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 부터 나는 산을 좋아했는데, 위의 문구에 대해 약간의 컴플렉스가 있었다. 나는 어진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본성이 어진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산을 좋아하니까 최소한 지혜로운 사람은 되겠구나하고 위안받기도 했다. 성격은 변하지 않는데 스스로 생각해볼 때 마음이 넓고 관대하고 어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하고 직관이 뛰어나 열심히 노력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될 것 같다.
나는 아프면 산에 들어가곤 한다. 감기가 걸렸거나 몸살이 났거나 기력이 쇠잔해지면 산으로 들어간다. 산은 놀라운 치유의 능력이 있다. 울창한 나무와 시냇물이 풍부한 계곡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발바닥으로 기가 전해와 두 발목이 팽행해지고 종아리가 힘차게 수축하며 허벅지로 힘이 전해져 허리가 곧게 펴지며 척추를 따라 맑은 기운이 머리로 올라와 급기야 깊은 호흡을 할 새 온 몸으로 산의 기가 퍼진다. 산에서 걷는 거리의 반도 안되는 거리의 공원을 걸으면 집에 올 때 쯤 되면 힘이 쫙 빠지는데 신기하게도 산행을 하면 아무리 많이 걸어도 마치 전기가 흐르는 철로에서 전력을 송신받아 움직이는 전동차처럼 힘이 넘친다. 이쯤 되면 나는 산사람이다.
강의와 진료는 사람의 기를 필요로 한다. 기는 강한데서 낮은데로 흐른다. 지식은 차있는 데서 부족한 곳으로 흐른다. 요즘 너무 많은 강의에 시달렸다. 대학에 있었을 때는 진료가 적어서 강의를 해도 그리 피곤함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매일 진료를 보니 그 자체로 피곤하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두번 있는 저녁 강의는 체력을 바닥내고야 말았다. 어떻게 하면 올바로 이해시키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올바른 행동을 끌어낼까 하는 것은 환자를 볼 때나 강의를 할 때나 매한가지이다. 그러려면 항상 내 머리속은 팽팽돌아가고 심장은 힘차게 펌프질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후와 같은 허탈감과 피로가 엄습한다. 이번 달은 무척 힘든 달이었다. 평창에서 강의를 한 후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혀가 헐고 온몸이 으슬으슬 춥고 밥맛도 떨어지는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1주일을 일찍 자고 소식하고 집에서 싸온 밥을 먹고 보신을 하였으나 낮에 쉬지를 못해 몸이 더 나빠졌다. 산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 산행을 잡았다.
일요일 새벽부터 비가 왔다. 갈까 말까 하다가 집에서 있느니 차라리 이슬비 맞으며 산에 가는 게 좋다는 결심이 섰다. 10시에 구파발역에서 일행을 만났을 때 다행히 북한산 하늘은 먹구름만 있었다. 그러나 삼천사계곡으로 들어가자 마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비를 가져오긴 했으나 우산을 가져오는 것이 날 뻔했다. 우비가 통풍이 안되 너무 더웠다. 그냥 비를 맞으며 계곡을 거슬로 올라갔다. 비가 더 심하게 오는데 바위 밑의 피난처는 이미 다른 일행이 점거했다. 평소에는 무거워도 줄기차게 가지고 다니던 플라이도 놓고 왔고 심지어 배낭덮게도 오버트라우저도 다 두고 나왔다. 비는 점점 더 심해져 온 몸을 적셨다. 날씨가 더움에도 몸에 젖은 물이 증발하면서 잠열을 뺏아가 저체온증이 올 것 같았다. 그냥 악으로 버티면서 비봉능선으로 가는 계곡을 올라섰다. 너무 비가 와서 능선에 올라서면 다시 온길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능선에 올라서자 마자 비가 멎었다. 사모바위로 가서 서울을 조망했다. 북한산은 서울의 조산이다.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이며 서쪽으로 인왕산이 보이며 남쪽으로 남산이 버티고 있었다. 대학로 뒤의 서울의 동쪽산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괜챦았다. 비가 온 후 개었지만 구름이 낮게 깔려 덮지 않아 더 좋았다. 일정을 바꾸어 비봉능선을 다 타기로 했다. 사모바위근처에서 간단히 요기한 후 문수봉으로 방향을 잡았다. 승가봉을 넘으며 사진을 찍었다. 승가봉에서 바라본 비봉과 사모바위는 그야 말로 웅장했다. 비봉 능선의 양쪽으로 보이는 경치는 그야말로 절경이다. 늘 오는 산이지만 명산이다. 문수봉에 이르러 내리막길을 택해 청수동암문에서 산을 내려갔다. 청수동암문에서 삼천사로 가는 계곡은 그야 말로 절경인데 인적도 드물어 좋다. 경사가 워낙 급해 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비온 뒤의 청량한 공기를 듬뿍 마시며 하산을 시작했다. 눈이 시리게 푸른 초록의 나뭇잎과 이끼들과 우당탕 내려 꽂는 낙수가 어우러져 산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 비올 때의 먼지가 올라오는 냄새와 비온 후의 약간 비릿한 냄새는 아마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냄새가 아닐까 하는데 항상 묘한 동경과 향수를 자아낸다. 삼천사로 다시 내려와 하산을 했다.. 일산으로 돌아와 3대째 한다는 대동관이라는 평양냉면 전문점에서 냉면과 만두를 맛있게 먹고 집근처의 핸드드립커피 전문점에서 발음하기도 힘든 새로 나온 커피인 브라질리안 .... 를 마신 후 행복하게 헤어졌다. 그리고 그날 모든 피로가 다 가셨다. 다음날 아침 근육의 기분 좋은 뻐근함을 느끼며 힘차게 출근하였다. 아침에 도착해서 문자 하나 받았다. 그날 같이 산행한 동료였다. 너무 좋은 산행이었다고 월요일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고. 그도 천상 산사람이구나.
그래서 나는 피곤하면 산으로 들어간다. 산에 기대어 지치고 망가진 몸과 맘을 치유받으러. 나는 산사람이다. <펌글>
잘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저는 산, 바다 둘다 무척 좋아하는데, 그러면 어지고 지혜로운 사람이네요!:))
그런데, 산도 없고 바다도 없는 끝도 없이 펼쳐진 평지에 살고있습니다.
좋은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