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있는 속물들

by 김원일 posted Mar 05, 2011 Likes 0 Replies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교양 있는 속물’이 되려 하는가

예술사회학. 미학과 정치 사이에서, 일상과 아방가르드 사이에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서 사회 문화 비평을 합니다.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에서 아방가르드 예술의 사회운동적 성격, 저항예술 등에 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BY : 이라영 | 2011.03.04 | 덧글수(17) | 트랙백수 (0)
프린트하기 이메일보내기 미투데이 트위터 잇글링


트로츠키가 <러시아 혁명사>에서 멘셰비키 세력을 향해 비판했던 표현, ‘교양 있는 속물’ 이라는 말이 아직도 유효하게 적용되는 지식인들이 들끓고 있다. 물론, 끊임없이 들끓겠지만 그들을 향한 엄정한 비판이 함께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차이는 사회의 균형에 많이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왜 친일제 청산이 안 되었던가. 의식의 엄정함이 없어서라고 본다. 기회주의자에 대한 냉정한 사회적 심판이 부족하다.


과거의 유학자들이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마치 고리타분한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우리가 분명하게 배워야 할 것은 적어도 대쪽 같은 기질을 유지하며 자신의 내적 수양에 힘쓰는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선비도 참된 선비가 있었고, 사이비 선비가 있었다. 사이비 선비의 불필요한 권위 의식과 소모적인 당파 싸움, 위계질서의 사회는 비판하되, 자기 자신에게 냉정한 칼을 들이대던 참된 선비에게서는 배울 점이 많다. 그런데 이것이 어쩐지 뒤바뀌어 세습되는 듯 하다. 사화(士禍)가 한 번씩 터지면 벼슬을 잃는 것은 기본이요, 곤장 맞아 죽고, 귀양 가서 죽고, 사약 받아 죽어나가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사림파(士林派) 선비들의 정신을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기회주의자가 되는 것을 스스로에게 참을 수 없는 수치로 여겼기에 목숨보다 신념을 지켰던 것이다. 우리는 신념이 없고 개인적 욕망만 부유하는 사이비 지식인들을 가릴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해졌다.


엄기영의 선택

무려 아홉 번이나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던(그 중 본인이 사양한 적도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는 죽을 때까지 사회 개혁을 고민했다. 대사간이란 왕의 잘못을 지적하며 언론을 펴는 기관이었던 사간원(司諫院)의 수장이니 오늘날로 말하면 감사원장이나 언론사 대표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위치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을 담당하는 기관의 수장은 그 올 곧음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대사간 자리는 바른 언론을 위해 개인적으로 청빈한 생활을 함은 물론이고 정치적 소신이 곧은 사람으로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뢰’가 있는 사람이어야 그의 말을 ‘바른 말’로 믿을 것이 아닌가. 그런 자리에 지속적으로 임명이 되었다는 것은 율곡이 그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한 생활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엄격한 사회 지도층, 참으로 고프다.


요즘 엄기영 전 문화방송 사장을 보면서 드는 쓸쓸한 상념들. 아직도 ‘엄기영 사장’이라는 호칭보다는 ‘엄기영 앵커’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럽게 입에 붙듯이 그는 앵커의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신뢰’있는 언론인이었다. 그가 과거에 자기 입으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언급한 적은 물론 없다. 정치적 발언을 많이 자제했었던 인물이다. 그의 그런 점이 대중적으로 더욱 신망을 두텁게 했던 것이다. 어줍잖게 정치에 기웃거리며 권력에 침을 흘리지 않고(충분히 더 일찍 나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언론인으로 남으려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뒤통수 때리기인가. 이것은 구태의연한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된 ‘믿음’의 문제다. 인간적 믿음! 도리라는 것이 있는데, 그는 과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문화방송 직원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려는지 궁금하다. 그래, 좋다. 우리의 착각이었다. 그 동안 정치적 발언을 자제했던 것은 신중함이 아니라 다른 속내였던 모양이다. 한번 끝까지 지켜보자. 다 좋은데 제발 ‘강원도민을 위해서’라는 말은 부디 거둬줬으면 한다.


강원도민이 도대체 언제 엄기영에게 주소 이전하고 도지사로 나와달라고 했던가. 강원도민이 언제 기껏 뽑아놓은 이광재 전 지사를 도로묵으로 만들어달라고 했던가. 강원도민을 팔지 말아라. 강원도민은 지금도 충분히 황당하다. 영호남의 구도에서 소외된 채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홀대 받아 왔었다. 그런데 이제 ‘빅 매치’가 이루어지는 결전의 장이 되었다. 대어가 출몰한 강원도는 황송할 지경이다. 이들의 지역 사랑이 이토록 헌신적이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본인의 개인적 야망임을 차라리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덜 위선적이다. 동계올림픽 유치라는 당근을 들고 나와 푸른 옷을 입고 표밭을 관리하느라 애쓰는 모습이 차마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는 도대체 최소한의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것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절망의 시대, 무엇을 어떻게 꿈 꿔야 할까.

절망의 시대에 이기적 성공을 꿈 꾸는 자들, 그들이 바로 교양 있는 속물이다. 이들은 폼 나게 기부도 하고, 봉사도 하고, 배운 것을 유식하게 써먹기도 한다. 얼핏 바람직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의 정체는 자신들이 진정 저항해야 하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은 파악한다 할지라도 결코 맞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이들은 결국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포장하는 포장술이 교양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는 지식은 고여있는 물처럼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배운 자여! 저항은 의무다.


세상을 망치는 자들은 못 배우고 못 가진 자들이 아니다. 높은 곳에 있는 분들 중에 못 배운 자 있던가. 차고 넘치게 똑똑한 자들이 자신의 똑똑한 자원을 엉뚱한 곳에 활용할 때 세상은 일그러진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사람과 이해 관계를 따지는 사람을 냉정하게 구별해야 한다. 배워서 남 주냐고 하지만, 배워서 남 줘야 한다. 배운 것을 내가 가지기 때문에 문제다. 마찬가지로 내가 번 돈이라 하여 내 마음대로 쓰는 것도 아니다. 내 주머니 돈이 내 돈이고, 나의 지식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이기적으로 만든다. 그것이 우리에게 ‘사회적 윤리’를 상실하게 만든다. 내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도대체 내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나서 다시 아무 것도 쥐지 못한 채 떠날 존재들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만큼 중요한 스스로의 질문은 그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진단해야 한다. 나, 이것은 내게 하는 말이다. 실망스러운 인물을 볼 때마다 내 가슴을 치며 제발 나는 저렇게 나약한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슬픈 일이다. 사회적 윤리를 상실한 채 개인의 야망에만 불타오르는 배운 삶의 정체는 서로가 서로의 삶을 할퀴며 황폐화만 초래한다. 나는 마지막까지 이상을 잃고 싶지 않다. 이상을 잃는 것 보다 처참한 가난과 절망적 슬픔은 없을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 ‘생 피에르의 배반 Le reniement de Saint-Pierre’ 중 한 구절처럼, “행동이 꿈의 자매가 되지 않는 이런 세상”이다. 어떻게 해야 행동이 꿈의 자매가 될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아름다운 글을 옮겨본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 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중략)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 Albert Einstein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중에서, 1949년, Monthly Review 창간호
 

야망에 찬 도시의 불빛 속에서 하이애나가 득실거린다. 고독을 두려워하는 하이애나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이 도시에 내려와 썩은 고기를 찾기 위해 킁킁거린다. 연일 울리는 하이애나들의 포효 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 음침한 야망의 도시에서 인간으로 오롯이 살아남는 길은, 모든 것을 걸고 당당히 외로워지는 것 밖에 없는 듯 하다.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하이에나가 아닌, 고고하고 청결하게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될 수 있는 인간으로 사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 고독해져야 가능한 일일까. 고독한 ‘바보’ 소리가 듣기 싫어서 너도나도 잘난 하이애나가 되고 있구나. /gala


<한겨레>


Articles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