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화잇 11장 과학과 의학

by passer-by posted May 21, 2015 Likes 0 Replies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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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엘렌 화잇은 골상학, 심리학, 최면술을 그 뿌리가 사단에 있는 학문으로 간주했다. 반대로 창조과학과 의학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지했다. 그녀는 천연계를 또 하나의 성경책으로 간주했으며, 하나님의 계시와 함께 동일한 진리를 조명해주고 있다고 여겼다. 한마디로 성경과 과학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게 그녀의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과학을 무조건 지지했던 건 아니다. 잘못 가르쳐진 과학의 해악을 우려했던 화잇은 베틀크릭 칼리지를 세워 성경과 과학을 조화롭게 교육시키고자 했다. 성경과 조화를 이룬 과학, 이것이 그녀가 그렸던 “진짜 과학”이었다. 이러한 과학에 대한 견해를 화잇은 독서가 아닌 자신의 영적 체험에 근거한 것으로 주장했고, 이 부분은 도리어 화잇의 계시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근거로 도로 제시되기도 했다. 일예로 계시 중에 목성과 토성, 천왕성을 도는 위성을 묘사한 것이랄지 오리온좌의 ‘열린 하늘’에 대한 설명은 당시 천문에 일정한 조예가 있었던 조셉 베이츠에 의해 그 정확성이 인정받았던 경우처럼 말이다. 아니면 당시엔 꽤 낯설었던 외계인의 존재에 관한 신학적인 관심 역시 그녀가 보았던 초기 계시에 대한 묘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크래커로 유명한 그래함(Sylvester Graham)이라는 장로교 복음교역자는 화잇의 건강개혁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당시 활동 중이던 건강개혁자들과 연대하여 1837년 미국생리학회(American Physiological Society)를 만들었는데, 이들의 관점은 20세기가 되기 전에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모든 신체적 특성들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특히 밀러주의자이면서 생리학자였던 콜스(Larkin B. Coles) 같은 인물은 신선한 공기, 운동, 채식 식단, 자극제 기피, 의복 개혁, 성적 순결함, 약물을 쓰지 않는 의학과 같은 우리에게 꽤나 익숙한 건강 개혁 방안들을 내놓았다. 평소 신체마비나 심장병, 혈압 이상, 다리절림, 불면증, 극심한 두통, 코피, 우울증 등 심한 건강상의 문제를 안고 있었던 화잇이 이러한 의학적 관점에 흥미를 느꼈던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녀는 1863년 포괄적인 절제에 관한 계시를 받았는데, 그 계시는 상반된 가치, 즉 약물 사용, 알콜, 담배, 홍차, 커피, 고기, 향신료, 유행을 따른 의복, 성교에 대한 사악함과 더불어 일일이식 채식 식단, 물의 음용과 수치료, 신선한 공기, 운동, 절제 생활에 대한 유익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임스 화잇은 결혼 전부터 금주 금연의 절제 생활을 해왔고, 조셉 베이츠는 대표적으로 그래함의 이론을 따르는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영향을 받은 화잇은 <리뷰 앤 헤랄드>에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림신자들에게 건강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기사를 꾸준히 게재했고 자신의 건강에 관한 계시도 더불어 실었다. 또한 화잇은 성(性)에 대한 부분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는데, 그 시점은 그녀의 장남 에드슨(Edson)이 신앙엔 별 관심이 없고 소설책을 읽고, 여자들을 좋아하며,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하던 것을 걱정하던 때였다. 이 이유가 자위에 있다고 확신한 화잇은 당시 이 분야에 권위자들이었던 트랄(Russell T. Trall)과 잭슨(James Caleb Jackson)의 책을 탐독하고 자위의 정신-신체적 해악을 전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고독한 해악(solitary vice)’은 사단의 습관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극악한 범죄로 규정된다. 더불어 빈번한 자위는 유전적 이상과 기형뿐 아니라 간질환, 폐질환, 신장병, 류마티스, 신경통, 심지어 생명 단축까지 가져올 수 있다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원인에는 어린 시절 화잇이 겪었던 사고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저런 이유로 결혼을 하고 나서야 자위라는 십대들의 침대에서의 비밀스런 습관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을 도리어 축복으로 여겼고, 자신의 자녀들을 비롯한 어린 아이들이 자위에 대한 몹쓸 정보를 듣지 못하도록 그 또래 아이들과 함께 어울릴 기회를 원천적으로 틀어막으려 애썼다. 여기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화잇은 자신의 이웃에 살았던 두 아이, 사무엘과 찰스가 오랫동안 자위를 해온 것을 직접 이상으로 보았고, 그래서 그들과 자녀들이 어울리지 못하게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무엘은 82세까지 살았고, 미시간주 상원의원을 두 회기나 담당할 정도로 혈기왕성했으며, 찰스 역시 반복된 자위로 인해 지능과 시력을 잃었다고 화잇의 확신과 달리 71세까지 지능과 시력에 아무런 문제없이 장수했다.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성문제와 관련된 저작은 대부분 그래함이나 고브(Mary Gove), 잭슨, 콜스, 골상학자인 파울러(O. S. Fowler), 주립정신병원장이었던 우드워드(Samuel B. Woodward)의 책들에 의존해있으나, 그녀의 책을 출판했던 편집자 제임스 화잇은 강박적으로 이러한 책들을 인용하고 거기에 각주를 다는 것을 꺼려했으며 노골적으로 그녀가 오로지 계시에만 의존하여 건강과 관련된 책들을 저술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화잇 자신도 초기 건강과 관련된 자신의 저술들과 당시 여타 건강개혁자들의 저술들 간에 보이는 유사성으로 비롯한 여러 인사들의 의혹과 비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언급을 했다. “내 관점은 여타 책이나 다른 이들의 의견과는 독립적으로 쓰여졌다.”

1849년에 그녀는 세속적인 의료진들에 의존하는 것을 믿음 없는 행위로 간주했다. 기도에 매진하지 않고 세상의 의사에게 병자들을 의탁하는 건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 1850년대 초 뉴욕에 사는 한 재림교회 자매가 그러한 권면을 믿고 버티다 죽자, 화잇은 극단적인 신념을 가지고 의사를 부르지 않은 주변 재림교인들을 비난했다. 1868년까지는 자위의 문제에 집중했으나, 그 시점 이후부터 화잇은 자신의 동물적인 욕정을 채우기 위해 배우자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문제로까지 성적 문제의 관심을 확대시켰다. 화잇은 욕정을 풀기 위한 자위나 부절제한 성교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 각자에게 미리 정해주신 ‘생기(vital force)’를 낭비하는 것은 결핵이나 요절을 낳을 수 있다는 견해를 지녔다. 그녀는 단 한 차례도 성교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쓰지 않았다. 1904년 일부 교인들이 그녀에게 내세에도 자녀가 태어나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날카롭게 질문을 받아 그러한 물음은 사단이 심어준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1863년부터 그녀가 죽은 1915년까지 화잇은 줄기차게 건강개혁을 부르짖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재림교인들의 개혁은 더디기만 했다. 심지어 일부 교역자들조차 생선과 육류가 식탁에 버젓이 오르고 있었다. 사실은 화잇 자신도 1870년대 중반까지 육류를 제대로 끊지 못하고 있었다. 18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는 육식을 극복하고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1863년 건강 묵시에서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명약인 물을 가지고 환자들을 치유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사실 수치료는 당시 미국을 풍미하던 대체의학이었다. 그녀는 남편 제임스 화잇과 함께 1864년과 1865년 나름 잘 나가는 뉴욕 댄스빌의 수치료 시설들을 둘러보았고 거기서 깊은 영감을 얻어 베틀크릭으로 돌아와 재림교회식 수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젊은 의사 캘록이 이를 맡아 위생병원을 세계적으로 유명한 치료 기관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켈록은 거기서 씨리얼과 건강식품을 만들어 남동생과 함께 떼돈을 벌었고 이에 그는 특허권을 교회에 넘겨 교역을 지원하는 비용을 벌자고 제안했으나 화잇은 안타깝게도 그 제안을 거절했고, 십년 뒤 그녀는 더 성공적인 콘플레이크에 대한 상업적 권한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마저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1863년 건강 묵시를 본 이래로 그녀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건강 관련 글들을 써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의학이 발달하자 그녀는 자신의 이전 글들을 그 변화에 맞춰 바꾸어왔다. 파스퇴르가 세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전에 화잇은 하나님이 육류에 암을 일으키는 “체액(humor)”이 들어 있는 것을 묵시로 보여주셨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그녀는 그 표현을 바꾸었다. 그래서 1905년판 <치료봉사>는 “채액”이라는 단어를 “세균(germ)”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출판되기에 이른다. 1907년 켈록이 교회를 떠나기 전까지 그는 화잇에게 최신 의학 상식과 정보를 전달해주는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했다. 빈번히 그녀는 건강과 관련된 글을 쓸 때 켈록의 연구실에 들르거나 그의 서적을 탐독하든지 혹은 그와 개인적인 서신을 주고 받았다. 켈록의 영향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수혈을 추천했고, 앞이마의 검은 반점을 치료하고자 X-레이 시술을 받았고, 천연두 백신을 맞기도 했다. 1900년 호주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는 정력적으로 남가주에 의학대학과 위생병원들을 세우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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