 넘도록 이 건강기별을 꾸준히 전하고 명실공히 세계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왜 그렇게 되었나? "하나님이 인도하셨지" 라는 고백 외에 나의 대답은 "두 사람의 선택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은 켈록과 엘렌 화잇이다. 둘의 선택이 이 교회의 건강기별을 살렸고, 이 교회의 이미지를 살렸고 비약한다면 이 교회를 살렸다. ------- 켈록의 공로는 무엇인가? 그는 건강기별을 주변의 대체의학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발전하는 주류 의학에 접목시켰다. 그것이 건강기별을 살리고 나아가 교회를 살렸다. 위에 말한 당시의 뉴스타트 전문가들은 늘 주변, 언저리, 대체의학의 방식으로 남았으나 켈록은 주류의학을 받아 들이고 그 전문가가 되었다. 그로 인해 재림교회는 주류 의학의 배를 타고 뉴스타트를 전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역설같이 들리지만 재림교회 뉴스타트가 살아 남고 이렇게 오늘날 크게 전파될 수 있는 것은 주류의학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