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humanity ( 13 ) -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어미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by 잠 수 posted Feb 14, 2015 Like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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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humanity ( 13 )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어미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나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 눅 7 : 11 - 17 )


오늘은 눅 7 장에 등장하는 이 사건으로 주님의 따뜻한 인정과

주님의 인간 냄새를 진하게 맡아보고자 합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어미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기억이 어미에게는 일생동안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미는 결코 그 자식을 묻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런 불행한 일을 당한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나인성은 당시 아주 자그마한 마을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이 지역은 인구도 극히 소수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오늘 본문에만 이 지명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런 자그마한 마을로 주님께서 일부러 가신 것입니다.

자식 잃은 어미를 위로하고 기쁨의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11 절 - 예수님께서 나인 성으로 가실쌔


가실쌔 - 가다 라는 이 동사는 -

헬라어로는 목적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냥 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지니시고 나인성 마을로 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가다 라는 말의 또 다른 뜻은

특별한 방향으로 또는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 8 : 11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여기서 가서와 같은 단어입니다


가서 -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여울,

한 걸음만으로 건널 수 있는 개울


돌 맞아 죽어야 할 이 여인에게 대한 주님의 배려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다 - 이런 심정으로 가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먼 거리이지만 주님께는 아주 가까운 거리 한 걸음입니다.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의 발걸음은 언제나 멀지 않습니다

어린 아기 곁에 엄마는 멀리 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그녀는 과부였고 그녀의 아들은 어린 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청년으로 다 자란 장성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과부의 마음에 밀려오는 슬픔은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가지고 뒤를 좇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다 이 장례 행렬 뒤를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사 속에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 단 한 마디도 기록돼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그 어떤 행동이나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눈물만이 적혀있을 뿐입니다.


유대인은 날씨가 더운 관계로 곧장 장례를 치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조적인 두 행렬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슬피 울며 호곡하는 과부의 장례 행렬이고,

또 하나는 천국 소망으로 기뻐하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렬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행렬에 속하여 인생 길을 걷고 있습니까 ?


흔한 장례 행렬 그냥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 가득한 인류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습니다.


가슴 아파하는 이 어머니에게 하늘의 선물을 주시려고

일부러 이곳으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자식 잃은 영혼을 측은히 여기고 함께 아파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는 사건은 예수님이 행하신 숱한 이적 기사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거나 귀신을 쫓아내시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대부분의 이적 기사의 이야기 속에서는

먼저 고침을 받는 당사자들이나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의 간곡한 구원의 요청이 먼저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치유와 구원의 역사만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께 그 불쌍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는 간청을 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도 그 마을 그 어떤 사람도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오셔서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으며 무조건 살려주셨습니다.

적어도 이 복음서를 쓴 누가는 이 일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진면목입니다.


이 모습은 전적으로 주님의 넘치는 긍휼입니다.

주님의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향하신 넘치는 배려입니다.

주님의 아름다운 인간미가 그대로 빛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불쌍한 인간을 향하신

우리 주님의 진한 사람 냄새가 그대로 발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을 부르는 기도가 없어도 좋습니다.

주님께 향한 간절한 요청이 없어도 좋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우리 곁에 다가 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곁에 당연히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물을 사랑의 손길로 훔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말없이 우리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눅 7 장 13 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불쌍히 여겨


눅 15 : 20

집에 돌아 온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와 같은 단어입니다.


측은히 여겨 - 불쌍히 여겨 = 다 같은 헬라어 단어입니다.


울다 -

여기서 울다 라는 말 뜻은 - 아주 크게 우는 것을 말합니다


통곡의 울음을 말한다고 합니다.

거칠줄 모르는 큰 소리 곧 곡소리를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어 세우십니다.

마치 인류에게 밀려드는 사망 권세의 조류를 온몸으로 막아내시듯 말입니다.

그리고는 먼저 다가가시어 갈대로 엮어 짠 관에 손을 대십니다.


7 : 14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소로스 라는 말인데

신약에서 여기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관이 아닙니다.

오동 나무로 만든 관이 아닙니다.

혹은 재질이 좋은 나무로 만든 그런 관이 아닙니다.

그저 갈대로 엮어서 만든 갈대 거적대기를 말한다고 합니다


7 : 12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여기서 죽은 자 - 시체를 말합니다.

여기서 관이라는 말은 - 갈대로 만든 거적대기를 말합니다.


시체를 갈대로 만든 거적대기에 말아서 묶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우리말 성경에는 관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체에 손을 대시니 - 이렇게 표현하여야 맞는 말입니다.


주님은 마음으로만 말로만 불쌍히 여기신 것 아닙니다.

죽음의 고통에 함께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시작하십니다.


생명의 주님께서는 곧바로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일어나라 - 수동태 - 청년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죄로 죽은 상태에서 일어날 수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깁니다.

놀랍게도 청년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일어납니다.


7 : 15 -

일어나 앉고


죽은 자가 부활하여 일어나 앉는 기적을 말합니다.

같은 말이 행전 9 : 40 절에 나옵니다

다비다가 일어나 앉는지라

욥바에서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리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일어나 앉는다 라는 이 단어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곳에서만 사용합니다.


죽은 아들이 살아서 일어나 앉는 모습을 보는 그 순간에

이 어머니가 얼마나 놀랬겠으며 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포기했는데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나다니요?

그 순간 과부의 눈물은 변하여 기쁨이 되고,

슬픔은 변하여 환희의 춤이 됩니다.


과부와 외아들은 생명의 주님을 극적으로 만나고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 순간 너무 기뻐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눅 7 : 15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주다 -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물하다 하사하다의 뜻입니다.

( 헬라어의 뜻은 그러합니다. )


죽은 아들을 살려서 그 어미에게 선물로 하시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 선물을 매일 날마다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생명을 주시기를 더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접촉으로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매우 육체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접촉을 영적진리를 전달하는

일차적 매체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의학전문 용어로 ‘마라스무스’(marasmus) 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유아가 충분한 접촉을 경험하지 못했을 때 쇠약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과학자들은 촉감이 유아의 성장과 아동발달에

강력한 자극제가 된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접촉은 노인, 특히 건강이 약한 사람들에게 필수적입니다.


학자들의 연구 분석에 의하면 노인들에게는

대화보다 접촉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손발을 만져드리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고도로 발달한 현대 문명은 모든 것을 손대지 않고 작동하는

‘무 접촉’(touch-free) 문화입니다.


휴대 전화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음성 인식으로 걸만큼

하이테크 시대이기에 따뜻한 사랑의 접촉이 없어져가고 있습니다.


‘마라스무스’라는 접촉 결핍증을 발견한 사람은 르네 스피츠 박사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태어나 길거리에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국립 병원 의사로서 아이들을 위생적인 환경에서 충분한 음식을 주면서

양육했는데도 유아 사망률이 높다는 것에 대해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멕시코로 겨울 휴가를 갔을 때,

휴양지 근교의 고아원에서 예기치 않은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아원 아이들은 영양 상태도 형편없고 환경도 비위생적이었는데도

아이들의 건강이 매우 좋았고 울지도 않는 것을 직접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휴양도 잊어버리고 몇 달 동안을 그곳에 머물면서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결과, 그 고아원에는 이웃 마을에 사는 여자들이 매일 와서

아기들을 안아 주기도 하고 흔들의자에 앉혀 놓고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불러 준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이 연구 결과를 발표한 보고서에서

접촉을 가진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하지만 유모차에서 피부의 접촉이 없이 자란 아이들은 점점 약해졌고,

접촉 결핍증 때문에 세포들이 죽어 갔다. 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육체적인 접촉 없이 자란 아이들보다,

안아 주거나 입맞춤을 해 준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유모차만 타고 자란 아이들보다,

옛날 할머니나 엄마한테 업혀서 자란 사람들이 사랑과 정이 더 많습니다.


그 만큼 신체 접촉은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헬렌 피셔는

인간의 피부는 풀밭과 같은데,

각 풀잎의 말초신경이 민감하여 조금만 닿아도 인간의 두뇌 속에

그 순간의 기억을 각인할 수 있다. 고 말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도 손을 꼭 잡아 주든가,

아니면 짙게 포옹하면서‘사랑해!’라고 말할 때,

사랑의 감정을 더 잘 전할 수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때도, 그냥‘미안해!’라고 말하는 것보다

손을 꼭 잡든가, 가볍게 포옹하면서‘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칭찬을 할 때에도 상대방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손을 잡고 말하면 효과가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관에 손을 대시어 죽은 청년을 살렸습니다.

사랑의 접촉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에는 부정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정 타는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미국 듀크 대학의 생물학자 솔 버그 박사가

쥐를 가지고 실험을 해봤습니다.


쥐는 그 수명이 600 일에 불과하지만,

하루에 한두 번씩 쓰다듬어주니까

그 수명이 900 일 이상으로 늘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는 더욱 더 사랑의 접촉이 필요합니다.

의학 연구에서도 손을 얹는 사람이나 그 손이 얹어진 사람,

둘 다 신체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손을 얹으면 두 사람 사이에 적혈구 세포의 색소인

헤모글로빈 수치가 올라가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해주므로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 손에는 1,500 만개의 감각 기관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치유하고, 접촉하라고 인간의 손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만져 주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만지셨고,

어린아이들을 보았을 때도 품에 안고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셨습니다.


눈 먼 자와 귀 먹은 자를 고치실 때도

진물 나는 나병 환자의 상처부위를 직접 만져주셨습니다.


피 흘리는 상처도 만져서 고쳐주셨고,

죽은 자를 살리실 때도 싸늘한 시신을 만져주시며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도 두 손으로 직접 닦아 주셨습니다.

이처럼 접촉은 인간관계를 친밀하게 하며,

주님은 하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접촉 없이 사람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접촉의 문화이며,

촉감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많은 종류의 상처받은 사람들을

따뜻한 손길로 보듬어주시고 만져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따뜻한 가슴으로 그 여인의 비통함을 위로해주시는지요?


7 : 13

불쌍히 여기십니다.


민망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십니다.

아픔 가슴으로 바라보십니다.

이 단어 역시 사복음서에서 예수님만 사용하는 특별한 단어입니다.


주님 뜨거운 심장의 따뜻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훈장처럼 율법적으로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비통한 가슴으로 이 여인과 함께 울면서 위로해주신 것입니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만져주십니다.(14절)


바로 그 시신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관이 아니라 시신을 만지신 것입니다.

주님의 그 행동에 깜짝 놀라서

상여 매고 가던 사람들이 놀라서 멈춰 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손이

싸늘한 시신을 직접 만지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율법에는 시체를 가까이 하거나 만지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1 장 1 절에는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 19 장에는 사람의 시체를 만진 사람은

일 주일 동안 부정하니 자신을 정결하게 하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하시고 오로지 죽은 청년을 살리신 것입니다.


이 시대는

함께 아파하고,

함께 목 놓아 울어주며,

함께 따뜻한 손으로 보듬어주는 사랑의 가슴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분이 사랑이라는 영어 Love를 이렇게 재미있게 풀이합니다.

L (listening) -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들어주는 것.

O (overlooking) - 사소한 잘못들을 눈감아주고 모든 실패를 잊어주는 것.

V (valuing) - 다른 사람의 모습 그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

E (expressing) - 실제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게리 채프먼 이라는 심리학자가 쓴 책「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제 1 의 사랑의 언어 : 인정하는 말

상대방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칭찬하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말은 자신과 그 사람의 행복을 창조한다고 합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그 집단에서 그가 속한 회사에서 가정에서

구성원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인정한다는 것 - 칭찬과 격려를 말합니다.


마크 트웨인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한 번 칭찬을 받으면 두 달간은 잘 지낼 수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 년에 여섯 번 칭찬을 받으면

일 년 동안 사랑의 그릇을 일정한 수준 유지하면서 지낼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은 격려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칭찬하는 말이나 감사의 표현은

사랑을 잘 전달하는 힘이 있으며 좋은 표현이 됩니다.


제 2 의 사랑의 언어 : 함께하는 시간

제 3 의 사랑의 언어 : 선물

제 4 의 사랑의 언어 : 봉사


그 중 다섯 번째로 그가 강조하는 것이 신체적 접촉의 사랑입니다.


신체적 접촉이야말로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손으로 쓰다듬어주는 것,

포옹하고 안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전염병으로 소외당한 사람들의

상처 부위를 친히 만져주시며 치료해주셨습니다.


진물 나고 피 흘리는 온갖 상처를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로 돌보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십니다.

우리의 멍든 가슴을 쓰다듬어주십니다.

우리의 외롭고 힘든 사정을 부드러운 손길로 돌보아주십니다.


21세기 하이 테크놀로지 기계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그 어느 것보다도 사랑의 하이 터치가 필요합니다.


사랑의 가슴과

사랑의 손길

사랑의 돌봄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기회 되는 대로 가족과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포옹하거나 안아주는 접촉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손을 잡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울며

아픈 곳을 만져주는 사랑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교회 내에서도 연세 높으신 분들이 젊은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거나,

젊은 사람들이 어르신들의 손을 살포시 잡아드리고 만져드리는

사랑의 교감적 접촉이 필요합니다.


이 일에 주님께서 먼저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주님의 이 손길을 원합니다.

생명의 터치로 죽은 나를 살려주소서 아멘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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