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tanarrative of Ellen Harmon White

by fallbaram. posted May 21, 2015 Likes 0 Replies 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The metanarrative 에 대한 정확한 한국어를 찾지 못해서 그냥 그 단어를 설명하고자 한다.

일련의 역사나 이야기 그리고 사건등을 통해서 그 테마가 무엇인지를 결론짓는 것을 말하는 형식이다.

화잇부인이 성경 (구약과 신약전체)을 통해서 내린 metanarrative 는 "The Great Controversy"  (3500 pages)이다.

이 선악간의 대쟁투를 우주적인 그림으로 (보좌에서 시작한) 보았고 증오와 질투의 시작인 사단과

계명을 중심으로 사랑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대조적 전쟁으로 이끌어 가면서 둘간의 쟁점이 계명 (특별히 십계명)

이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강조를 한다.

간추려 말한다면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사랑이라는 계명을 성취하고 우리는 그의 성취속에서 다시

계명의  성취 즉 사랑의 성취를 위탁받는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용서 (justification) 의 시작이지만

그 'imputed rightness" 는 필경 다시 "sanctification" 으로 발전해서 믿는자들이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절대적인 도덕적 완전 (absolutely moral perfection) 에 이르러야 하며 그것이 마지막 때에 이루어 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바로 그것이 조사심판을 통해서 진행될 것이며 그런 완전을 향해 가는 선상의 두 핵심은 "믿음" 과 "행함"

이다 라고 믿었고 종말의 우주적인 이슈는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가 될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녀의 신학을 바라보면서 Dr. Guy 는

그녀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고 믿음을 강조하고 또 그것을 키워가기를 강조했고

그녀의 목회적 또는 교단중심의 사고속에는 변할 수 없어 보이는 보수적인 면과 점진적인 변화의 여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모순 (paradox) 이 함께 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세가지 두드러진 것에서 보수적 내지는 거의 근본주의자 (fundamentalist) 에 가까운 면을 견지했다


1. 성경은 오직 King James 역만 사용했으며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고

2.재림교리를 재외한 일반적 특별히 삼위일체와 속죄의 교리에선 당시의 청교도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3.재림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주된 준비중에 행동의 성결 (옷차림등) 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굳게 확신했다


칠십년의 봉사를 통해서 그녀는 신학자로서의 면모보다는 예언자 (messenger) 적 면모로서 충실했지만 때로는

심오한 신학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결론

이제 그녀의 신학적인 견해와 활동들에 관하여 설명한 교단내의 저명한 학자의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그녀에게 두드러진 신학적 사고를 다시 한번 짚어 본다면


1.문자주의 (fundamendelism)-킹 제임스 성경의 번역본만 중심으로 발전된

2. 종말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에서 믿음 못지않게 나타나야 할 거룩한 행동 (행함)

3.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으로 표현된 계명의 중심이 안식일과 그 시금석으로 주어진 안식일 준수


이상의 것들을 반추해 보니 그녀의 신학속에서 비추이는 paradox 뿐 아니라

어쩌면 복음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성경적 그리고 그리스도인적 믿음 또는 신조 사이에서도

paradox 가 있음을 보게된다.


이를테면 믿음이란 "믿음의 주" 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것이지 계명을 지키거나

자신의 행동을 고쳐가는 것이 아니라는 성경적인 definition 이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교회안에 편만한 믿음에 관한 오해는 믿음은 십일금 잘 드리고 교회에 봉사많이 하고

특별히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히브리 11장은 믿음은 오실자를 바라보거나

또 이미 오신자를 바라보는 것이며 믿음의 주이신 장본인만이 신약에서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믿음이 크다 작다 하시는 이유인 것이다. 모세가 준 구약의 모든것을 지킨자들에게 성경은 믿음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믿음은 철저히 예수에 관련된 것 (생각이던지 행동이던지) 을 말함이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이다.


또 하나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란 오직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다시 오심에 관한 일이지만

이세상 역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예언하는 것이나 이웃집 아이가 자위행위를 하는것을 계시로

본다거나 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지 않는것 같다 (내 나름의 metanarrative 에 의하면).

굳이 얘기하자면 더 중요한 예언 (십자가) 그리고 덜 중요한 예언 (말세의 징조들)이라고 할까.

끝으로 말세 혹은 종말에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것이 의복이나 음식이나 행동 (품성)이라면

우리가 부활하거나 승천할 때에 지금의 우리가 가진 육신이어야 한다.

만약에 육신이 아니고 새로운 영 (하나님의 속성인 영과 영원을 입는) 으로 일어난다면

육신에 투자한 많은이들이 1844년 보다 더 큰 낭패를 볼 것이다.


한마디만 더 한다면

화잇부인의 소위 예언적 봉사는 성경에 있는 부분을 더 확실히 설명하고 견고히 하기 보다는

성경에 없는 것들을 더 많이 끌어내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들을 참 많이 다루었다.


이 때문에 그분이 선지자라 믿는 자들이 생기고

동시에 이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 하는 자들이 생길 수 있는 여지를 독자들에게  남기며

그녀의 신학의 모든것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물론 다음에 그녀의 "실천신학" 의 부분이 남아있지만.






Articles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