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술님 글.
이 수치스런 일구이언 을 하면서 까지
다시 이 계시판 에 이름을 내미는 것은, 이렇게 숨어 버리는것이
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비급한 회피 인것 같고
이런 자책 역시 여전히 벗을줄 모르는 어떤 한 개인의
탈에 대한 분노 보다는
어쩌면 그런 탈을 합리적으로 여기고
생산하는 조직의 그 문화성 에 몸서리 치는
나의 비명이 아니었나 라는
변명을 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다시 글쓰기 하는 나를
관리자가 거절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여전히
낮은 이웃의 시장 언어로 그런 시각적 표현을 덫 붙혀
이곳에 질문 들을 계속 해 볼까 한다.
글 제목을 " 가롯유다 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 " 이라 했다
여기에 지적한 가롯유다 란
조직 의 문화. 혹은 그 일원 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돌라" 의 본질을 말함이다
즉
종교신앙 을 이해관계 의 매개물 로 이용 하는것,
원칙이라 칭 하던것을 그 이해관계 애 따라 변개 시키는것. 의
행위 와 정신을 갖인자 를 말함이다.
한 예로
계명에 속한 모방적 창작 우상과
속죄소 의 기물 창작물 을 나의 종교 안에서 나의 신앙 지도자 들로 부터
이돌라 라 불리우는 이 우상의 바른실체 를 나는 한 번도 들어 본 일이없다.
다만 그들의 무지 의 신학 편견 으로
진작 하나님께서 주신 도구의 예술성과 그 미적 증명 을 오해 시키며
대립과 악 으로 만들어서
필요 에 따라 변개 하며 오직 우리에게 조직 굴종 만 을 되풀이 요구하는 동안
도리어 사회가 위대한 불복종 의 질문 으로
오늘 우리 기독교 를 향하여
"당신들의 우상 은 무엇인가 " ? 라는
그런 증명을 요구 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 당황스런 질문 앞에
그것이
"형태적 이돌라" 이라면 출애급 25 장 을 설명 해야 하고
"관념적 이돌라 " 이라면. 계시록 13장 11 절 또는 계시록 17장 5절 을
한치도 두러워 말고 본래 의 해석 한데로 설명 되어야 한다'
가롯 유다 들이 갖인 우상이 아닌 봐에야
어떻게 한 교파의 정체성 을 도리어 다수를 따라 악 으로 만드는
그런 탈로 쓰려 하는가 ?
만일 한 교단의 정체성 이 변했다 면
왜 변해야 하는가를 설명할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
두럽고 무서우니 이제 카톨릭 을 용 이라 지칭 하면 고발 당한다고 ?
왜 고발 당할 그런 " 우상" 을 만들어
왜 그리도 겁날짓 을 했는데?
그런 편견적 " 이돌라 "를 만들어 우리 를 왜 벅수질 시켜 왔는데 ?
...
박성술님 지적같이 지금껏 교회의 가르침이
1)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고정 관념이 아니었다면 교회가 지칭한 '용'의 실체를 한치의 두려움 없이 땅끝까지 퍼트려야 할것이며,
박성술님 지적처럼 지금껏 교회의 가르침인
2)"용"이조작된 허깨비였다면 "그런 편견적 idola를 만들어 왜? 우리를 벅수질 시켜 왔는데?.......라는 이 엄한 질문에
교단 정체성 걸고 정영근님을 비롯 신앙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설명" 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왜 변해야 하는가를 설명할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
아니 그런가?
같은 방향에서 보거나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을때에 가능한 질문이요 대답일 것입니다
동문서답은 동쪽에 서 있는 사람이 서쪽에 있는 사람에게 묻고
서쪽은 동쪽의 사람에게 전혀 딴방향의 대답을 하는것입니다.
박성술님이 그것이 먼저 파악이 되지 않아서 아직도 거길 떠나지 못하고
또 미련의 글을 쓰지만 보기에 참 딱합니다
상대의 벅수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행여 그들이
그 벅수질의 본질을 깨달을 것이라 여긴것이 착각일 수 있습니다.
재림교회의 방향만 방향이고
재림교회의 용어만 용어이며
재림교회의 언어만 언어이고
재림교회의 교리만 교리로 존재하는 소위 벅수들의 세상에 와서
복음과 성경의 방향을 말하고
복음과 성경의 용어로 속삭이고
복음과 성경의 용어로만 말하려 함이 이돌라인
그 높은 남은무리의 피라밋앞에서
"야호"를 외치는 또 다른 방향의 벅수에게
나는 할말을 잃은 또 하나의 벅수임을 고백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시골생활을 권면하고
주의 이름으로 병을 낫게하고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남은교회 참교회을 떠들어대지만
성경의 방향과 복음의 방향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계시록의 영원한 복음이랍시고 둔갑한 시작ㅁ부터 방향이 다른
복음들을 백년이 넘어가도록 그 무정란의 알 (진리)들을 품었지만
우리 마음과 생애속에서 부화하지 못함을 보고 우리는 솔직한
회개의 심정으로 성경에게 자세히 물어야 할 때입니다
하주민의 성경이야기가 그래서 통쾌합니다
기타 거짓들의 불꽃놀이가 참 불쾌합니다
요즘의 민초에는 잡초가 마당가득 극성입니다.
인심좋고 넉넉하고 너무나 인간적인 주인장의 수염가락사이에서
구더기처럼 우굴거리는 저 진리같으나 비진리인 기생충들이...
그런 의미에서 카스다에서 고군분투하면서 시시각각
추방의 절벽에 메달려 있는
김동섭 (?) 이란분이 올리신 저 질문들이
박성술님 지적같이 지금껏 교회의 가르침이
1)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고정 관념이 아니었다면 교회가 지칭한 '용'의 실체를 한치의 두려움 없이 땅끝까지 퍼트려야 할것이며,
박성술님 지적처럼 지금껏 교회의 가르침인
2)"용"이조작된 허깨비였다면 "그런 편견적 idola를 만들어 왜? 우리를 벅수질 시켜 왔는데?.......라는 이 엄한 질문에
교단 정체성 걸고 정영근님을 비롯 신앙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설명" 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왜 변해야 하는가를 설명할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
아니 그런가?
정말 곱씹어야할 적절한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