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1085] 어느 사형수의 고백 편지 “저에게 ‘오늘’은 생의 첫째날이고 마지막 날입니다”

by posted Apr 24, 2015 Likes 0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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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검찰
[내 이름은 1085] 어느 사형수의 고백 편지 “저에게 ‘오늘’은 생의 첫째날이고 마지막 날입니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ㆍ“피해자 가족 고통은 평생 십자가, 죽는 날까지 속죄하겠습니다”

세례명이 프란치스코인 정모씨는 1995년 폭력조직의 조직원과 그 애인을 차례로 살해한 후 암매장한 혐의로 이듬해 대법원으로부터 사형확정 선고를 받고 21년째 수감 중이다. 이 글은 그가 교정사목담당인 김성은 신부를 통해 전해온 ‘자기 고백서’이다. 경향신문은 그의 편지와 추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백서를 재구성했다. 

▲ “스물일곱 나이에 전과 7범,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제게
방패막이가 돼 준 것은 부모·형제가 아니라 조직이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그와 그의 여자친구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19년 전 사형선고가 내려진 이후 ‘영영 버림받았다’는 자괴감과
태산처럼 우뚝 선 죽음의 공포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운동장 한쪽에 키우는 민들레를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의 기운 나누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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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 정 프란치스코는 김성은 신부를 통해 전한 편지에서 평탄하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고백했다. 아래 사진은 지난해 4월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미사 후 유경촌 주교(오른쪽)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저는 1965년 경기도 안성군 집성촌 마을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한 생명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평택에서 요정을 운영하던 여자와 눈이 맞아 식구들 몰래 ‘두 집 살림’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녀가 아버지의 아이를 낳자 아예 그 집에 눌러앉아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서 집안 형편은 나빠졌습니다. 어린 자식 넷에 엄한 시아버지까지 모셔야 했던 어머니는 행상 등 생계를 위해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태중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안 것은 그즈음이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컸던 어머니는 낙태를 결심하고 독초를 달여 마셨습니다. 부엌을 구르다 정신까지 잃었지만 배 속의 생명은 끈질기게 버텼습니다. 몇 달 후 저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겐 바람난 남편의 자식을 품어줄 모성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의 젖 대신 큰누나가 쑤어준 미음 국물을 먹어야 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를 서로에게 계속 떠넘기면서 태어난 지 2년이 되도록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찾아간 것은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어머니는 죽도록 고생하는데 아버지의 새 가족이 사는 이층집은 으리으리했습니다. 그 집엔 저보다 한 살 많은 형과 여동생도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2만원을 주며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집의 양주병을 다 깨고 뛰쳐나와 ‘다시는 안 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당시 중3이었던 저는 더욱 방황했습니다. 공부는 뒷전이고 아이들의 돈을 빼앗거나 싸움을 하고 며칠씩 학교를 안 가기도 했습니다. 가방엔 교과서 대신 만화책과 쌍절곤, 체인 같은 싸움 도구를 넣고 다녔습니다. 주말엔 아이들에게 ‘삥’ 뜯은 돈으로 송탄 시내 극장에 가거나 만화방에 가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 저 모양’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자주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저의 최종 학력은 중졸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1980년 겨울, 저와 단둘이 살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 신세가 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제 학비라도 벌어보겠다며 공장 식당에서 일하다 쓰러지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장례 후 인천 큰누나 집으로 옮겨간 저는 이미 삶의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혼자 힘으로 험한 앞날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함께 가혹한 운명에 분노의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전과자 딱지가 처음 붙은 것은 열여덟 살 때였습니다. 인천에서 자주 어울리던 친구 중에 본드에 심각하게 중독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다른 친구 집에서 셋이 만나기로 했는데 가장 먼저 도착한 그 친구가 본드를 짜넣은 막걸리통에 코를 박고 있었습니다. 저와 다른 친구가 본드통을 빼앗자 친구는 가위를 들고 달려들었습니다. 몸싸움을 하다 본드를 마신 친구의 손가락 사이가 깊게 베이면서 방안은 피범벅이 됐습니다. 다친 친구의 어머니는 우리를 고소했습니다. 조사 후 저와 친구는 서울 가정법원으로 넘겨졌습니다. 보름간의 감옥생활을 뒤로하고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감별소(현 소년분류심사원)로 이송됐습니다. 그곳에서 2개월쯤 생활한 뒤 가정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친구는 23일 후 다시 구속됐습니다. 우리를 고소했던 친구와 당구장에서 마주치자, 순간 화를 참지 못해 보복폭행을 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가정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한 달 전 저희를 선처해준 판사님이 재판석에 앉아있었습니다. 판사님은 “이번엔 안되겠다”며 우리를 불광동 소년원으로 보냈습니다.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소년원에서 10개월 형기를 마치고 나왔을 때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하면서도 친구와 선배들을 만나면 영웅심리가 발동했고, 위험한 일일수록 물불 안 가리고 앞장서곤 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구석엔 죄의식이 응어리지기 시작했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병무청을 찾아가 해병대 지원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소년원이라도 6개월 이상 수감생활을 하면 실형 전과로 간주한다”며 불합격 판정이 났습니다. 절망은 깊어졌고 “세상엔 너란 놈은 필요치 않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너에게 누구도 호의적이지 않아!”라는 야유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두문불출 방에 처박혀 술만 마셨습니다.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사느니 차라리 죽자’ 생각하고 손목을 그었습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습니다. 가만히 누워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가 켠 음악소리가 너무 크다며 방문을 연 조카가 비명을 질렀습니다. 병원에 실려가면서 저는 다시 질긴 운명의 끈을 잇게 됐습니다. 

이후 저는 건달로 폭력조직에 몸담으면서 숱한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전과기록도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폭력과 강도상해죄로 3년6월의 형을 살고 출소한 날, 고작 스물일곱 나이에 전과 7범이 돼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들이 ‘정의’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제게 방패막이 돼준 것은 부모·형제가 아니라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은 1994년 8월이었습니다. 당시 룸살롱·단란주점 등을 관리하며 안양조직 보스의 최측근으로 일할 때였습니다. 어느날 보스는 제게 청부폭력을 지시했습니다. 아직 신뢰관계가 덜 형성된 안양 동생들 대신 친한 친구인 정○○과 임○○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일처리 과정에서 신분이 노출돼 경찰 추격을 받게 된 임○○이 불안감에 휩싸인 끝에 보스에게 전화를 걸어 협박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경찰에 쫓기니 도피자금으로 3000만원을 해주지 않으면 경찰에 제보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는 살인미수죄로 징역 8년을 살고 나온 뒤 1년이 조금 지난 상태에서 또다시 쫓기자 불안감을 없애려 마약에 의존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날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협박전화를 건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은 빼달라는 조건으로 경찰에 청부폭력 내용을 제보했습니다. 함께 청부폭력에 가담한 저와 정○○은 그와 만나기로 한 장소마다 형사들이 들이닥치고 정작 그는 매번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여자친구 집에 은신한 그를 불러냈습니다. 같이 술을 진탕 마시고 대마초도 피웠습니다. 처음부터 죽이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훌훌 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저 혼자 살겠다고 친구들을 팔아먹은 후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에 큰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주검을 암매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나선 여자친구의 목숨도 빼앗았습니다. 

일이 발각된 건 이듬해 5월이었습니다. 재판에 넘겨져 1996년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온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게 끝이구나’ 싶었고, 그토록 밀어내고 싶었던 죽음이라는 실체가 제 앞에 태산처럼 우뚝 선 느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왼쪽 가슴에 사형수임을 나타내는 붉은 번호표가 달렸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영영 버림받았다는 자괴감과 죽음의 공포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저를 인도한 건 1997년 12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한 사형수 동생을 통해 만난 하느님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저는 피해자와 유가족을 위한 속죄의 기도를 합니다. 제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는 10대 시절을 함께 보낸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열여덟 살에 감별소에서 처음 만나 같은 시기를 소년원에서 보낸 우리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2004년 이영우 신부님의 주선으로 살인피해자 유족 세 분과 저를 포함한 사형수 세 명이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여섯 명은 말없이 한동안 눈물만 흘렸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분들의 고통이 전해졌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은 제가 죽는 날까지 망각할 수 없는, 절대 내려놓을 수 없는 저의 십자가입니다.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속죄하겠습니다. 

사형수인 저에게 ‘오늘’은 생의 첫날이고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이곳에도 매년 봄이 찾아옵니다. 올해는 얼마 전 씨앗을 뿌려놓은 하얀 민들레가 싹을 틔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루 1시간의 운동시간을 활용해 저는 2년 전부터 운동장 한쪽에 작물을 심었습니다. 여름이면 그 척박한 땅에서도 토마토, 수박, 참외 등이 열렸습니다. 하얀 민들레는 2년 내리 싹 틔우기에 실패했는데, 올해는 잘 자라서 결실을 맺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녀석들이나 저나 한해살이 운명이니, 마지막 순간까지 생명의 기운을 나누면서 함께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구치소 수형번호 1085.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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